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희곡 전집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김규종 옮김 / 시공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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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멈추고 내 길을 잠시 떠나면서 써왔던 일기장을 보다가 문득 체홉의 작품들이 생각났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젠 보인다.
그동안 분석으로서 기술로서 연구로서 알았던 대사들이 진정 가슴속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결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인생의 깊은 허무함.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리 무너질 일도 아니었는데 하면서도 내면 깊이 자리 잡은 나의 나약함.

그 나약함을 마음속 깊이 숨기지도 못한 채 하루 종일 모든 것들에 강한체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점차 해가 지는 것에 맞춰 무너져 내려가 결국은 녹초가 되어 겨우 이불을 덮고 잠이 든다.

특히 요 근래 썼던 일기장의 대부분은 [세 자매]의 체부트이킨의 이 대사와 많이 비슷하여 오늘 밤은 더욱 우울해질 것만 같다.

체부트이킨 (음울하게) 

전부 빌어먹어라….. 빌어먹을……. 내가 의사니까 병이란 병은 모두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들 하지만, 난 정말이지 아는 게 없어. 알고 있던 것도 다 잊어버렸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정말 아무것도.
빌어먹을. 지난 수요일에 자스이피에서 여자를 치료했는데, 죽어버렸어. 그 여자가 죽은 건 내 잘못이야. 그래…… 25년 전에는 뭔가 알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 안 나. 아무것도, 어쩌면 난 인간이 아닌지도 몰라. 단지 나한테 팔과 다리 그리고 눈이 있는 척하는 거지. 어쩌면 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몰라. 그저 걸어 다니고, 먹고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 (운다) 아,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는 걸 멈추고 음울하게) 알게 뭐야……. 사흘 전에 클럽에서 대화하는데 사람들이 셰익스피어니 볼테르니 하며 지껄여댔지………. 난 읽지 않았어. 전혀 읽지 않았지만, 마치 읽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아. 속된 짓이야! 저급해! 그리고 수요일에 내가 죽인 여자가 생각나더라니까…... 모든 게 생각나더라고………. 그러자 속이 뒤틀리고, 추악하고, 뻔뻔스러워지기 시작했어.... 나가서 마시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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