밀실 황금시대의 살인 - 눈의 저택과 여섯 개의 트릭
가모사키 단로 지음, 김예진 옮김 / 리드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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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재미있게 읽고 생각을 정리한 서평입니다.>



세상에 정말 풀 수 없는 밀실이 존재한다면, 그 안에서 벌어진 살인은 어떻게 될까? 『밀실 황금시대의 살인―눈의 저택과 여섯 개의 트릭』은 이 단순하지만 매혹적인 질문 하나로 출발해, 우리를 기묘하고도 정교한 세계로 데려간다.

작품은 제20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문고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한 만큼, 그 실험성과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그 실험이라는 게 다름 아닌 ‘밀실이 너무 완벽하면 살인도 무죄가 되는 세상’이라는 설정이다. 그럴듯한 가정이라기보다는 완전히 비상식적인 논리인데, 작가는 이 황당한 전제를 아주 치밀하게 구축해낸다.

삼 년 전, 완전한 밀실이라는 이유로 실제로 살인범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 세상에 충격을 안기고, 이후 국가는 밀실 등급 제도를 신설하고, 밀실 설계사와 밀실 탐정이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등장하게 된다. 무슨 SF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작가는 그 질문을 뻔히 알고 있다는 듯 전혀 무리 없이 이야기의 기반을 쌓는다.

배경은 '설백관'이라는 외딴 펜션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깊은 산속, 유일한 다리는 끊어지고 휴대폰 전파도 닿지 않으며, 당연히 첫사건 직후 유선 전화마저 끊긴다. 너무나도 익숙한 클로즈드 서클이다. 추리소설 좀 읽었다면, “아, 또 이거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다음부터의 전개가 심상치 않다. 연쇄 살인이 시작되고, 놀랍게도 모든 사건 현장이 또다시 완벽한 ‘밀실’이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무려 여섯 가지나 준비되어 있다.

이쯤 되면 의문이 든다. 밀실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것도 각각 다른 트릭으로? 그런데 이 작품은 그걸 해낸다. 각 밀실마다 전혀 다른 기법과 장치, 물리적 조건을 사용하면서도 허술하지 않다. 트릭 하나하나가 논리적으로 설계되어 있고, 단순히 “이건 무슨 마법이다!” 같은 식으로 넘기지 않는다.

물론 읽다 보면 “말이 돼?”라는 의심이 들 수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작가는 차분히 증거를 제시하고, 독자가 끊임없이 추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고전 추리소설에서 맛볼 수 있는 ‘독자와의 게임’이 이 작품 속에서 살아 숨쉰다.

등장인물들도 매력적이다. 밀실 트릭을 설계하는 ‘밀실 설계사’, 그것을 해체하려는 아마추어 탐정과 3년 전 그 사건의 주인공. 그리고 각자의 비밀을 품고 설백관에 모인 이들. 죽어야 하는 이유? 그런건 없다.

특히 주인공과 범인의 관계가 아주 흥미롭게 짜여 있다. 범인이 이미 저지른 범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현재의 사건을 추리한다는 구성은 흔치 않다. 게다가 그 추리가 단순한 회상이나 고백이 아니라, 진짜로 머리를 굴리고 논리를 조합해 가며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더욱 몰입을 불러온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진지하면서도 유쾌하다. 밀실, 살인, 무죄, 법적 허점 같은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문장 스타일은 빠르고 재치 있으며 어렵지 않다. 일본 추리소설 특유의 ‘가볍게 읽히는 무거운 이야기’ 전통을 잘 이어받은 느낌이다. 작중 세계관 자체가 풍자적이라, 너무 진지하게만 읽기보다는 수수께끼를 풀듯이 밀실 트릭을 푸는데만 집중해도 될 것 같다.

"밀실 황금시대의 살인"은 단순한 ‘밀실 트릭 퍼레이드’가 아니다. 그것은 이 장르가 가진 고전적인 미덕―논리, 정밀함, 추리의 쾌감―을 다시 꺼내 들고,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밀실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소비되다 끝나는 게 아니라, 밀실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장치로 기능하게 될 때, 추리소설은 어떤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읽는 내내 오락성과 지적 즐거움이 균형을 이루고,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여운이 남는다. 하나의 트릭도 풀어내지 못한 나는 범인도 탐정도 될 수 없겠지만, 트릭을 좋아하고 논리로 세계를 정복하고 싶은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도전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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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연수 옮김, 안지희 감수 / 히스토리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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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을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가슴이 묘하게 쓰라렸다. 단순히 비극적인 결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도 격렬하고, 황홀하고, 때론 너무나 어리석어서, 마치 불 속을 달려가는 나비처럼 아름답고 아찔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여기서도 여왕이지만, 버나드 쇼의 소녀 같은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셰익스피어가 그린 그녀는 강하고, 요염하고, 눈치 빠르고,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그녀는 한순간의 사랑에도 모든 걸 걸고, 질투하고, 도망치고, 다시 돌아오고, 눈물 흘리면서도 왕관을 절대 놓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는 너무 극단적이라 웃기기도 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이 여자는 진짜 천재야" 하고 감탄하게 됐다.


안토니우스는... 음,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쟁보다 사랑에 더 취한 장군'이라고 해야 할까. 로마의 영광을 짊어진 사내가, 이집트의 향기 속에서 점점 무너져가는 모습은 애처롭고도 낭만적이다.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탓하면서도 놓지 못하고, 배신당했다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이 둘의 사랑은 바보 같고도 위대했다. 그것은 나라와 전쟁, 명예와 명성을 다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렬하며 결국 목숨을 걸게된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은 역시나 눈부셨다. 간결한 대사 하나에도 감정이 쏟아지고, 그들의 말싸움조차 시 같았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칼을 들고, 슬프다고 말하면서 웃고, 죽음 앞에서조차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이 작품은 단지 두 연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로마와 이집트, 질서와 자유, 이성과 감정, 명예와 사랑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의 이야기다. 클레오파트라는 결코 단순한 요부가 아니고, 안토니우스는 그저 망가진 장군이 아니다. 둘 다, 너무도 복잡하고 솔직하고, 인간적이었기에, 끝내 비극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지막 순간에도 왕관을 썼고, 안토니우스는 죽기 직전까지 그녀를 탓하면서도 사랑했다. 그들의 사랑이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진심이었기에 오래 남는다. 진심은 끝내, 비극 속에서도 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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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의 남자들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연수 옮김 / 히스토리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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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제목만 보면 뭔가 거창하고 역사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막상 책을 펼쳐보면 그 분위기가 꽤 다르다. 작가 특유의 유쾌함과 풍자가 번뜩이는 대사들 덕분에, 아주 오래된 고대 로마 이야기가 갑자기 가까운 옆집 얘기처럼 느껴진다.




처음엔 클레오파트라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여왕’ 이미지로만 생각했는데, 이 작품 속의 그녀는 훨씬 다르다. 어리숙하고 철없는 소녀, 겁도 많고 잘 우는 애기 같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이 희곡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클레오파트라를 전설적인 인물로 그리는 대신, ‘성장하는 사람’으로 그려낸다. 자기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겁에 질려 도망치던 소녀가, 카이사르와의 대화를 거치며 점점 리더로서의 자의식과 책임감을 배워간다. 그 과정이 너무 생생하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카이사르!
그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정복자라기보다는, 이상하리만치 여유롭고 사려 깊은 철학자 같았다. 전쟁 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고, 클레오파트라와 이야기할 때는 아이에게 말하듯 다정하게 설명해준다. ‘위대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클레오파트라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카이사르가 그녀를 억누르지 않고 그녀에게 질문하며 답을 찾게 만들어 준 덕분이다.

원 제목은 ‘Caesar and Clopatra’로 1899년에 쓰여졌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내 생각에 이 책의 주인공은 카이사르 같다. 상냥한 남자인척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여유있고 능글맞은 정치인으로 멋지게 장식하는 그의 모습이 좀 얄밉기도 하다.

희곡의 모습을 한 이 책은 그 생김새보다 훨씬 재미있다. 고대의 대제국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야기의 중심은 인간적인 대화와 성찰에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가의 위트가 촘촘히 박혀 있어서, 가볍게 웃다가도, ‘아…’ 하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이 희곡은 단지 역사극이 아니다. 작가의 탁월한 글 솜씨로 클레오파트라를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마치 눈앞에서 한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는 이 책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조지 버나드 쇼의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고전이며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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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대로의 자연 - 우리에게는 왜 야생이 필요한가
엔리크 살라 지음, 양병찬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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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재미있게 읽고 생각을 정리한 서평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덮고 나니, 책 한 권을 읽었다기보다 세상에 대한 시선을 하나 얻은 기분이었다. 엔리크 살라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자연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우리는 그 안에 있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너무 자주 잊고 산다는 데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지구 생명체의 ‘자연스럽지 않은 멸종’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종의 소멸이 단순한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멸종은 자연의 일부일 수 있지만, 지금과 같은 속도와 방식은 분명 ‘인위적 재앙’에 가깝다. 삼림 파괴, 바다 오염, 무분별한 개발은 생명체의 연쇄적인 붕괴를 불러오고, 그 여파는 결국 인간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작가는 ‘바이오스피어 2’라는 인공 생태계 실험의 실패 사례를 통해, 인간은 결코 자연을 완벽하게 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자연을 통제할 대상이 아닌, 우리가 의존하고 보호해야 할 존재로 바라본다.

작가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건, 우리는 생태계의 일부이지, 그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생태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해 어렵지 않게 설명해준다. 생태계는 단순히 어떤 동물과 식물들이 한 공간에 함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과 그들이 사는 환경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끝없는 균형 조절, 그리고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순환이다.

예를 들어, 포식자와 먹이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한쪽이 다른 쪽을 줄이거나 없애는 구조가 아니다. 먹이가 줄면 포식자도 줄고, 포식자가 줄면 먹이가 다시 늘어나는 복잡하고 정교한 조절 시스템이 작동한다. 그 안에는 피드백 루프와 자정 능력이 존재하며, 생태계는 ‘멈추지 않고 스스로 조정하는 생명 시스템’이다.



생태계는 단순히 식물과 동물이 모여 사는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균형을 이루는 복잡한 구조다. 생물 다양성이 클수록 생태계는 튼튼하고 안정적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과 건강을 더 잘 제공해줄 수 있다는 사실도 강조된다.

흥미로운 건, 작가가 생태계를 설명할 때 생물학적 정의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항상 연결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생물다양성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많은 종이 살아서 좋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식량, 공기, 물, 건강에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생존의 전제조건이라는 것.

책 후반부에서는 ‘리와일딩(rewilding)’ 개념을 제시하며, 무너진 생태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향도 함께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리와일딩은 단순한 복원이나 과거 회귀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 우리가 처한 조건 속에서, 자연이 다시 자생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해주는 미래 지향적 방식이다.



무엇보다 강력한 메시지는,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단지 도덕적인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을 위한 조건이라는 점이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도 생물 다양성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다. 건강한 자연이야말로 최고의 백신이며,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과학자답게 분석하면서도 결국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려 한다. 책을 읽다보면 자연에 대한 사랑, 경외감, 감탄. 이런 감정들이야말로 진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그의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은 단순한 생태학 개론서나 환경운동 매뉴얼이 아니다. 이 책은 하나의 팩트체크이다. 우리가 지금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다시 묻는 책이다. 멸종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 생태계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의 그물망 안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

“우리는 자연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이 책은 그 말의 무게를 현실로 끌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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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지구라는 놀라운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아이작 유엔 지음, 성소희 옮김 / 알레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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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아이작 유엔’은 이야기꾼이다. 나무늘보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나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고, 또 그러다 보면 꼬마해오라기가 인간이 붙여준 이름에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봄철 내내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책 속에는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물, 나무, 식물, 곤충, 게, 뱀 등 셀 수 없이 많은 종들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굳이 의인화를 하지 않아도 이들을 충분히 인간의 이해 영역 안으로 끌어들인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의 파티에 코끼리를 초대한다면 역사상 유일하게 샐러드가 동이 날 거라는 유쾌한 상상을 하기도 하고, 콧구멍을 눈이라고 착각해 항상 웃는 얼굴이라고 믿는 홍어가 사실은 특별히 잘 토라지고 화를 잘 낸다는 등의 농담과 말장난이 이어진다. 우리는 작가의 장단에 적당히 맞춰서 함께 키득거려주기만 하면 된다.


이 책은 인간이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들의 터전을 파괴하고, 그들조차도 살아남을 수 없게 만들고 있는 현실을 두고 굳이 설교하거나 비판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다.


책 전체는 지구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들의 여흥과 습성, 취향, 성격에 대한 잡담처럼 진행된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우리에게 소름 끼치는 진실을 던진다.

“혹독한 빙하 시대를 살아남은 나무늘보는 얼음이 녹으며 다시 찾아온 따뜻한 기후에는 대처하지 못했다. 게다가 새로운 세상과 함께 새로운 위협도 나타났다. 두 발로 걸으며 사냥하는 이 동물은 커다란 덩치로도 날카로운 발톱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p.78)


이처럼 중간중간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희망도 이야기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무너뜨리고, 가꾼다. 심지어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해를 입히고, 눈물을 흘린다. 스스로 초래한 일의 무게를 짊어진 인간은 여전히 타자를 끈질기게 괴롭힐 힘이 있다. 하지만 그런 힘을 지니고도 시선을 반대로 돌려서 집착하는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 더 넓고 더 커다란 공동체를 보고 깜짝 놀랄 수도 있다.” (p.61)


그럼에도, 작가는 비관적인 사람이 아니다. 책 어디에서도 인간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비관의 늪에 빠져 우울해하지 않는다. 대신 조심스럽고 은근한 방식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길에 대한 힌트를 건넨다.


“말을 가지고 놀고, 온 지구를 가지고 놀고, 두 놀이를 뒤섞어 보라. 관점도 바꾸고 감각도 바꿔보라. 땅거미가 질 무렵이나 가을 햇살이 퍼질 때 밖으로 나가서 강둑에 잠시 머물러보라. 기러기 떼가 되는 대로 V자 그리며 하늘 높이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라. 물가를 굽어보는 참나무에서 도토리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라. 도토리 소리는 피라미가 수면 뒤로 뛰어올랐다가 들어갈 때 나는 퐁당 소리와 무엇이 다른지 귀 기울여보라. 절대로 완전히 잠잠해지지 않는 잔물결을 응시해보라…. 목을 길게 빼고 살펴보라.” (p.254)


이 문장을 읽으며 ‘목을 길게 빼고 살펴보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바라볼 때, 조금만 더 시간을 들이고 관찰한다면 우리가 혐오하거나 무시했던 존재들에 대해 조금쯤은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적어도 같은 생명체로서의 약간의 공감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은 매우 다르다. 어느새 우리는 곤충과 해충을 구분하지 못하고, 다리 많은 생명체는 무조건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벌레가 산다는 이유로 숲에 약을 뿌리고, 예쁜 뿔을 가졌다는 이유로 코끼리를 사냥하며, 넓디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다니던 고래는 그물에 걸려 죽어간다.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좁아졌는지 돌아보게 된다. 책을 읽으며 수많은 생명체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지만, 끝내 벌레나 뱀 종류의 사진은 찾아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관찰은 마음이 여는 일이고, 이해는 시간이 들여야 가능하다. 그러니 작가의 말처럼, ‘목을 길게 빼고’ 세상을 다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잔잔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다.   


헤스티아(@hestia_hotforever)가 모집한 서평단에 당첨되어 알레 (@allez_pub)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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