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닭 치리 ㅣ 높새바람 51
신이림 지음, 배현정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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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닭 치리』는 두 마리 수탉의 성장스토리이다. 치리와 깜이는 닭장 안에 있는 두 마리 수탉이다. 치리는 자신보다 덩치도 더 크고 힘이 센 깜이를 부러워하고 이기려 한다. 투계훈련사가 닭을 사러 온 날 치리가 따라가려는 것을 막은 깜이는 대신 투계훈련사에게 잡혀 간다. 투계로 불행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깜이에게 투계는 피하고 싶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치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투계가 되고 싶은 치리는 자신을 막은 깜이를 원망한다.

 

치리에게 엄마는 가족을 지키는 수탉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족제비가 닭장을 습격한 날 치리는 족제비를 공격해 닭들을 지켜낸다. 이 일이 있은 후 털보아저씨가 찾아와 치리를 투계로 키우겠다면서 데리고 간다. 치리를 데리고 간 털보아저씨는 닭 카페 회원을 찾아가 다른 닭과 싸움을 시키고, 치리는 패배한다. 투계훈련사에게 맡겨진 치리는 투계훈련사의 훈련소에서 볼품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는 깜이를 보고 놀란다. 깜이는 투계를 하기 위해 왔다는 치리의 말에 화를 내고 치리를 외면한다. 며칠 후 투계경기가 열리고 치리는 경기 중 투계 닭이 죽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깜이가 자신을 대신해 투계훈련사를 따라간 이유를 알게 된 치리는 깜이에게 사과하고 함께 탈출하자고 한다. 치리와 깜이는 함께 탈출하고, 깜이는 치리를 돕기 위해 추격자들을 유인한다. 깜이가 개에게 잡히기 직전, 치리는 개를 공격하지만 결국 둘은 다시 잡혀 닭장에 갇힌다.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된 치리는 다시 탈출할 날을 위해 훈련을 견딘다. 치리는 첫 시합에서 승리하지만, 약을 먹어 흥분한 상대편 닭에게 공격을 당한 깜이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털보아저씨에게 돌아온 치리는 늙은 수탉을 만나 투계 기술을 배운다. 투계경기를 보고 난 후 경기의 잔인성에 놀란 털보아저씨는 동물보호단체 직원과 함께 투계 도박꾼을 잡아들이는 일을 돕는다. 도박꾼을 유인하기 위해 열린 경기에서 치리는 깜이를 다치게 한 번개를 만나 칼을 차고 싸우고, 늙은 수탉의 가르쳐준 기술로 번개를 공격해 승리한다. 그 순간 경찰이 출동하고 투계 일당들을 잡아들인다. 다신 만난 치리와 깜이는 몸이 회복된 후 치리는 가족에게 돌아가고, 깜이는 늙은 수탉과 함께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나의 자유이고, 그 선택의 책임 또한 나의 몫이다. ‘치리를 구하기 위해 투계훈련사의 손에 잡히는 것을 선택한 깜이, 투계 경기 중 상대편 선수에게 칼 공격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 깜이, 닭장 안의 삶과 닭장 밖의 삶 중 닭장 밖의 삶을 선택한 늙은 수탉, 모든 일이 해결된 후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 치리와 늙은 수탉과 함께 남겠다는 것을 선택한 깜이, 투계 경기의 잔인성을 보고 난 후 동물보호협회에 신고한 털보아저씨의 선택’ 등 작품 속에도 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선택은 자신과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선택의 결과는 그 선택을 한 사람의 몫이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가 남을 수 있지만, 선택의 순간 자신과 타인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 발췌글

177

“문이 열려 있어 탈출할 수도 없네.”, “탈출은 못하지만 선택은 했잖아. 넌 가족을, 난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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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교육하다 - 미래교육을 위한 8가지 키워드
임종근 지음 / 에듀니티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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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뉴스는 ‘학교 폭력과 아동학대, 그리고 고위공직자들의 비리문제’이다. 하나의 종목에서 시작된 학교 폭력 미투는 스포츠계, 연예계, 공직사회 등 다양한 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입시를 강조하는 성과중심 교육에서 성적과 실력을 갖춘 아이들을 키워내는데 집중하다 보니 아이들의 인성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못한 결과라 생각한다. ‘지식교육도 중요하지만 인성교육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7페이지)라는 작가의 말에 절대 공감한다. 『교육을 교육하다』는 36년간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교육문제에 대해 쓴 책으로, ‘교육을 새로운 관점에서 새롭게 디자인’(5페이지)해야 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1장 <인권교육 편>은 평화로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 인권교육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인권침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권교육이다. 하지만 현실은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 주를 이루고, 이러한 교육으로는 인권감수성조차 키울 수 없다고 한다. 2장 <평등교육 편> 편에서는 ‘양성평등과 성평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더 나아가 페미니즘 운동이 단순히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차별과 억압의 폭력문화를 인권적 차원에서 바로잡으려는 정신운동’(66페이지)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3장 <학교폭력 편>에서는 폭력 없는 안전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학교 폭력의 문제점과 학교폭력 관련법과 정책에 대해 적고 있다. 학교 폭력을 예방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인권친화적인 학교문화를 조성하는 것’(120페이지)이라 말한다. 학교폭력, 데이트 폭력, 아동학대 등의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학교와 부모, 사회와 국가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4장 <인성교육 편>에서는 문제행동학생의 사례를 들고 상담과 지도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인성교육과 인권교육의 차이점과 부정적인 정서를 갖고 있는 자존감 낮은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상담방법, 문제행동학생 상담 기법, 상담자인 교사가 갖추어야 할 자세, 화를 이기는 이상적인 대화법, 다른 나라들의 인성교육은 어떤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설명한다.

 

5장 <교사 편>에서는 교사의 전문성과 리더십 함양 방법을 적고 있다. 교육자는 학생의 말을 경청하고 소통하면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187페이지 <교육상식 더하기>에서 ‘소통과 공감의 대화법’에서 ‘배려적 질문, 맥락적 경청, 공감적 응답’ 중 나는 얼마나 아이의 말에 경청하고 있는지 체크했을 때 나는 전혀 아이의 말에 경청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사가 학생의 말에 경청하듯이 부모도 자녀의 말에 경청할 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6장 <학교운영 편>에서는 학교 조직을 운영할 때 필요한 것과 문제점, 해결방법 등을 적고 있다. 교육 목표 달성을 위해 교직원의 업무를 분담하고 학교 조직 운영의 중요성을 적고 있다. 학교도 사람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다. 사람들이 조직을 이루면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갈등 상황에서 갈등조정의 자세와 방법을 소개한다. ‘존경받는 교사의 여섯 가지 특징’(255페이지)에서 존경받는 교사의 특징을 읽으면서 선생님으로 산다는 것도 정말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장 <미래교육 편>에서는 미래 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전망한다. 다양한 세계시민교육이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 한다.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세계시민교육의 방향을 제안한다. ‘창의성교육, 인권교육, 다문화교육, 생명안전교육, 통인준비교육,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과 제도 도입’(262~263페이지)의 여섯 가지를 제안한다. 미래 교육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미래 인재로 키우기 위해서 학생, 학부모, 교직원뿐만 아니라 교육지원청, 행정구청, 각종 교육유관기관 및 NGO까지 교육 파트너로 함께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는 학부모만의 노력과 교사만의 노력, 아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의 노력이 함께 할 때 민주시민을 너머 세계시민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이다. 8장 <평생교육 편>에서는 평생학습사회 구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성인대상의 시민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체의식을 키워 모두가 행복한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교육은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 존중,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의식, 공동체의식, 참여와 연대의식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을 교육하다』는 ‘인권교육, 평등교육, 학교폭력, 인성교육, 교사, 학교운영, 미래교육, 평생교육’의 큰 틀을 중심으로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하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다른 나라의 사례와 여러 정책·법률 등을 통해 여러 나라와 우리나라 교육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라떼는 말이야’는 꼰대 같은 말이겠지만 내가 받았던 교육 환경보다 지금은 더 민주적이고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옛날보다는 더 민주적이고 자유가 보장되는 교육환경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은 더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공부에 치어 살고 있다. 입시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친구들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로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학교 폭력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의 학교 폭력은 물리적, 정신적 폭력뿐만 아니라 사이버 폭력까지 이어져 아이들을 더 괴롭힌다. 임종근 작가는 미래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세계시민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권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의 소중함과 더불어 타인의 소중함을 알 때 학교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폭력과 비리들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교육하다』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꾸고,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이 책이 예비교사들, 초임교사들, 마을교육전문가들, 교육부와 시도교육청 교육행정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에 더해 학부모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학부모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이들에 대해서, 교사와 학교에 대해서, 더 나아가 우리나라 교육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발췌글

7

우리 아이들은 학교폭력, 데이트폭력, 아동폭력, 성폭력이란 부정적 용어가 만연한 병든 사회에서 자살 충동까지 느끼며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육 선진국인 OECD 국가 중에서 학생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낮고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18~19

인권의식이란 일상적인 생활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를 인권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인권침해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갖고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생각과 그러한 생각을 실천하려는 의지와 행동이다. -중략- 제대로 된 인권교육은 인권의 속성인 보편성, 양면성, 상호성, 옹호성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보편성은 성별, 종교, 나이, 인종, 장애, 경제적 지위, 징계, 성적 등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이며, 양면성은 개인의 자유와 함께 책임이 그리고 권리와 동시에 의무가 있음을 의미하며, 상호성은 나와 타인, 나와 공동체의 인권이 상호 존중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옹호성은 인권침해를 주로 당하는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 보호와 존중 그리고 법과 제도를 바꾸려는 연대와 사회 참여 활동을 의미한다.

 

59

상대적 평등이나 인권 존중의 본질은 인간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88~89

동화는 소수자 집단이 고유한 특성을 상실하고 주류문화로 흡수되는 것으로 용광로 정책이라 하며, 통합은 소수자 집단이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전체 구성원의 일부분이 되는 것으로 샐러드 정책이라고 한다. 동화는 연대성과 공공성을 중시하는 관점이라면, 통합은 개인과 소수를 집단보다 중시하는 관점이다.

 

101

학생은 교복 입은 시민이고, 학교는 시민사회이다.

 

118~119

폭력 없는 평화롭고 안전한 학교 만들기는 학교 조직문화를 혁신하는 운동으로 교육의 본질과 학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관점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120~121

학교 인권교육 프로그램은 권리적 측면에서 개인의 존엄권, 평등권, 자유권, 안전권, 평화권, 행복권과 의무적 측면에서 타인의 권리 존중 및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다룬다. 학생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인권교육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공동체의 의무와 책임을 준수할 때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이다’라는 인권의 양면성과 ‘나의 인권만큼 타인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인권의 상호성에 역점을 두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

 

126~129

‘학교폭력 예방 ALARM 지도법’은 학급 내에서 담임선생님이 집단 따돌림 등을 예방하기 위해 실천해야 할 지도방법이다. ‘Ask(질문하기), Listen(경청하기), Acknowledge(인정하기), Rebuild(관계 형성하기), Maintain(관계 지속하기)’(127~129페이지 참고)의 5개 과정의 상담기법이다.

 

152

인성교육과 인권교육은 ‘사람다운 사람’을 육성한다는 점에서 그 뿌리는 같다. 그러나 교육의 방향성에서 차이가 있다. 인성교육은 한 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의 자질과 품성을 개발하는 데에 있다면, 인권교육은 한 사회의 공동체적 삶의 가치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데에 있다. 즉 인성교육은 공동체 생활에서 필요한 바른 인성을 함양하도록 하는 사회적응적 측면이 강하고, 인권교육은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사회변혁적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153

학교의 인권교육은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인식하에 ‘나’라는 개인을 넘어, ‘나와 너’, ‘나와 조직’, ‘조직과 조직’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관계 형성과 관계 회복의 측면으로 접근해야 한다.

 

185

훌륭한 대화의 기본 조건은 맥락적 경청과 공감적 질문이다.

 

186

소통이 있는 대화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핵심이다.

 

191

인지행동치료 전문가인 데이비드 번즈는 도와주기 중독과 문제해결 중독이 경청을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한다. 도와주려는 격려의 말은 고민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열도록 다독거리기보다는 감정표현을 중단시키는 역효과를 준다. -중략-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태도 역시 상대보다는 나의 견해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상대를 더욱 힘들게 한다.

 

196

1:27:300

하인리히 법칙이 있다. 1개의 대형사고가 터지기 전에 평균 27개의 소형사고가 발생하고, 사고 전에 300여 개의 징후가 보인다는 것이다.

 

231

교육공동체의 관계 혁신은 존중과 인화의 조직문화를 형성하는 교육운동이다.

 

237

교육은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인간교육이니 소통이 부실하면 원천적으로 제대로 된 교육은 불가능하다.

 

241

소통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경청의 자세도 필요하지만, 내 생각을 상대에게 정확하게 말하는 것도 필요하다.

 

283

우분트는 동아프리카 반투족의 말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이다.

 

285

아이들이 아파하는 교육을 청산하고, 아이들 모두가 행복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육 패러다임을 하루 속히 지속가능한 미래 교육 패러다임으로 혁신하여야 한다.

 

293

교육계에서 사용하는 마을이란, 소위 시골이라는 농산어촌을 지칭하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고 일정한 생활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인간관계를 뜻하는 가치지향적 개념이다. 즉 마을이라는 공동체적 삶에 뿌리내렸던 두레, 품앗이, 계와 같은 생활양식에 담긴 ‘평등과 자치’, ‘공유와 나눔’, ‘협력과 상생’의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개념이다.

 

296

정의로운 사회는 공익의 가치가 존중되고, 윤리적이며 공정한 법이 제정되고 집행되는 사회이다. 민주주의가 꽃피기 위해서는 정치 방관자들과 부화뇌동하는 시민이 많아서는 안 된다. 사회정의 구현은 기득권층인 정치인들만의 몫이 아니고 정치적인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시민이 함께 성취해야 할 공동의 과제이다.

 

308~309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지배층의 도덕적 의무’란 뜻으로 고위공직자는 청렴하게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프랑스 공직사회의 행동양식이자 불문율이다.

앙가주망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란 뜻이다. 프랑스의 앙가주망 정신은 에밀 졸라,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와 같은 행동하는 지성을 낳았고, 국민들의 언론 활동을 통한 자유로운 정치사회의 참여는 국민의 의무라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시대정신은 개개인의 삶과 관련된 가치를 넘어서는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의 가치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개념이다. -중략- 국민적 공감대로 형성되는 시대정신은 정치적 계파싸움, 지역 간·세대 간 갈등과 불통, 극심한 빈부격차, 만연한 학력·학벌주의, 심화된 교육 불평등, 끊임없는 인권침해 등의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326

인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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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은 아름다워
루시아 자몰로 지음, 김경연 옮김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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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은 아름다워』는 여성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시아 자몰로 작가는 디자인 학교 졸업 작품으로 책을 쓰기 시작한다. 민감한 주제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머와 솔직함’을 담아 그림으로 표현한다. 산부인과 의사의 검토와 참고문헌을 통해 전문적인 사실들의 객관성을 확보한다. 일반적으로 책의 차례는 책의 앞부분에 적는데 작가는 책을 읽고 난 후 감사의 글 앞에 차례를 적어놓았다.

<모든 것의 시작>에서 어느 날 한 소녀가 친척 모임에 참석한다. 모두가 모인 그 자리에서 생리를 시작하고, 소녀는 팬티에 묻은 빨간색 얼룩을 보고 당황한다. 요즘 아이들이라면 놀라기는 하겠지만 당황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일찍부터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 생리를 함께 하기>에서는 생리를 시작하거나 아직 시작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생리의 시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헛소리>에서는 사람들이 생리에 대해 어떤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리니우스, 파라켈수스, 중세시대 사람들, 현대의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친구의 할머니, 생리하는 여자를 격리하는 어떤 지역, 1960년대~1980년대에 살던 사람들의 생리에 대한 편견, 현대 생리대 광고 문구’ 등, 생리에 대한 편견을 시대별로 적고 있다. 생리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끝부분에 ‘빨강은 정말 아름다워’라는 문구를 적어 생리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진실>에서는 생리가 진행되는 과학적 사실을 설명한다. <팁팁팁>에서는 생리통에 좋은 ‘쿠션 만드는 방법, 차, 요가자세, 음식’을 소개한다. <이렇게 보이는 거야!>에서는 생리는 생명이고 생명은 자연이 갖는 큰 의미이므로 생리를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을 지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적고 있다.

 

‘생리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생명이야!’(92페이지)

금기시되고 숨겨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생리와 생리혈’에 대해 작가는 숨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은 잘못된 것이라 말한다. 생리에 대해 과거에는 불결하고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생각이 이어지고 있다. 불결함과 부정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리는 숨겨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생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또 다른 차별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아직도 생리는 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시아 자몰로 작가는 무겁고 조심스러운 주제를 부담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있도록 그림과 재미있는 말투로 생리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빨강은 아름다워』는 누구나 부담 없이 한 번은 꼭 읽어 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생리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깨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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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이 그림 여행 - 화가의 집 아틀리에 미술관 길 위에서 만난 예술의 숨결
엄미정 지음 / 모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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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문가가 아니다. 그림을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그림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그림의 기준을 정하진 않았다. 그림을 보고 눈이 가고 마음이 찌르르 움직이고 관심이 가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림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다시 보고 또 보고 싶은 그림, 그것이 내가 그림을 보고 그림에 빠지는 이유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으로 그림을 보고 평가하는 나의 얕은 그림 보기는 그 자체로 힐링의 시간이다. 화가의 그림을 보고 화가의 인생과 그림이 그려진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그림은 더 가깝게 마음속으로 다가온다.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화가가 사랑한 주제나 사물을 새삼 알게 되고 그가 천착한 문제에 동참하면서 어느덧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부쩍 가깝게 다가서는 걸 느끼게 된다.”(360페이지)

 

영화를 본 후 영화를 촬영한 현장을 직접 가보면 영화가 더 깊이, 더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움직이지 않지만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와 화가의 마음을 담은 그림은 영화와는 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화가가 살았거나 여행을 했던 장소를 직접 다니면서 화가의 흔적을 찾고,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에서 화가의 진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작가 엄미정은 그렇기에 너무나 부러운 축복받은 사람이다. 출판사에 보낸 <예술가의 여행>이란 기획서와 샘플 원고에 대한 출판사의 ‘직접 가보지 않고 쓸 수 없는 책’이라는 답을 듣고 난 후 엄미정 작가는 여행을 떠난다. 6주 동안의 ‘그림 여행’은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탈리아, 스페인, 남프랑스, 독일’의 미술관과 박물관, 성당, 모네의 집, 클림트의 길, 세잔의 길 등으로 이어진다. 책으로만 보던 그림을 직접 본다는 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일까?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전율이 흐른다. 작가의 힘들지만 설레는 여정의 가슴 떨리는 두근거림이 느껴지는 착각마저 든다. ‘내 여행의 동선보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밟아간 자취를 독자들이 오롯이 그려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10페이지)라고 말하는 작가는 그림 여행을 본 독자들이 예술가의 발자취를 그려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화가가 머문 장소와 마주친 사람들은 화가의 작품의 배경이 되고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여행은 화가와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라 생각한다. 『후회 없이 그림여행』은 직접 갈 수는 없지만 간접적이나마 화가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1부 <괜찮다, 다 괜찮다>에서는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여행에서 만나게 된 화가 ‘뒤러, 페르메이르, 클림트’의 발자취를 소개한다. 2부에서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편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화가, ‘조토, 앙귀솔라, 카라바조, 엘 그레코’의 작품 세계로 안내한다. 3부 <원하는 건 오로지 빛과 바람뿐>에서는 ‘모네, 고흐, 세잔, 시냐크, 마티스’의 삶과 예술의 세계로 안내한다. ‘빛과 바람’을 찾아 떠난 이들의 행적을 하나씩 따라가면서 작품과 화가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 양식을 최초로 알프스 이북으로 들여온 독일 출신 화가 뒤러는 미술 이론서를 집필하고 목판화를 책으로 펴낸 출판업자였다. 뒤러는 알프스를 넘어 베네치아로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그로부터 10년 후 르네상스를 배우기 위해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고, 50세를 앞두고 네덜란드 여행을 떠났다. 뒤러의 길을 따라 뒤러의 그림 속 장소를 찾아가던 길에 길을 잃어 헤매던 작가의 모습을 보면서 길이 어느 정도 정비된 현대에도 이렇게 길을 걷는 것은 힘든데 지금보다 더 열악했을 당시에 뒤러는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까? 뒤러의 <인스부르크성의 뜰> 연작은 도시의 거리와 건물이 보이고 하늘이 배경으로 존재한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그림 속 고요함, 고요함 너머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착각이 든다면 너무 과한 감상일까? 잠들어 있지만 잠들어 있지 않은 도시, 죽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도시의 모습은 고요함 너머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국립미술관, 반 고흐 미술관, 시립미술관’이 모여 있는 암스테르담 박물관 광장은 한 곳에서 많은 그림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라 생각한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은 십 년에 이르는 개보수 기간을 끝내고 전관을 재개관(52페이지)했고, ‘반 고흐 미술관은 공사 중인데 며칠 후 다시 개관한다(53페이지)’는 내용을 보면서 박물관 개보수 공사 기간을 잘 체크하고 여행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턱대고 갔다가 공사 기간이 겹쳐 미술관을 관람할 수 없다면 먼 곳까지 찾아간 의미를 잃게 된다. 여행을 갔을 때 이런 부분들을 미리 체크한다면 더 편리하게 여러 곳을 방문할 수 있을 것이다.

 

델프트에서 태어나 델프트에서 삶을 마친 화가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 <진주 귀걸이 소녀>를 가장 먼저 알았다. 엄미정 작가가 여행을 했던 시기에 <진주 귀걸이 소녀>는 해외 전시 중이라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페르메이르를 모델로 한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페르메이르의 <델프트 풍경>에 매료된 프루스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68페이지)라고 한다. 고전 작품 속 화가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는 것도 그림을 더 깊이 있게 감상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클림트의 그림을 보는 여정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로 이어진다. 클림트의 작품 중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입맞춤(키스)>이다.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림의 색이었다. 강렬한 두 남녀와 다양한 패턴에 이끌려 작품에 빠져들었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클림트의 진품 감상하기’이다. 클림트의 진품을 보고 있는 작가의 여행이 배 아플 정도로 부러웠다. 빈 분리파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주제로 한 <베토벤 프리즈>는 더 강렬하게 클림트의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클림트의 작품은 강렬한 이미지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후회 없이 그림여행』은 작품을 보기 위해 미술관이나 성당 등을 방문할 때 어떤 준비 과정이 필요한지를 함께 설명해준다. 예를 들면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있는 스크로베니 소성당을 방문하기 전에 사전 예약이 필요하고, 방문 시간 전 15분의 시간은 성당에 입장하기 전 준비 시간이 주어진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방문한다면 조토의 작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앙귀솔라’는 생소하지만 ‘최초의 세계적인 여성화가’라는 타이틀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르네상스 최초의 여성화가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작가는 그림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말하고 있다. 앙귀솔라는 귀족으로 태어나 궁정의 시녀가 되어 왕비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궁정의 초상화가로 성공한다. 앙귀솔라는 라비니아 폰타나, 바르바라 롱기, 레데 갈라치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같은 여성 화가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당신이 있어주어서, 그런 당신을 알게 되어서, 고맙습니다.”(188페이지)

작가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개최된 <두 여성 화가의 이야기 : 소포니스바 앙귀솔라와 라비니아 폰타나>(2019년 전시)를 관람한 후 전시 표지판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돌아온다. 작가가 전시회 이후 마음속으로 앙귀솔라에게 고마움을 표했듯이 나도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앙귀솔라라는 화가를 알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좋아하는 화가와 작품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또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행복하게 책을 읽었다. 그 중 가장 감사하고 뜻 깊은 것은 ‘앙귀솔라’를 알게 된 것이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밑그림 없이도 뛰어난 그림을 완성해 내는 카라바조, 후원자의 지원을 등에 업고 마음대로 살았던 그의 사생활로 인해 그는 젊은 나이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겨우 사면을 받아 로마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난 그는 자신과 다툰 기사의 의뢰를 받은 자객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겨우 살아남았지만 결국 말라리아에 걸려 생을 마감하게 된다. 빛과 어둠의 대비로 강렬한 그림을 그린 카라바조의 화풍은 이후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후원자의 힘을 자신의 힘이라 믿고 오만하게 살았던 화가는 범죄자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카라바조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예술가의 서사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수련을 그린 모네의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를 찾아 활짝 핀 수련을 보고 싶다. 지베르니를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모네의 <지베르니 들판>, <지베르니의 건초 더미>를 떠올렸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림 속 장소를 직접 본다는 것은 신기하고 흥분되는 일이다. 모네가 매혹되었던 지베르니의 ‘물그림자’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클림트의 <키스>와 함께 죽기 전에 보고 싶은 그림 중 하나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전시실(1실과 2실, 302~303페이지)은 사진으로 봐도 압도적이다. 직접 본다면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릴 것 같다.

 

폴 시냐크는 조르주 쇠라의 작품에 매료된 후 점묘법 작품을 찾아보다 자연스럽게 알게 된 화가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쇠라의 점묘법을 나와 같은 일반인도 알게 된 것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화가들을 만나고, 논문을 통해 점묘법을 홍보한 시냐크의 노력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냐크에게 미안해해야 할지도 모른다’(365페이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점묘법하면 쇠라만을 알고 있었던 나 또한 시냐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냐크를 다시 기억할 수 있게 해준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폴 시냐크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소개한 ‘앙리 에드몽 크로스의 <황금의 섬, 예르 제도>’(370페이지)를 봤다. <황금의 섬, 예르 제도>는 작은 페이지 안에 더 작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림이다. 황금빛 모래 알갱이와 바다로 퍼지는 빛 알갱이들과 수평선 너머 멀리 보이는 섬으로 지고 있는지 혹은 뜨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태양의 끝자락이 보인다. 코로나로 여행을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지금의 나에게 황금빛으로 물든 바다는 바다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그림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다를 본 듯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한 화가의 작품을 보기 위한 여행은 나라와 나라를 이동하거나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게 한다. 한 도시 안에서 성당과 교회로 갔다가 미술관을 방문하기도 하면서 한 사람의 작품을 감상한다. 각각의 작품은 화가가 여러 후원자를 만나거나 여행을 하면서 그렸기 때문에 혹은 작품을 구매하거나 기부 받았던 사람이나 기관의 위치에 따라 작품이 전시된 곳은 여러 곳으로 분산되기도 한다. 네덜란드의 크뢸러뮐러 미술관에는 고흐의 작품이 여러 작품 모여 있지만 고흐의 전 작품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지는 않다. 고흐의 다른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엄미정 작가의 그림 여행은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품고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다 보면 원작을 직접 눈앞에서 원하는 순간마다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린 이유도 이해가 된다. 보르게세 추기경이 숙부 교황 바오로 5세의 위세를 내세워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매장>을 빼돌리고 카라바조의 작품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과 <병든 바쿠스>를 세금 대신 몰수한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그렇다고 비도덕적인 행동까지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눈에 아른거리는 작품은 도록을 통해 본다 해도 원본의 강렬함을 재현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후원자들이 예술가를 후원하고 작품 수집에 몰두했을 것이다. 단순히 작품만을 설명하지 않고, 화가와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니 그 작품과 예술가가 더 궁금해진다.

 

좋아하는 화가 클림트의 길을 따라 가 보았고, 처음 알게 된 여성화가 앙귀솔라에 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에게 이 책은 아주 귀한 책이다. 전문적인 미술 이론과 여행 에피소드를 함께 소개해주어 더 쉽고 재미있게 몰입할 수 있었다. 화가를 알고 싶거나 그림을 보고 그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분, 코로나 종식 후 여행을 계획하시는 분, 역사적인 유적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분, 더 깊이 있는 교양을 쌓고 싶으신 분 등등의 모든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책을 읽고 난 후 ‘엄미정 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 다음 책이 나오기 전에 엄미정 작가의 번역서들을 먼저 읽어 보고 싶다. 작가의 뛰어난 필력 덕분에 읽는 동안 책이 안내하는 세계로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 발췌글

46~47

왕성한 호기심으로 걸음마다 마주친 여성들의 복식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았으며, 신기한 동물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걸음에 달려가길 주저하지 않았던 화가. 마치 오늘날의 여행자들처럼 그는 하루하루 빵 값과 팁, 숙박료까지 꼼꼼하게 금전출납부에 기록했으며, 지나치는 도시의 인상을 한두 줄로 간략히 적고 재빨리 스케치하곤 했다. 뒤러에게 길은 곧 또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였으며, 하루에도 몇십 킬리미터를 걷는 고행은 새로운 사유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85

그의 일상은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색채를 구별하는 과정이었다.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던 대식구의 가장. 기껏해야 덴하그에 갔다 오는 것이 여행의 전부였던 화가. 페르메이르가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아마도 캔버스 속 그 어디였을지도 모른다.

 

88

여행은 난생처음 가보는 곳도 새로워서 좋지만, 갔던 곳을 다시 가보는 것도 꽤 즐겁다.

 

90

세기말 오스트리아 빈의 불안과 혼돈, 에로티시즘과 욕망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에게도 풍경은 위로였으며 자연은 휴식의 다른 말이었다. 그의 풍경화에는 자연에서 느낀 기쁨과 평화, 일체감이 담겨 있다.

 

104~105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문화예술의 도시 빈에서 박물관 지구가 써내려갈 미래는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149

백조의 노래(예술가들의 마지막 작품을 상징)

 

160

우연히 손에 넣은 책의 지은이에 매혹되어 홀연히 떠났던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자기의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라고 자신에게 묻는다. 앙귀솔라의 그림을 보게 되면,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될까······.

 

265

건축물에 여러 재료의 다양한 빛을 끌어들이는 바로크의 특징은 이탈리아와 다를 바 없지만, 스페인의 바로크는 장대하면서도 보다 섬세하게 감정을 자극한다.

 

271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의 작품을 본 카잔차키스처럼 “예술작품을 보면서 모든 것, 인간과 짐승, 미래와 과거,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사실”을 어느덧 깨달았기 때문이다.

 

292

초록 이파리를 바탕처럼 깔고 빨강, 노랑, 주황, 보라, 흰색의 꽃들이 자유롭게 나부끼며 화려한 페르시아 융단처럼 잘 직조된 조화를 이룬다. -중략- 모네는 이 놀라운 정원을 손수 일구고 가꾼 총감독이었다. -중략- 색채 구도에 따라 식물 배치를 변경하고 항상 푸른 잎이 시들지 않도록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 이 정원을 여러 작품으로도 남겼다.

 

328

화가들이 세상을 그린다고 하지만, 때로는 그들이 그린 그림이 현실을 창조하기도 한다.

 

357

세잔에게 ‘풍경’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역사이자 지구의 첫 날이며 온 우주였을지 모른다. 그는 평생 길 위의 화가로 살았고, 그의 예술은 새 시대 새로운 미술의 길이 되었다.

 

397

‘결국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다. 작품에 매진해야 한다. 특히 나중을 계산하지 않고 전적으로 작품에 자신을 던져햐 한다. 그래야 작품에 화가의 존재 전체가 담긴다.’(잭 플램, <<마티스 회고전>>)

 

414

살다 보면 가끔 가보고 싶었던 곳을 정말 우연한 기회에 가게 되는 행운과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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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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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지로는 현실과 환상의 장면을 섞어 한 남자의 인생을 이야기 한다. 이번에 아사다 지로가 선택한 것은 ‘지하철’이다. 지하철은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빨리 더 멀리까지 실어 보낸다.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 지하철은 역마다 정차해 사람을 태우고 누군가는 내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종착역에 도착한 후 다시 출발과 도착의 과정을 무한 반복한다. 다케와키의 삶도 지하철처럼 출퇴근을 하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정년퇴직 송별회는 그러한 반복의 끝을 알리는 신호다. 송별회 이후 오랫동안 출퇴근을 도왔던 지하철 안에서 쓰러진 다케와키는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간다. 반복의 끝은 멈춤이라고 말하는 듯 다케와키의 일상도 멈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다케와키를 입사 동기 홋타는 짧은 시간 들여다보고 돌아간다. 어린 시절 보호시설에서 함께 자란 나가야마는 친구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계속 찾아오고, 다케와키를 아버지라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위 다케시는 슬퍼할 아내를 위해 퇴근 후 다케와키를 지킨다. 40년을 함께 한 아내 세스카와 세 아이의 엄마가 되는 딸 아카네는 남편과 아버지가 빨리 의식을 되찾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어린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하루야는 자신과 함께 가려는 아버지를 더 있다 나중에 오라는 말로 남겨두고 떠난다. 집중치료실 간호사 고지마는 20년 동안 지하철에서 마주친 다케와키가 의식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지켜본다. 이들의 염원대로 다케와키는 깨어날 수 있을까?

 

‘당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나를 버려도 괜찮아. 나는 남자니까 당신 없이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몇 가지 소원을 들어줘. 서른다섯 살의 아름다운 당신과 지하철을 타고 싶어. 예순 살의 더 아름다운 당신과 아름다운 고향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싶어. 순결한 엄마가 성스러운 아기를 낳은 그날 밤을.’(415페이지)

 

의식이 없는 다케와키는 몸은 병원에 있는 상태로 꿈과 현실이 혼동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눈 내리는 밤, ‘눈’이라는 뜻의 이름을 한 마담 즈네와 함께 프랑스 레스토랑을 찾아 좋아하는 메뉴로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자신의 기억 속 해변에서 시즈카를 만나 함께 음료수를 나눠 마시고 식사를 한다. 집중치료실 옆 침대에 누워있는 사카키바라가 다케와키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의 추레한 차림과 거침없는 말투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함께 병원을 나가 대중목욕탕을 간다. 포장마차에서 좋아하는 안주로 정종을 나눠 마시고 병원으로 돌아온다. 더 이상 삶의 미련이 남지 않았던 사카키바라는 병원으로 돌아와 임종을 맞는다. 가족들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임종을 지킬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다케와키의 사위 다케시가 마지막까지 사카키바라의 옆을 지켜준다. 사카키바라를 배웅하러 간 지하철에서 다케와키는 사카키바라의 첫사랑 미네코를 만나 함께 지하철을 탄다. 자신이 버린 첫 사랑 후즈키가 찾아오지만 이야기는 나누지 못한 채 후즈키는 사라진다. 지하철을 탄 열다섯 살의 미네코와 아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자신의 아기 때 기억을 되찾는다. 세상을 먼저 떠난 아들 하루야를 만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엄마와 동생과 조카들 곁에서 더 있다가 오라는 말을 한 후 이별한다. 노년을 시작으로 다케와키의 시작점인 버려지는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너무나도 궁금하고 만나고 싶었던 그 사람과 함께 한다.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왜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되고,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은 행복한 아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버려졌다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 짖고 기억을 지워버리면서 살았던 다케와키는 그 기억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

 

‘내가 스물이 되면 당신은 서른다섯. 내가 스물다섯이 되면 당신은 마흔. -중략- 내가 마흔이 되면 당신은 쉰다섯. 내가 예순다섯이 되면 당신은 여든.’(409페이지)

 

열다섯 소녀는 엄마가 되고, 자신과 아이를 살리기 위한 방법을 선택한다. 공습으로 모든 것을 잃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운 채 홀로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소녀에게 ‘엄마로 사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고 절망적이었다.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다. 하지만 그 순리를 따르지 않았다 해도 그 상황과 마음을 알 수 없기에 내 잣대로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처참한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전쟁 후 복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급성장한 사회는 전쟁의 처참함과 빈곤함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미네코와 사카키바라는 전쟁으로 빈곤한 시대에 빈곤하게 살았다. 다케와키와 나가야마는 풍족한 시대에 빈곤하게 살았다. 그 시대를 살아가고 버티기 위해 풍족한 시대를 풍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더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버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쉼 없이 일을 했던 다케와키는 일의 끝인 정년 송별회를 끝으로 의식을 내려놓는다. 비로소 쉼의 시간을 갖게 된 그는 생과 사의 선택의 순간 생의 의지를 내려놓으려 한다. 그 순간 찾아온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생의 의지를 깨워준다.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받기도 하지만 사람으로 인해 치유 받는 것이 더 크다. 다케와키는 자신의 삶이 불행한 삶이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잘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 번도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적 없던 다케와키는 ‘훌륭하게 잘 살았다’, ‘힘들었겠다’, ‘살 권리’ 등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내 세쓰코와 노인 사카키바라는 그가 훌륭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버려져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보호시설에서 자라야 했던 다케와키의 유년은 불행하고 힘들었지만, 미래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갔기에 훌륭한 삶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상태로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것도 그 또한 어려운 일이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룬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불우한 환경에서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준 다케와키에게 나도 ‘훌륭하게 잘 컸다’고 말해주고 싶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전쟁 당시와 전쟁 후의 일본의 시대상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아이를 낳아 기른다. 모든 부모가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는 것은 아니다. 다케와키의 부모는 아이를 버렸고, 다케시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어머니는 무책임하게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두 아이의 유년 시절은 불행했고, 성장한 후까지 영향을 미쳤다. 다케시는 나가야마와 아내의 부모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받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되돌려주는 어른으로 성장해간다.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사람을 통해, 상황을 통해, 경험을 통해서 계속 더 나은 나로 성장한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어른들의 성장이야기이다.

 

“네게는 살아갈 권리가 있어.”(419페이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살아갈 권리와 의무가 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가 되어 홀로 살아가야 할지라도 세상에 태어났으니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책임이 있다. 생명존중과 존재의 권리와 더불어 의무도 잊지 않기를.

 

 

■ 발췌글

9

땅거미가 내리자 눈이 찾아왔다.(첫 문장)

 

55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이상하다. 아마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이에 모든 걸 잊어버린 게 아닐까?

 

71

나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와 장소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눈이 핑핑 도는 고도 경제 성장 속에서, 고생이란 말은 이미 죽은 말이 되었다. 전쟁은 없었다. 기회는 공평했다. 숙명적인 어려움에는 최대한 원조가 있었다. 그런 시대에 고생은 비유적인 표현이거나 노력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행복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가혹한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

 

72~73

인간에게는 여러 욕망이 있다. 더구나 욕망의 양은 똑같지 않다. 그래서 야심이 있는데 부지런하지 않다든지 잠을 적게 자는 대신에 대식가라든지 돈을 빌려서라도 도박을 한다든지 한다. 그런 욕망을 수치화해서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다면 형태가 크고 아름다울수록 대단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인간의 그릇이다. 내 그릇은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 점인데, 개인적인 욕망의 총량은 일정해서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이와 함께 형태가 변한다.

 

88

출생의 열등감을 없애지 않으면 남들처럼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언젠가부터 어린 시절의 기억에 뚜껑을 덮었다.

 

94~95

적당한 화제가 없을 때, 또는 예민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음식 이야기가 최고다. 하지만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그것도 상대의 나이에 따라 배려할 필요가 있었다. 고생을 모르는 애송이라고 무시당할지도 모르고, 상대가 고생담이라도 늘어놓으려고 하면 즉시 분위기가 썰렁해지니까. -중략- 1951년 출생인 나는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최초의 세대였다.

 

127

“인간은 싫은 일을 금방 잊어버리죠.”

 

192

따분함은 참 좋다.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 오직 사고와 상상만 하는 비생산적인 시간. 옛날 인류는 풍요로운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며 살다가 우아하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일들은 나태함이 되고 비생산적인 행위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을 봉쇄하며 살게 되었다. 아무리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그런 인생은 너무나, 그런 죽음은 너무나 빈곤하지 않은가. 육체가 자유를 잃어버리자 모든 기억이 시간 순서를 잃어버리고 어제 일어난 일처럼 느껴진다. 과거를 되돌아볼 여유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인생의 모든 귀중한 일이 앨범에 정리하지 않은 사진처럼, 또는 컴퓨터에 저장되어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하는 자료처럼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도 모른 채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몰랐던 ‘따분함’이라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209

내 뇌의 밑바닥에는 이렇게 수많은 기억이, 열릴 일이 없는 창고 안에 있는 물건처럼 제자리를 잡고 있는 것인가.

 

225

“세상에는 잊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지.”

 

231

잃어버린 풍경은 기억에 머물지 않는다. 옛날에는 어땠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릴 수 없다. 다만 지금과는 다른 풍경이 있었을 거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235

나는 쏟아지는 함박눈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가로등의 불빛 속에서 태어나 도로에 떨어지는 순간 한 방울의 물로 변하는 덧없는 눈이었다.

 

237

세상의 굴레가 없다는 건 고생의 절반은 없다는 뜻이니까.

 

241

죽음은 허무한 일임이 분명하지만, 그곳에 이르는 도중에 시간에서 해방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겨우 몇 분일지라도, 죽는 사람에게는 수십 년이나 또 하나의 인생이라고 할 만큼, 아니 영원으로 여겨질 만큼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고. 애초에 시간이란 것은 너무나 모호하지 않은가. 소년의 하루와 노인의 하루가 같을 리가 없다. 객관적으로는 똑같아도 주관적으로는 각각 다르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두고 육체가 쇠약해진 순간에는 각각의 정신, 다시 말해 주관적인 시간이 새로이 나타나고 사회가 정한 객관적인 시간은 무의미해지는 게 아닐까?

 

258~259

당장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사람과 헤어진 뒤의 기분은 그런 법이다. 상대가 애인이든 친구든, 한순간의 이별이든 영원한 작별이든,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이 분명하다. 마음속에 텅 빈 공간이 생기고, 그때 자신의 처지에 상관없이 마치 무인도에서 눈을 뜬 표류자처럼 때와 장소를 잃어버린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그런 경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321

배워서 얻는 지식과 달리 따뜻함이나 자애로움은 본래 부모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없는 아이에게는 누가 남들만큼의 따뜻함이나 자애로움을 줄까?

 

372

‘무엇을 해도 된다’라고 생각하면 풍요로운 시간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면 빈곤한 시간이다. 노후는 이 두 가지가 상반되는 게 아니라 똑같은 뜻이 되는 시간이다.

 

398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 내가 나누어 준 생명. 흐르고 또 흘러서 행복의 항구에 도착했으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들이리라.

 

406

옛날 사람들은 다들 개성이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빼빼 마르기는 했지만 각각의 얼굴에 각각의 인생이 배어 있었다. 물론 그들이 짊어진 인생은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나 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지만. 풍요로운 사회가 인간에게서 개성을 빼앗는 건 아닐까?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다.

 

408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모두 불행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 일만으로도 벅차다고 변명을 하면서.

 

410

고아에게 최대의 핸디캡은 사랑의 결여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인생의 핵심이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 모든 행위에 도덕 기준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이럴 때 아버지라면 어떻게 할까, 어머니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가질 수 없었다.

 

416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그러니까 당신도 뒤돌아보지 마.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에게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니까. 나도 당신도 행복해져야 해. 누가 봐도 최악의 선택이지만 우리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이 어찌할 수 없는 밤을, 적어도 우리만의 성스러운 밤으로 만들기 위해.

 

417

버린 것이 아니다. 숨겨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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