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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 - 뇌가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
김재현 지음 / 컨텐츠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
누구에게나 평생 잊히지 않는 나쁜 기억이 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떠올라 사람을 고통에 바뜨리는 기억이 있다. 비만 내리면 땅 위로 올라와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길을 걷다가 발빝에 밟히는 지렁이처럼 나쁜 기억은 불쑥 불쑥 찾아온다.
내가 왜 어떤 특정 기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는지... 이책을 읽고 이해하게 되었다. 사실 왜 항상 그런 기억들이 따라다니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티브이나 영화등을 보면서 그 기억을 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나쁜 기억을 받아드리려고 노력했다. 기쁜 마음으로 맞이한 나쁜 기억은 더 이상 내게 외면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내 몸을 감싸던 어떤 옥죄던 것을 떨쳐낸 기분이다.
나쁜 기억은 뇌가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두통, 어지럼증, 피로감, 목 결림, 감기....... 몸의 균형이 깨지면 뇌가 신호를 보내듯이 정신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넘어가면 뇌는 나에게 나쁜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활발히 회전해야 할 뇌가 “내 잘못이야. 나는 안돼. 나는 끝났어”하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귀찮아, 지쳤어, 내문제가 아냐”하는 게으른 마음에 억눌리면 뇌는 나에게 나쁜 기억이라는 신호를 보낸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다.
나아지고 있는 한 부족한게 틀림없다.
성적에 집착하고, 시선의 압박을 받게 되면 자연 ‘나’를 의식하게 되고, 그 순간 뇌는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바퀴처럼 제동이 걸린다. 이렇게 ‘나’를 의식하게 되면 우리의 뇌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최경주 선수, 추신수 선수가 갈망하는 ‘나’를 의식하지 않는 상태란 우리가 흔히 들어봤던 ‘무아지경’을 말한다. 무언가에 심취되어 깊이 몰입해 있을 때를 우리는 ‘무아지경’이라고 한다. ‘무아(無我)’란 ‘나’가 없다는 말이다. 그때 우리는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다리가 저린 줄도 모르고 한 가지 일에 매달린다.
갓난아이와 스님이 혹한의 추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나’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가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뇌는 자신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한다. 만일 ‘나’가 있었다면 어떨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벌 떨다가 도리어 죽음을 앞당기지 않았을까?
축의 시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시기, 인류 지성에 기축이 되는 시기
‘나’는 뇌를 억누르고 있고, 뇌는 ‘나’를 넘어서려고 한다. 한마디로 뇌와 나는 힘의 대결을 펼치고 있다.
쥐불놀이->‘나’를 구심력에, ‘뇌’를 원심력에 대입해보자. ‘나’는 자꾸만 원을 작아지게 만들려고 하고, ‘뇌’는 원을 크게 만들려고 한다.........중략....여러분이 그리는 원은 어떤가? 늘 같은 크기인가? 그렇다면 당신의 어제와 오늘은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중략..반대로 원의 크기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면 당신은 나날이 ‘나’를 내려놓기 위해 힘쓰고 있다는 뜻이다. 원이 점점 커지는 만큼 당신의 뇌는 점점 더 자기 능력을 발휘할것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기억을 상실하면 ‘나’도 사라진다. ‘나’는 기억의 축적이다. 1분 1초가 쌓이고 쌓여서 현재의 ‘나’를 형성한다.
라쇼몽(羅生門) : 벌거 봇고 내터났다.
사람은 자기 욕망대로 사실을 채색한다. 또같은 밥이어도 배고픈 자는 군침을 흘리며 쳐다보고 배부른 자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어느 비 내린 오후를 ‘행복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중중한 하루였다’고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기억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 기억은 우리 생각처럼 정확한 것도 아니고, 불변하는 것도 아니다.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퇴색되고 욕망에 따라 윤색된다. 눈과 귀를 통해 뇌에 입력되는 순간부터 사실은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꺽인다.
라쇼몽, 직접적 지식: 인물들이 겪은 사건처럼 직접 체험을 알게 되는 지식
관념적 지식 : 전화번호, 교과서 지식처럼 배워서 알게되는 지식.
비유하자면 직접적 지식이란 세밀화이고, 관념적 지식이란 캐리커쳐이다....보이는 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이 필요하다. 반면 캐리커처 화가는 특징만 잡아서 그린다.
지식이란 두 사물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는 과정에서 축적된다. 고래는 바다에서 살고 곰은 뭍에 산다(차이점). 둘은 새끼에게 젖을 물리기 때문에 포유류로 묶인다.(공통점)
우리는 푸네스처럼 사물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특징을 기억한다. 이는 일반화와 개념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질프라이스의 뇌는 두 가지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첫째는 ‘새 구두를 살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별로 효용이 없다. 댄스 파티가 이미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해결책은 ‘나를 서운하게 했던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볼 것’이다. 구두를 못 사서 괴로웠다기 보다는 엄마에게 입은 상처가 계속 기억되는 것이 아닌가. 엄마를 이해 못하는 어린 나를 버리고 엄마를 이해하는 다 큰 ‘나’로 갈아타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자기동일성(정신병리학자, E.H.에릭슨, 사회심리학자 G.올포드)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똑같은 나라고 느끼는 경험을 뜻한다. 쉭게 말해 ‘나는 과거에도 김재현이었고, 지금도 김재현이고, 미래에도 김재현일 것이다.’라는 관념이다.
‘나’를 공격당하는 경험 : 예) 무시당하는일
자꾸만 되풍이되는 기억은 우리 뇌가 답답하다고 외치는 아우성이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손짓이다. 상처를 끌어안으라는 주문이다. 지나간 상처로부터 벗어나라는 절규이다. 인식 지평을 확대하라는 명령이다.......자꾸 떠오르는 기억이 ‘나’를 확장하라는 메시지임을 알아야 한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컵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기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 비우기를 조금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질문 던지기’이다.
‘나’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신념을 향해 계란을 부단히 던지다 보면 가끔은 이 세계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논바이 고동치는 소리’.........
‘나’를 비운다는 말은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식’을 버린다는 말이다. 지식을 버리고 나면 우리는 감각이 눈을 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때 비로소 관찰력이 생긴다.
관찰력은 변화의 흠적,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다. 변화의 흔적은 때로는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지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예민한 오감으로 그 흔적을 발견해야 한다.
편견이란 10가지 사실 가운데 우리 입맛에 맞는 2~3가지 사실만을 취하여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2~3가지 지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우리는 나머지 7~8개의 사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성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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