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 글라디올러스와 석류, 2002

글라디올러스와 석류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지만, 화가가 강조한 것은 결코 아름답다고만은 할수 없는 처절한 느낌 자체이다.

꽃과 과일의 붉은색은 강렬하지만 피처럼 끔찍해 보이기도 한다.

김병기는 어느 한쪽으로도 단정 지을 수 없는 경계의 미학을 추구했다. - P314


김병기는 잭슨 폴록의 말을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그림을 그리기시작하기 전에 나는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릴지 알지 못한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 않나.

다만 그런 불확실성을 안고서도 하루하루 용기를 내어 도전할 뿐! 그것이 인생이니까.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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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오지호의 말년 작품은 다시 환해졌다. 

"어떠한 추악함이나 중오 속에서도 미(美)를 향해
나가는 흐름이 있을 때 비로소회화 세계는 존재한다"

는 것이 오지호의 굳은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어떠한 고난이 와도 삶은 총체적으로는 "환희"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 환희를 표현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인간 삶의 영역에서도 예술에서도,

 "그늘에도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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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전문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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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인다. - P93

눈이 지나간 뒤 한동안은 잠에서 깨며 감은 눈으로 생각했다. 밖에 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지루한 방학숙제를 하다 말고 방안에 눈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방금 거스러미를뜯어낸 손 위로. 머리카락과 지우개가루가 흩어져 있는 장판 바닥 위로. - P94

노인의 눈길이 가닿아 있는 텅 빈 네거리를 나는 돌아본다. 나란히 서서 그의 옆얼굴을 살피자 그도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무미무취한 눈길이 내 눈을 잠시 마주본다. 다정하지도 무심하지도 냉정하지도 않은 어렴풋이 따스한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도 같은 눈길이다. 어쩐지 인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할머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 체구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무엇보다 무심함과 미묘한 따스함의 조합이 닮아 있다. - P96

이 섬에서는 손윗사람을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인선은 나에게 말해줬다.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외지인밖에 없어. 삼춘이라고 일단 부르면, 설령 그다음에 제주 말을못한다 해도 섬에서 오래 산 사람인가 싶어 경계를 덜 하게 되지. - P98

내가 무연고 환자로 입원해 있었을 때, 엄마가 이 집에서 나를보셨대.
그게 무슨 말이야?
얼른 이해되지 않아 나는 물었다.
병원에서 엄마한테 연락이 간 건 내가 의식이 돌아와서 이름을말한 직후였을 거 아냐. 그런데 바로 그 전날에 내가 먼저 여길 다녀갔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물었다.
그러니까. 꿈에?
불쑥 터뜨려지려는 웃음을 참는 듯 인선의 뺨이 잠시 부풀었다자정쯤 됐을 때 엄마가 마루로 나와 불을 켰는데, 내가 밥상 드에 가만히 앉아 있더래. - P103

접시에 김치를 덜어 식탁에 올려놓는 인선의 얼굴이 서울에서보다 평온해져 있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인내와 체념, 슬픔과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05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 P109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새들의 뼈에는 구멍들이 뚫려 있다고, 장기 중에 제일 큰 건 풍선처럼 생긴 기낭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새들이 조금 먹는 건 위가 정말 작아서 그런 거야. 피도 체액도 아주 조금뿐이어서, 약간만 피를 흘리거나 목이 말라도 생명이 위험해진대. 가스 불꽃에서 나오는 약간의 유해물질도 혈액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다고 해서 전기레인지로 바꿨어. - P110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 천미터 이상의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그사이 얼마나 여러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 P111

함박눈을 맞으며 허리를 굽힌 채 걷는 노인의 모습이 차창 너머로 멀어진다.

그가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고개를 꺾고 돌아본다.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나의 혈육도 지인도 아니다. 잠시 나란히 서 있었을 뿐인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작별을 한 것처럼 마음이 흔들리는가? - P122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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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은 참 부드럽게 넘어간다.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서 이태준은 문장을 수십 번, 수백 번 고쳐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저서 문장강화에서 말했듯이 문장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들어가야 할 적절한 단어는 ‘딱 하나(유일어)‘뿐이기 때문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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