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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 - 뮌헨의 건축하는 여자 임혜지의 공간 이야기
임혜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월
평점 :
공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산 16-152번지라는 주소를 가진 곳에 살았는데, 그곳이 무허가 건축물이었는지, 어느 날 헐렸지요. 사실,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이 없고, 그 다음 장면 즉, 천막을 밝히던 노란 촛불만 생각납니다. 천막이라도 치고 자야했던 어른들에게는 분명 우울한 상황이었겠지만, 제겐 노란 빛이 은은히 번지던 그 단 하나의 공간이 참으로 포근하게 느껴졌지요.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저의 공간은 이제 하나가 아닙니다. 거실은 햇빛을 한껏 받는 남쪽, 부엌 베란다는 박스 째 산 호박고구마를 펼쳐 놓기 좋은 북향인, 용도에 따라 나뉜 공간을 누리고 살고 있지요.
공간에 대한 책이 나왔습니다. 한겨레 코리안 네트워크 독일 칼럼에 임혜지 님이 글을 올릴 때부터 저는 그 글들이 언젠가 귀한 책으로 묶여 나오리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저와 은연중 생각을 나누고 있던 다른 이들도 이제 매우 신비로운 표지를 하고 나온 이 책을 보면서 자신의 안목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
이 책은 집 이야기, 도시 이야기, 현장 이야기, 이렇게 세 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집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집과 이웃들 이야기를 하면서 집안 구조, 건물의 공간이 갖는 의미 등을 흥미롭게 풀어놓고 있지요. ‘도시 이야기’에서는 통행세를 받기 위해 기존의 다리를 불태워버리고 새로 멀찌감치 다리를 건설한 중세 영주의 이야기, 건축에 미친 왕 등의 이야기가 은근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매력적인 부분은 ‘현장 이야기’로, 터키인 학생들과 독일인 학생들이 어우러져 일하는 메소포타미아 발굴지와 칼스루에의 문화재 건물 안에 나도 당장 들어가고 싶을 정도지요.
또한 이 책에는 작가의 가치관이 매우 또렷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공허하게 환경을 외치는 게 아니라 삶에서 실천하는 모습은 존경스럽습니다. 자동차 없이 자전거로 살며, 옷을 두텁게 입고 실내 온도를 낮춰 세계 환경 문제 해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하지만, 막상 십대 딸이 왜 엄마 아빠의 가치관 때문에 자기가 고생해야 하느냐고 맞서는 모습이 솔직하고 유머 있게 그려지지요. ‘뜨거운 굴뚝 속의 아이들’에서는 전 세계에 만연하는 어린이 노동 문제에 대한 애타는 마음이, ‘학자의 양심 앞에서’에서는 철거 문화재에 대한 건축주와 학자들 간의 갈등에 끼어버린 저자의 고민이 진솔하게 드러납니다.
가볍고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나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 준 책. 공간과 건축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은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책. 아무래도 이 책 덕분에 올해는 서점에 바치는 돈이 많을 것 같습니다. 친한 사람들에게 다 보내주고 싶은 책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