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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강보라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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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은 여유에서 온다는 걸 때때로 느끼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인생이라는 위태로운 묘기에 대해 이 작가는 이미 많이 알고 있다.

다양한 인물과 상황을 접하며 그 자리에서 무수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짐작된다.

불편함, 소외감, 괴리감, 위협감, 우월감, 안도감, 서운함, 상실감, 동질감, 애틋함, 포용감...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마음만 해도 이렇게나 많다. 

이 많은 것들을 이미 깊이 알고 있는 자의 여유가 책의 곳곳에 묻어난다.


그런 여유가 어떻게 드러나냐고?

일단은 해석하지 않아도 다 느낄 수 있게끔 쓰여 있다는 점에서 느껴졌다.

어느 영역에 통달한 사람이 굳이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도 핵심을 쏙쏙 알려주듯이,

일상의 작은 사건만으로도 복잡한 심리와 갈등을 읽어낼 수 있었고, 그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건 단편 문학의 최고 묘미겠지.)

게다가 이 소설집은 곳곳에 웃음 포인트를 담고 있다. 세련된 유머다.

멋을 잃지 않고 웃기는 데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드는가. 시도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소설들은 누군가의 감정의 싹틈을 그릴 때, 그와 동시에 또다른 누군가의 안에서 발생하는 반대급부 또한 염두에 둔다.

내가 뭔가를 느끼면 내 앞의 상대방도 뭔가를 느낀다는 관계의 공식, 혹은 인간사회의 진리가 작가의 머릿속에 흔들림 없이 펼쳐져 있달까.

그것은 소설 안에서 때로는 먹이사슬 속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처럼 잔인한 구도로, 때로는 서로 보듬어 공생하는 생물들의 미더운 구도로 그려진다.

작품마다 설정된 중심 화자가 그 구도 중 한 편을 맡지만, 소설이 오롯의 화자의 입으로만 쓰이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작가의 객관적인 시선이 결국엔 소설에 드러나는 모든 입장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이 흔들림 없는, 객관적이고 어떨 땐 냉철하게도 느껴지는 넓은 시야. 여기에서 이 작가가 지닌 멋을 느꼈던 것 같다.


작가는 어떤 시간을 지나왔기에 이런 깊은 시선을 지니게 되었을까.

그는 '신인 소설가'로서 자신이 한차례 지나온 길을, 아직 그 길을 지나는 중인 인물들을 통해 그려나간다.

나는 그 길을 얼마쯤 지나왔는지. 독자로서 이 작가가 소설로 내는 길을 계속 밟아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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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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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장인이어서 그런지, 내 안의 가장 하고 싶던 이야기를 외쳐주는 듯한 시원함이 있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외쳤으면 좀 민망하기도 했을 것 같은데, 나와 같은 듯 다른 상황을 제시하고 내가 느낀 그 감정을 풀어준다. 오피스 소설의 최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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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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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의 최근작, 

특히 드라마 안나 원작소설인 <친밀한 이방인>을 읽은 독자라면: <친밀한 이방인>보다 센 서사, 안나보다 독한 이마치라는 인물 때문에 놀랄 것 같다.


정한아의 초기작,

특히 첫 장편, 너무나도 반짝이던 <달의 바다>까지도 기억하는 독자라면: 정한아 소설이 약 20년의 시간을 지나며 획득한 수려한 어둠에 놀랄 것 같다.


정한아의 작품을 <3월의 마치>로 처음 접한 독자라면: 한 사람, 한 여자의 인생을 이렇게나 낱낱이, 이토록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는 정한아의 과감함에 놀랄 것 같다.


그리고 <3월의 마치>를 읽은 독자라면 누구든: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쳤던 이마치의 인생을 읽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정한아 작가는 이런 걸 참 잘한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삶이 어떤 모양이든 계속해서 살아가고 싶게 만든다.

앞서 정한아의 소설이 20년의 세월을 거치며 더욱 독하고 과감해졌다고 썼지만,

그런 면에서 정한아 소설은 20년 동안이나 낙관의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당신은 소설 속 이마치처럼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과거의 무수한 시점으로 돌아가서

그때의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은지.

마구 소리치고 싶을지, 하염없이 사과하고 싶을지, 말없이 안아주고 싶을지 궁금하다.

아직 현실에서는 '과거의 나'들을 직접 만날 방법이 없지만,

그들은 언제나 우리의 기억 속에 있었다.

<3월의 마치>를 덮고 나서 기억을 더듬어 강렬했던 순간들에 존재했던 나들을 찾아보았다.

그들 앞에 서서 하고 싶은 말을 오래오래 고르고 있다.

한 편의 소설로 지금까지의 내 전 생애를 돌아보게 되다니. 매우 의미 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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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영원할 것처럼
서유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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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작가의 글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읽고 나면 어딘가 마음이 정돈된 듯한 기분이 든다는 점인데
뭔가를 정돈하려면 깎고 쓸고 털어내야는 시간이 필요해서
마음이 정돈되었다는게 읽는 내내 마음이 고요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내 마음이 혼자 상처받고 지지고 볶고 숨 죽여 오열하고 다 하는데
소설의 시작과 끝은 그 소란을 잠재우고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딘가 '회복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밤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의 밤이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때로는 잔잔하고 평화롭기도 하고
또 때로는 다가올 미래를 향해 뻗어 있는 시간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밤은 누구에게나 오고 이 책 속 인물의 감정들도 누구에게나 온다.
조용히 모든 독자를 공감시킬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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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울지 마세요
김홍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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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 작가가 내온 책들을 보니

작가는 문학계의 주성치

그의 작품은 한국문학의 장수돌침대

뭐 하나 평범하지 않은 별명을 얻고 있다.


"이야기가 산으로 가면 난해해질 뿐이지만

이야기가 우주로 가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세상이 열린다"는 책 표지 문구처럼

이 단편집에 실린 첫작품부터가 주인공을 우주로 보낸다.

그런데 이 주인공이 우주로 가기 전에 지구에서 겪은 일들은

작가가 웃프게 표현해서 그렇지 슬프고 처절할 만큼 현실적이기도 하다.


첫단편 「인생은 그라운드」에서는

할머니가 죽어도 온가족이 기초수급을 받아야 하기에 사망신고를 할 수가 없고

죽은 할머니 폰에 시시때때로 할머니를 향한 마음을 송신한다든지,

한국 전체가 온갖 사기에 미쳐서 주인공 가족도 사기를 당해 무너지는데

그렇게 사회 구석으로 내몰리는 과정을 소설로 쓰는 방식을 보면

웃음으로 눈물을 닦는다는 말이 뭔지 너무 알 것 같다.


그 와중에 KBO가 전 국민 대상으로 사기를 쳐서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사라져 버리고

야구의 '야' 자도 꺼낼 수 없게 분위기는 얼어붙어 버리는데

주인공은 알고보니 야구에 엄청난 소질이 있어서... 홀로 공을 던지며 세상에 항변하는 캐릭터가 된다.


그가 판매 금지된 야구용품을 사기 위해 중고거래를 하다가

자꾸만 정체를 감추려는 우규민을 만나게 되는 장면이 진짜 웃김.

김홍 소설의 재미를 많으 독자들이 알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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