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결국 오지호의 말년 작품은 다시 환해졌다. 

"어떠한 추악함이나 중오 속에서도 미(美)를 향해
나가는 흐름이 있을 때 비로소회화 세계는 존재한다"

는 것이 오지호의 굳은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어떠한 고난이 와도 삶은 총체적으로는 "환희"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 환희를 표현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인간 삶의 영역에서도 예술에서도,

 "그늘에도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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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전문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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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인다. - P93

눈이 지나간 뒤 한동안은 잠에서 깨며 감은 눈으로 생각했다. 밖에 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지루한 방학숙제를 하다 말고 방안에 눈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방금 거스러미를뜯어낸 손 위로. 머리카락과 지우개가루가 흩어져 있는 장판 바닥 위로. - P94

노인의 눈길이 가닿아 있는 텅 빈 네거리를 나는 돌아본다. 나란히 서서 그의 옆얼굴을 살피자 그도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무미무취한 눈길이 내 눈을 잠시 마주본다. 다정하지도 무심하지도 냉정하지도 않은 어렴풋이 따스한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도 같은 눈길이다. 어쩐지 인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할머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 체구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무엇보다 무심함과 미묘한 따스함의 조합이 닮아 있다. - P96

이 섬에서는 손윗사람을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인선은 나에게 말해줬다.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외지인밖에 없어. 삼춘이라고 일단 부르면, 설령 그다음에 제주 말을못한다 해도 섬에서 오래 산 사람인가 싶어 경계를 덜 하게 되지. - P98

내가 무연고 환자로 입원해 있었을 때, 엄마가 이 집에서 나를보셨대.
그게 무슨 말이야?
얼른 이해되지 않아 나는 물었다.
병원에서 엄마한테 연락이 간 건 내가 의식이 돌아와서 이름을말한 직후였을 거 아냐. 그런데 바로 그 전날에 내가 먼저 여길 다녀갔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물었다.
그러니까. 꿈에?
불쑥 터뜨려지려는 웃음을 참는 듯 인선의 뺨이 잠시 부풀었다자정쯤 됐을 때 엄마가 마루로 나와 불을 켰는데, 내가 밥상 드에 가만히 앉아 있더래. - P103

접시에 김치를 덜어 식탁에 올려놓는 인선의 얼굴이 서울에서보다 평온해져 있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인내와 체념, 슬픔과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05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 P109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새들의 뼈에는 구멍들이 뚫려 있다고, 장기 중에 제일 큰 건 풍선처럼 생긴 기낭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새들이 조금 먹는 건 위가 정말 작아서 그런 거야. 피도 체액도 아주 조금뿐이어서, 약간만 피를 흘리거나 목이 말라도 생명이 위험해진대. 가스 불꽃에서 나오는 약간의 유해물질도 혈액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다고 해서 전기레인지로 바꿨어. - P110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 천미터 이상의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그사이 얼마나 여러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 P111

함박눈을 맞으며 허리를 굽힌 채 걷는 노인의 모습이 차창 너머로 멀어진다.

그가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고개를 꺾고 돌아본다.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나의 혈육도 지인도 아니다. 잠시 나란히 서 있었을 뿐인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작별을 한 것처럼 마음이 흔들리는가? - P122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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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은 참 부드럽게 넘어간다.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서 이태준은 문장을 수십 번, 수백 번 고쳐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저서 문장강화에서 말했듯이 문장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들어가야 할 적절한 단어는 ‘딱 하나(유일어)‘뿐이기 때문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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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엄마 안에서 분열이 시작된 건지도 몰라.
두개의 상태에 그날 밤의 오빠가 동시에 있게 된 뒤부터.
갱도 속에 쌓인 수천 구의 몸들 중 하나.
동시에, 불ㅈ켜진 집들의 대문을 두드리는 청년. - P292

어떻게 돌아오신 거야

누구 말이야?

......네 아버지.

그것 때문에 엄마가 아버지를 찾아갔던 거야.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는지 물으려고.

- P293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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