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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평점 :
미래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단어가 내려온다』는 작가가 상상한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 더불어 현대 사회에서 이슈가 되는 문제들도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SF과학소설 『단어가 내려온다』에서 작가 오정연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을까? 일곱 편의 단편 <마지막 로그>, <단어가 내려온다>, <분향>, <미지의 우주>, <행성사파리>,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 <일식>에서 어떤 사회적 이슈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마지막 로그>는 2038년을 배경으로 존엄사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중학생 때 발병한 희귀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당뇨망막병증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시력을 잃어가던 주인공은 존엄사를 선택한다. 안락사 실행 당일 자신의 기록을 모두 삭제한 후 산책 시간을 갖는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안드로이드 조이가 정맥주사 키트와 약물을 가져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A17-13은 약물 주사를 맞고 1시간 28초 후 자신이 선택한 죽음을 맞는다. 안드로이드 조이는 안락사 결정 재고를 권유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죽음의 순간 인간들의 행동 패턴에 호기심을 갖게 된 조이는 자신의 이런 호기심을 관리자 및 네트워크에 공유되지 않도록 로그를 자체 조작해왔다. 주입된 프로그램 혹은 누군가 정해놓은 것에 구애받지 않으려하는 자유의지를 갖게 된 조이는 자신의 오류를 운명으로 여기면서 인간처럼 그 시간을 견뎌보기로 결정한다. 조이는 폐기될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의 선택으로 실버라이닝을 벗어난다. 하지만 와이파이를 통해야만 충전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고, 그 결과 지정공간을 벗어나 신제주항에서 <꽃의 이름>을 반복 재생하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어 강제 종료된다. <마지막 로그>는 ‘존엄사’와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나는 이러한 선택의 순간 어떤 선택을 할까? 나로서 존엄하게 죽을 것인가? 고통을 감당하면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지금 나의 선택은 존엄사다. 하지만 이 선택이 앞으로도 계속될지는 모르겠다. 나의 생에 대한 집착의 정도를 지금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얼마나 자유의지에 의해 내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평생을 살아야 겨우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성으로 이주할 수 있는 미래 시대에 각각의 개인에게 단어가 내려온다. 주인공은 열다섯 살이 지난 후에도 단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화성으로 가는 수송선을 탄다. 열여섯 살 생일을 3일 남겨둔 시점에 산개성단 관측을 성공했다는 속보가 보도된다. 수송선에서 만난 이누이트족 소년 ‘말할것이다’와 함께 산개성단 영상을 보던 순간 주격조사 ‘이’가 내려온다. 원했던 단어가 아니라 아쉬워하는 주인공에게 말할것이다는 문장의 주인을 표시해주는 말을 받은 것이 굉장한 일이라 말해준다. 그 말을 들은 후 주격조사를 받은 덕분에 모든 사태의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단어가 내린다>는 미래 시대에 개개인에게 단어가 내려온다는 설정으로 단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의 모어가 아닌 타언어로 단어를 받기도 하는 이들도 있고, 소멸되었던 단어를 받는 이들도 생긴다. 사람들이 받은 단어를 수집해 사전을 만들면서 단어에 대한 기록의 양은 쌓인다. 단어(언어)는 새롭게 생성되거나 발전하고 소멸된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속도나 단어의 유형은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단어의 속성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단어가 내린다는 설정이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단어로 사람이 단정될 수 있다는 것에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분향>은 이상기후로 폭설과 폭우, 한파와 폭염, 산불과 가뭄이 매 계절 반복되는 지구에서 살아가기 힘들어지면서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위한 국가별 연합체가 구성된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 1세대 정착민들은 고향의 명절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종교적인 이유로 며 세대 전부터 치르지 않았던 차례나 제사를 화성에 이주한 후 다시 지낸다. 이를 위해 국가에서는 차례 지내기 이벤트를 위한 분향소를 설치하고 사람들은 분향소에서 지구와 연결된 통신망으로 지구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보면서 차례를 지낸다. 하지만 보급품 지급이 화성에 도착하면서 통신망이 불안정해져 분향은 중간에 중단된다. 화성 이주 1세대들은 낯선 땅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지구에 있는 이들과의 연결의 끈을 더 강하게 잡으려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를 위해 차례나 제사에 더 집착했을 것이다. <분향>은 의례적인 행사보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미지의 우주>는 화성 정착 2세대 미지와 지구에서 이주해온 혜리의 이야기다. 화성 이주 2세대 미지는 홀로 딸 우주를 키우면서 콘텐츠 회사에 다닌다. 미지의 친구 혜리는 전문직에서 일했지만, 남편을 따라 화성으로 이주해 와 두 아이를 키운다. 셋째를 임신한 혜리에게 한 아이를 키우는 미지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미지의 우주>는 지구와 같이 화성에서도 육아는 대부분 여성의 몫으로 돌아간다. 화성은 돌봄 로봇이 있고 엄마 홀로 아이를 키워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혜리는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했고,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해 육아 부담이 가중된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화성이나 지구나 다르지 않다. 아이는 키우는 동안 힘들지만 또 그만큼 아이로 인해 기쁨을 얻기도 한다. <미지의 우주>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정에 대한 고정관념과 나는 어떤 부모였는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물론 지금도 육아는 계속 진행 중이고, 육아는 여전히 힘들다. 미래 사회의 육아는 어떻게 변할까? 궁금하다.
<행성 사파리>는 지구 보다 50만 년 늦게 태어났지만 지구와 같은 환경과 진화 과정을 겪고 있는 쌍둥이 지구가 배경이다. 언니의 죽음 이후 언니의 유전자 복제로 태어난 미아는 성장판이 멈췄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진 후 사파리 여행을 떠난다. 지구와 같지만 완벽하게 같지 않은 쌍둥이 지구를 여행하면서 미아는 언니 미지와 같지만 같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객체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과학자들은 쌍둥이 지구가 지구와 같은 길을 걸을 것이라 예견하지만 행성 가이드 타니는 같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비슷한 환경의 행성이지만 그 자체적으로 변화해갈 것이라는 타니의 말처럼 미아 또한 자신만의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복제 아이 미아와 쌍둥이 지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다. 복제인간을 하나의 객체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은 인간들의 기억을 싣고 우주로 떠나는 인공지능 영원의 이야기다. 영원은 우주의 풍경을 편집해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이라는 제목으로 일 년에 한두 번씩 메일로 보낸다.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인공지능은 스스로의 의식을 갖게 되고, 인간들의 기억을 보면서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 자신의 취향을 파악한다. 저장된 기억 속 인간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영원은 계속 날아간다. 영원의 여행의 끝은 어디일지 궁금하다. 우주여행을 하는 동안 인공지능은 인간들이 남긴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평가를 하게 된다. 의식을 획득한 인공지능, 인공지능이 의식을 획득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는 현대에 인공지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일식>은 21세기 초반 일상을 기록하는 라이프 로깅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기억의 망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기술이 만들어져 신경계에 이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개인 기억 관리 서비스를 관리하는 주인공은 모든 업무를 문서 파일로 전달하고 통화나 직접 만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데이터로 저장하고 그 기억을 필요할 때 재생한다. 모든 기억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이 과연 행복한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다시 로그>, <단어가 내려온다>, <분향>에 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품 속 주체는 뚜렷하고 강렬하다. <다시 로그>의 주인공은 A17-13과 안드로이드 조이다. 작가는 왜 사람은 알파벳과 숫자로 적고 있으면서 안드로이드는 이름으로 적었을까? <단어가 내려온다>의 주인공에게 내려온 단어는 주격조사 ‘이’다. 단어를 보조하는 조사이지만, 단어를 주체적으로 만드는 주격조사를 받은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스스로 정의내릴 줄 아는 주체적인 인간이다. <분향>의 주인공은 화성에서 진행되는 차례 지내기 이벤트를 취재하는 기자지만 낯선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다. <미지의 우주>에는 우주라는 아이를 키우는 주인공 ‘미지’가 등장한다. <행성 사파리>의 주인공은 미아다. <미지의 우주>의 주인공 미지와 같은 이름의 언니 미지가 어린 시절 죽은 후 그 유전자를 복제해 태어난 아이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은 인간의 기억을 저장한 데이터를 싣고 우주를 여행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일식>은 인간의 기억을 관리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인간의 기억을 저장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왜 기억에 집착하고 기억을 저장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기억을 기록한 데이터가 아무런 왜곡 없이 전달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된다. 기억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단어가 내려온다』를 읽으면서 테드 창의 <<숨>>과 <<당신 인생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SF 과학 소설로 미래 사회를 적고 있지만, 그 안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에 대한 해답을 찾게 한다. 삶은 계속해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이 반복된다. 『단어가 내려온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계속해서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진다. 자유의지를 갖고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된 인공지능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은 놀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마지막 로그>의 안드로이드 조이와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의 인공지능 영원은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오정연 작가의 『단어가 내려온다』는 과학 소설이면서 동시에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철학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