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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이 책과 같은 즐거움을 주는 책을 읽고 싶다. 그러기 쉽지 않아서 이 소설이 특별한 거겠지.
"우린 모두 기껏 생의 반쪽만 살고 있는 거야. 세이디는 생각했다. 내가 사는 생이 있고, 그것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진 다른 생이 존재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 다른 생이 지금 내가 사는 생처럼 뚜렷하게 느껴진다."
게임 제작자의 이야기?
과거 모두가 앵그리버드와 애니팡을 하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배틀그라운드를 하고, 롤 월드컵이 화제에 오르내리더라도 그 어떤 게임도 시도조차 안 해본 사람도 문제없이 읽을 수 있다. 물론 주인공들에게 게임은 중요하고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이 그 자체로 비중을 차지한다. 작가 역시 게임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푹 빠져봤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더군다나 90년대 이야기라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글의 내부에서 게임을 충분히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책에서 나온 게임을 자기 인생의 중요한 무언가로도 충분히 각자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나를 송두리째 사로잡았던 경험, 남들의 시선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사랑한 무언가, 어리석을 정도로 열정을 쏟고 그러다 미워지기까지 하는 존재, 내 인생에서 떼어내면 나까지도 설명할 수 없다고 믿는 대상. 그게 이 주인공들에게 게임이다. 어쩌면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헌신해 본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다고 본다.
여자 한 명에 남자 둘의 삼각관계? 난 로맨스는 관심 없는데?
뻔하디뻔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 입만 드셔보라고 부르짖는다.

물론 사랑을 한다. 성장도 한다. 흔하게 쓰이는 청춘이라는 단어에서 대중이 기대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아주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 그럼에도 외로움과 게임이라는 접점을 통해 만난다. 오해와 잘못이 있고 긴 시간 서로가 없이 잘 살다가도 그렇게 운명지어진 것처럼 다시 만나고 얽히고 분리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진다. 그것이 만사형통이고 해피엔딩으로 당연히 결말을 맺는 흐름대로 가지 않는다.
연애를 의미하는 아주 좁은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닌 다른 의미로 일생 함께하는 관계를 작가가 그리고 싶어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글에 꼭 맞는 말이고, 아름다워서 엄청나게 공감했다.
"세이디가 먼저 사랑한다고 했는데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왜 그리 힘들었을까? 샘은 세이디를 사랑했다. 서로에게 훨씬 별 느낌 없이 무덤덤한 사람들도 툭하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쩌면 그게 핵심일지도 모른다. 세이디 그린은 샘에게 사랑 이상이었다. 그것을 표현하려면 다른 낱말이 필요했다."
두께에 도망가지 마시길.
페이지터너라는 단어는 이런 책을 위해 존재하는구나 싶으니까. 길이만큼, 복잡한 배경과 관계를 그려내는 만큼 여러 렌즈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누군가는 혼혈의 정체성에 집중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도 하고, 쉽게 많은 사람에게서 미움받는 야망 넘치는 여성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볼 수도 있다. 이 책의 두께는 주인공의 생애를 몇 달에 걸친 시간 동안 함께 겪는 드라마와 같다. 긴 이야기를 읽으며 함께 살았기에 입체적인 이 인물들이 후에는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해서 아쉬움에 입맛 다시며 괜히 마지막 페이지를 어루만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