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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ㅣ 노벨라33 세계 중편소설 전집 9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최은경 옮김 / 다빈치 노벨라 / 2023년 11월
평점 :
이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지하에 사는 한 폐인이 자신의 사상을 일방적으로 토해내는 일종의 철학적 에세이이며, 2부부터 진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서사가 존재한다. 1부의 수리과학 및 합리주의 비판 관련 내용은 다소 선각자 스러운 것으로서, 실존주의 계열로 해석되는 작가들이 이를 참조하여 더 나은 작품들을 창조했으므로 굳이 오늘날에는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된다. 고통스러워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부분, 무기력에 중독된 부분은 다소 인상적이긴 했으나 보들레르가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더 잘 썼기에 마찬가지로 별 의미가 없다.
2부는 강한 편집증에 시달리는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성질의 글이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광기는 진짜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지 않은 자들은 감히 흉내낼 수도 없는 것이어서, 후대 작가들이 그의 심리묘사에 강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필체를 도저히 모방할 수가 없다. 심리 묘사가 경이로울 뿐 소설로서 서사가 그리 탄탄한 작품은 아니다. 친구들에게 모욕을 느끼고 복수하겠다고 마음 먹어 놓고 다시 비굴하게 그들에게 빌붙으려는 주인공의 행태는 글을 쓴 도스토예프스키가 제대로 또라이라는 생각만 들고 재미는 없었다. 쥐뿔도 없으면서 창녀 리자를 구원하겠다고 설치다가 마지막에 자기 혐오 발언만 내뱉고 끝까지 궁시렁거리는 부분은 인상적이었지만 이 또한 "악령" 이라는 상위호환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