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투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도 훨씬 더 전에 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진지하고 냉소적인 아이들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투이의 깊은 속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 P85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오래도록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했다는 걸 깨달았다.  - P86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그런데도 처음 투이네 집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리면 그때 느꼈던감정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투이네 식구 모두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던 일, 그 환대에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과 우리 두 식구가 같은 공간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던 공기를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로이어질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작 한 명의 타인과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는 어른이 된 나로서는 그때의 일들이 기이하게까지 느껴진다. - P69

엄마가 떠났을 때, 그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앤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우울했었지.‘ ‘영리한 애는 아니었던것 같아.‘큰이모와 작은 이모마저도 엄마를 그런 식으로 회상할 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던 응웬 아줌마를 떠올렸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엄마의 예민하고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었다.

아줌마라고 해서 엄마의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엄마의 약한 면은 보지 못했을까. 아줌마는 엄마의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다 알아보고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에게 곁을 줬다. 

아줌마가 준 마음의 한 조각을 엄마는 얼마나 소중하게 돌보았을까. 그것이 엄마의 잘못도 아닌 일로 부서져버렸을때 엄마가 느꼈던 절망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엄마는 그 이후로도 마음을 나눌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햇었다. 그리웠을 것이다. 말로는 그때의 일들이 잘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엄마를 엄마 자신으로 사랑해준 응웬 아줌마를 엄마는 오래 그리워했을 것이다. - P92

씬짜오, 씬짜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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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비야.
-응.
-내레 아까워.
- 뭐가.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았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난 삼천이 너레 아깝다 아쉽다 생각하며 마음 아프기를 바라디않아.
그 말에 증조모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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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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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고 그런 만큼 플롯이 분명하고, 또 하드보일드 풍의 주인공 행위가 뚜렷한 소설들에 깊은 세례를 받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랬더니 그것만이 아니라 보르헤스도 좋아한단다. 그리고그 이유로 "그 사람이 차지하는 20세기 문학에서의 어마어마한 가치나 의미보다는 문장이나 표현이 좋다"는 점을 들었다. 보르헤스의 문장 대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놀라울 정도로 압축적이라는 것. - P440

최근에 어느 문예지에서 읽은 좌담에서인가. 황종연 선생님이 하신얘기가 기억납니다. 

소설가 어떻게 보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 안에 축적되어 있는 이야기에 의미 있는형식을 부여하는 사람들이 아니냐, 는, 저는 그 말에 상당히 공감하는 편입니다.

실제로 소설 안에 이런 대목이 나오죠. ‘세상에 떠도는 얘기란 본시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이 안엔 전설과 신화, 민담 같은 설화와 야담과 괴담, 기담 등 온갖 이야기와 소설과 영화의 컨벤션 그리고 온갖 소문과 허풍, 심지어 인터넷에 떠도는 엽기 유머 등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것을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 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소설 속 화자는 그야말로 가감과 변형을통해서 그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입장에 있는 거고요. - P443

이 소설의 그 수 많은 디테일들을 하나의 소설로 묶어세운 누빔점을 찾고 그것에서부터 이 소설 안에 내장된 놀라운 요소들이 어떤 과정이나 세공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장악하지 못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 해서 저 흩어져 있는 핵심으로부터 시작하지 못하고 정말로 두루뭉술한것부터 묻기 시작했다. 

텍스트를 장악하지 못한 자괴감이 대단했으나,
하나,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이 소설에 착안하게 된 동기부터 물었다. - P440

이 소설은 이야기들의 연쇄로 구성되어 있지만 어떤 중심 서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느 소설에 비해서 에피소드나 부분의 자족성이나 완결성이 많이 허용되는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많은 에피소드들을 거느리는 중심 서사가 있다. 

이 소설의 구조는 바로 ‘노파의 잔혹한 복수극이다. 

노파를 이렇게 소설의 시원에 위치시킨 이유가 있는지 궁금했다. 과연 노파에게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한 까닭은무엇인지 단순히 기담이나 괴담에 등장하는 노파의 이미지를 끌어온것인지 아니면 이 노파에게 어떤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인지. - P445

누군가 이 소설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제가 한참 고민을 하다가 나름대로 폼나게, 이건 지난 세기에 관한, 그리고 그 시대에 벽돌을 만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대답을했어요. 

한데 지난 세기의 얘기라면 마땅히 역사소설이나 뭐 그런비슷한 게 되겠죠. 그런데 저는 지난 세기를 그리되 역사는 모두 지워버리고 그 대신 세상에 떠도는 얘기들을 채워넣었죠. 

이 소설에는 크게 노파의 시대, 금복의 시대, 그리고 춘희의 시대가 있는데 시대에 따라 각기 문체를 달리했어요. 

그래서 노파의 이야기가 나올때는 옛날 소설처럼 장황하고 걸쭉하고, 또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어휘들도 자주 등장하는데, 

춘희에 와서는 그런 장광설이 없어지죠. 문장은 짧아지고 보다 더 현대적인 문체가 되죠. 하지만 그런 의도가 철저하게 관철된 것 같진 않습니다. - 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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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소름끼치는 웃음도 생각났다. 
그러나 노파는 당시의 그 무서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딘가 지치고 외로운 표정이었다.

노파는 겁에 질려 쳐다보는 춘희를 보고 썩은 이를 드러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어서 두부를 받으라는 듯 눈짓을 했다. 춘희는 조심스럽게 손으로 두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두부를 베어먹었다. 

비릿한 콩냄새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노파는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옆에서 춘희가 먹는 양을 지켜보다 어느샌가 함지를 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것이 일찍이 남의 집부엌살이로 떠돌다 딸에게 연인을 빼앗기고 버러지처럼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지독하게 돈을 모았지만 끝내 한푼도 못 써보고 결국 그 돈때문에 목숨까지 잃어 한 많은 생을 마감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불에 타 죽게 함으로써 스스로 복수를 완성한 노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노파가 사라진 뒤에도 춘희는 그 자리에 앉아 두부 한 모를 남김없이꾸역꾸역 목 안으로 밀어넣었다. - P353

햇볕에 데워져 따뜻해진 벽돌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춘희는 그 애매한 생각을 붙잡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막연하던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분명해졌고, 마침내 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불꽃처럼 솟아올랐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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