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소년이 온다>를 사두고선 읽지 못했다. 5월이 되면 읽어야지 했다.

  처연한 슬픔이 이상하게도 한강 작가에게선 느껴진다. 처연하다는 말이..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 나름대로 이미지화된 작가의 글을 읽었다.

몽고반점이라는 제목이 낯설지가 않다. 나는 한때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에 빠져 문학상 수상작 들을 꼭꼭 챙겨 읽었었다.

 

  멘부커 상의 최종후보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서..아니 궁금해서 이 책을 꼭 읽어보리라 했다.

책을 찾는 내내 표지 이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읽는 내내 아래의 단어들을 연결시키고 해체해보았다.

 

나무, 채식주의자, 젖가슴, 영혜, 고기, 폭력, 아버지, 엄마, 언니, 형부, 처제, 욕망, 지우, 인혜

 

  이 책에 처음을 읽었을 때 나는 무엇이 평범했던 영혜를 잠들지 못하게 하고 고기라는 살덩어리들을 거부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단순한 꿈 때문은 아니겠지 하면서 상상했다.

 

  소설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이고 그 소설을 읽어나가는 나같은 독자들은 그 다음 이야기를 상상한다. 그 속에 무언가가 있구나 하는 나의 상상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그리고 마지막 <나무 불꽃>을 읽었을 때 현실이 되었다.

 

  소설을 좋아하던 나는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조금은 무서운 이야기<?>, 조금은 엇나가는 거북한 이야기들을 피했다. 그래서 한동안 난 우리 작가들이 쓴 현대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이 소설은 왠지 나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았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나는 영혜이지는 않지만  왠지 인혜인듯 하기도 했기 때문일까?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남편이 결혼 상대를 고를 때는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평범하게만 보이는 영혜를 골랐다는 그런데 그런 영혜가 점점 자기가 원하는 삶에서 멀어지는 변화를 가져온 것이 못마땅하게만 여겨졌다. 나는 갑자기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영혜를 안타까워 하거나 그런 영혜를 더욱 드러다 보기는 커녕 나의 삶이 잘못될까봐 우려만 할뿐 방관하는 남편이 이상하게 미웠다.

 

  그런 남편은 어린 시절 영혜에게만 더욱이 폭력을 선사했고 권위를 세우기만 아버지나 그것을 방관했던 엄마나 그리고 그런 영혜의 보호막이 되고 있다고 여겼던 그러나 진작 영혜를 자기의 보호막으로 이용한 듯한 그래서 더욱 더 자기 자신을 내몰았던 언니 인혜와 다를 바가 없는 타자이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더 붙인 지독하게 이기적인 남!!

 

  어쩜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은 것도 지독한 꿈을 피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말라가 몸에 붙은 살점마저 다 떼어버리고 나무처럼 햇빛과 물만 있으면 된다고 먹어야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나무로 인식하려는 것을 보면서 나는 영혜의 이야기가 간절히 듣고 싶어졌다.

 

 인혜<영혜언니>를 통해서 그리고 형부의 시선으로 영혜를 만났지만 영혜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작고 가늘기만 했다.

 

  <몽고반점>을 읽었을 때 굉장히 충격적이였던 10여년전의 인상은 <채식주의자>에 비하면 덜했다. 불편하고 어쩌면 더이상 읽어나가기 거북한 그 순간을 넘어서면서 연민이 밀려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영혜를 인혜를 그리고 인혜의 남편이 처연하고 이 세상속에서 처절하게 살아나가는 나약한 인간의 군상들이 연상되었다.

 

  나는 또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고 어린 시절에 겹겹이 겹쳐온 상처는 지금 무한한 행복속에서 헤엄친다고 해도 분명히 사라지지 않음을 더욱 더 각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혜와 같은 상처를 지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불행이라는 것을 만나면 그리고 불안정한 무언가를 자꾸만 맞닥뜨리면 그것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친다.

 

  그러기위해 안전하고 원하는 그 무언가를 찾아나서지만 그것에 기댈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여기면 어느새 또다시 그 상처는 멀쩡한 살들을 뚫고 나온다.

 

  <몽고반점>에서의 처제를 향한 형부가 그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나<형부>는 미약하고 나는 그런 나를 채울 내가 창조해내는 또다른 나인 작품이라는 것에 몰두하고 그 작품의 완성이 나를 비로소 열정적으로 살아나게 하는 일이라 여기지만 그 끝은 비참하리만큼 잔인하게 나에게 꽂히고 그로 인해 또다른 상처를 나의 아내 나의 아이에게 되물림 해버린다.

 

  어쩜 불완전한 것에서 오는 결핍의 연속이 안타깝다. 채식주의자속의 남편은 어린 시절 영혜를 보호해주지 못할 정도로 나약했던 엄마인듯 하고 인혜의 남편은 어쩜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을 되내이기만 했던 인혜인듯 했다.

 

  사회라는 틀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평생을 같이 살 가족 중 일부는 선택할 수 없고 그리고 그 가족을 쉬이 버릴 수도 없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가족은 운명처럼 만나고 살아가게 되면서 행복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남보다 못한 상처를 주기도 한다. 피와 살을 섞은 이들이지만 헤어나고 싶은 상처를 안기고 그런 상처를 알고서도 그것이 현실에 파고들까봐 무서워 나를 더욱 오롯이 세운다는 것으로 그것을 가리고 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인혜>는 내재된 그것을 숨기고 살지만 그것을 나의 핏붙이에게는 되물려주기는 싫은 것 그러나 허무하게도 또다시 되풀이되는 결핍의 연속..을 막지 못했을 때 느끼는 좌절은 분명 곱절이상의 고통을 동반할 것이다.

 

  지속적으로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려는 영혜를 바라보는 인혜는 더더욱 선명한 핏자국을 안으로 만들어 왔음이 책속에서 확연하다. 영혜는 아우성치는 괴로움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행동한다. 우리처럼 살아움직이는 것들과 살아있지만 우리와는 조금은 다르게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나무가 그러한 듯 했다.

 

  적어도 일정한 공간을 떨어져 있는 나무들은 서로를 할퀴거나 서로를 상처입히지는 못하지 않을까..나의 욕망이라는 것을 전가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고 너무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푸르름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영혜는 어쩌면 나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돌고 도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그래서 생명을 연장하고 유지할 수 있는 병원에 있어야 하는 하는 영혜가 언니 인혜에게 내보내달라고 한다. 먹기 싫다면 먹기를 거부하는 영혜에게 인혜는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라고 하는데 영혜는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라는 말이 내내 되내여진다.

 

  기괴할수도 있는 그리고 불편하고 거북하기도 하고 현실이 아닌 이야기속에만 존재할 꺼 같은 이야기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고 나지막히 읊조리는 <채식주의자>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이야기로 기억될꺼 같다. 그리고 영혜를 이해해주고 인혜를 위로하고 싶다. 나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읽고 생각하고 그리고 또다른 상상을 한다. 그것이 한강이라는 작가의 강한 서사의 힘이라는 것은 자명하고도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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