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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ㅣ 사계절 1318 문고 91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4년 4월
평점 :
수레바퀴 아래서...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아주 어렵고 난해한 책이겠구나 했다.
나는 소설나부랭이<소설에 대한 모독은 아니다>나 시나 좀 읽어 왔고 나의 독서는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것이거나 나의 맘을 어루어 만져 주는 것 그리고 흔히 유명작가의 책이거나 유행을 따라는 책읽기가 우선이였다. 그래서 흔히 고뇌하는 청춘들이 만나는 책을 만날 기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마 그때 나는 뭔가 다른 고민 속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하면 데미안이 떠오른다..그것도 이름만 들었을 나에게는 제목만 아는 책이다. 사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아주 가뿐히는 아니지만 공감하면서 읽고선 헤세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지긴 했다.
이런 백지 상태의 내가 이 책을 읽고선..한동안 이 책의 배경이 언제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연장해 보니 왜 다들 살아가면서 고전을 읽으라고 하는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명확하게 책속에 답이 나와 있고 우리는 그 답을 보았음에도 인생에서의 문제는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 그래서 또다른 아픔을 낳기도 하고 실패도 겪는 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작가가 써내려가고 있는 한스의 삶이 어쩜 일기처럼 느껴졌다.
소설은 허구적인 인물을 만들어 가는 꾸며낸 이야기라고 국어시간에 배웠다. 허구..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내내..아 맞다 맞아~그래 세상은 그렇더군..우리는 무엇을 해야 인정 받고 흔히 위에 올라서는 사람이 되는 가는 알고 있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어찌해야 하는지를
여전히 수없이 고민하고 살고 있다.
나도 그렇고 나의 남편도 그러하며 나의 아이들도 그러하다. 내 주변에 사람들도 그러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들이 모두들 크고 작은 고민과 갈등으로 삶을 설계하고 삶을 유지하고 삶의 변화를 향해 손짓을 하기도 하고 손사래질을 하기도 하고 하지만 생은 어떻게든 이어지고 있다.
한스 기벤라트 누가 봐도 뛰어난 아이였다. .p.9
섬세하고 남다른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는 절대 모른 척 할 수 없다.
게다가 아버지는 엄마 없이 한스를 키우는 내면도 속물적인 사람이였으니 아버지는 한스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그런 한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한스가 아버지처럼 다분히 단순한 사고 구조를 가졌다면 한스는..그렇게 빨리 공부를 포기하지도 않았을테고 주변에 대한 고민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적게 했을지도 하는 맘도 들었다.
비상한 머리를 타고난 특별한 아이였던 한스..한스가 잘할 수 있는 공부에 매진하던 그에게는 늘 주변의 긍정적인 피드백이 많았다. 긍정적인 피드백이나 칭찬이 주는 힘이 대단하다는 것은 이미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한마디로 정의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 칭찬은 늘 숫자적으로 우위에 있는 이들에게만 빠른 적용이 되니 문제이다.
지난 일요일에 모 방송에서 연애인들과 수학여행을 간 아이들이 나왔는데 방송에서는 내내 전국 몇프로 안에 드는 상위권에 아이를 더 치켜세우는 듯 했다. 그걸 보더니.."상위 몇프로 아이가 중요하나봐 하길래 일등만 좋아하는 더러운 세상에 살고 있잖아 우리가" 했다.
한스는 공부에 지칠때면 산책을 했고 기나긴 학창 시절 동안 가장 아름다운 일은 낚시였다고 했다. 그러나 한스가 헤카돔베라는 어려운 시험을 거쳐 신학교에 입학을 해야 했기에 그는 그의 시간을 오롯이 공부에 몰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한스는 그 공부 자체를 힘들어 하지 만은 않은 듯 하다. 아마 공부를 잘해본 사람만이 알 수있는 성취감이나 희열감이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간 순간을 잘 이겨내면 내 삶은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리라는 기대감도 크기 때문이다.
그러던 한스가 신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하고 새로운 출발에 기대감도 크고 또 열심히 노력을 했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던져주는 수수께끼에 한스는 성공적인 경험이나 결과만이 아닌 혼돈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신학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정해놓은 규칙만을 이야기하고 그들이 해야하는 것만 하기를 바랄 뿐 학생들이 무수히 거치게 될 시행착오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그것이 백여년이 지난 현대의 학교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이 더욱 더 안타깝다.
아무도 공부가 아닌 다른 고민으로 힘들어 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와서 조언을 구하는 이는 현재에 학교에도 없는 것으로 안다. 나날이 시대를 변화하고 있다.
문명은 발달하여 모든 것이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으로도 다 가능한 시대가 온다고 난리 난리이지만 아이들을 들여다 보는 것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아이들이 공부외에 하는 고민은 사치이다. 그리고 대학가면 뭐든지 하라고도 한다.
한스도 그러하다. 한스가 성적이 좋을 때는 학교의 기대주였지만 한스가 성적이 떨어지니 한스에 대한 배려나 기대감으로 그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그에게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준다. 아무리 학생이라고 해도 한스가 공부하는 기계가 아닌 이상 분명히 그에게도 그를 의지할 사회적인 관계도 분명 필요로 한 것인데 감수성이 남다른 친구 하일너와의 교재조차도 성적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메세지를 보낸다.
요즘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로 <친구 잘못 만나면 평생 후회한다>는 것처럼 정말 한스의 공부에 대한 실패가 친구 하일너 때문이였을까? 생각해본다. 하일너를 만난 것은 한스의 인생에서는 큰 파장을 가져다 준 것은 확실하다. 왜냐면 개개인들이 가진 소양이나 생각은 무수히 다르고 어쩜 하나도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는 신기해하기도 한다.
이렇듯 학교마다 학칙과 자유로운 정신들 사이에서는 싸움이 끊이지 않고, 국가와 학교는 해마다 새로 올라오는 몇몇 깊고 뛰어난 어린 정신들을 뿌리째 꺾어 버리려고 기을 쓴다. p.140
그럼 모든 아이들이 학교나 사회가 정해놓은 룰에 꼭 맞추어져 살아야 하는가? 자유로운 영혼 하니 나의 둘째가 떠올랐고 나 조차도 참으로 자유롭다. 그럼 우리는 틀린건가?
100년전에는 그러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름이라는 것으로 서로를 인정해 주었음 한다. 그 다름이 다름이라는 하나의 정의이지 그것이 이상한 것이라거나 게으른 것이라거나 나쁜 것이라는 정의로 겹쳐지지 않는 것이 바램인데 아직도 세상은 일등만을 원한다.
한스가 지극히 세상에 대한 자기만의 시선이 강했던 하일너와 친구가 되었을까? 어쩜 한스는 한스가 잘하는 것만을 보고 잘하는 공부라는 대상이 인생의 중심축이였는데..하일너는 그렇게 공부에 매달리는 한스를 한심하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노력하지 않아도 가지고 있는 천재성으로 자기만의 세상에 당당했다. 그런 하일너가 자기와 달라 불편함도 느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꼭 공부나 공부 다음에 이어지는 성공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매진하던 공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고 방황하게 되었을 그 시절이 이어져버린게
아쉬운 현실로 남겨진다. 진정 헤세도 이러했을까?
그렇게 한스의 청춘의 우정의 상대인 하일너가 신학교를 떠나고 한스는 다시금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모든 것에 지쳐버린 것이다. 누구나 슬럼프는 있다.
강인한 자아를 내세워 이런 슬럼프쯤이야 하며 빠져나와야 진정 성공한 삶이지..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한스를 할 수 있었다. 나 또한 학창 시절의 초기에 공부에 대한 자신감으로 참 행복한 시작을 했으나 친구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고민 등으로 흐지부지 시간을 보내고 공부라는 것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으나 이미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구나 를 확실히 경험했다. 그런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피끓는 청춘의 고민을 무조건 잘못 됐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청춘의 시기가 공부를 하는 시기와 맞물러 있어서..이를 잘 이겨내는 청춘들이 있는가 하면 이곳에 걸려 넘어져서 힘들어 하는 이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리고 얼마 후 만나게 되는 사회에서의 간극은 정해진 운명과도 같다. 그리고 한스처럼 걸려서 넘어지는 이는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하고 실패자라는 이름으로 가두기도 한다.
그 어느 누구도 한스를 위로해 주지 않았고 그는 이때껏 자신의 가장 큰 장기이자 특기였던 공부를 버리고 나니 그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희망 따위는 없었다.이제 그의 삶이라는 것은 반짝반짝하는 햇살이 가득한 삶이 아닌 그냥 생의 연속이였다.
그렇게 삶을 그를 수레바퀴에 깔려 버렸다. 이제 한스의 삶은 어떠할까? 어떠해야 하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뒷부분에서는 뭔가 강력한 반전이 나오기도 바랬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허망하게 강물에 발을 헛디뎠을 때 아차 하는 맘도 들었다.
아마 작가는 한스의 죽음이라는 결말로 한스의 삶을 불쌍하게만 여기라는 뜻은 아니리라 생각해보았다. 삶은 그러하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는 듯 했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치열하게 높은 곳을 향해 열망하고 그 곳을 바라보지만 그 곳에 서 있는 내가 되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고 그리고 그것은 책상에 앉아서 책만 판다고 오는 그런 당연한 것
이 아니라고 무엇보다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기도 하고 누군가와 다름을 이야기 하기도 하고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보듬는 것도 가르치는 세상이 앞으로 100년후에는 되어있을지는 예측 불가능이다.
다만 이 책을 놓으면서 이 책을 반복하고 읽으면서 이 책에 대해서 곱씹어보면서 생각했다. 이 책이 작가 헤세의 자전적인 소설로써 책속의 한스는 죽었지만 헤세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어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는 것이 잠시나마 씁쓸한 위로가 되었다.
나에게도 이제 청춘이라는 혼돈과 방황이 마구 잡이로 공격하는 시기를 맞이 할 아이들이 셋이나 있다. 분명 나도 나의 세 아이에게 기대가 크다. 아마 좋은 성적을 받아 오면 한스의 아버지처럼 어깨가 으쓱할 것이고 누구던지 그런 쪽으로 사회적인 성공도 한다면 더욱 좋겠지 한다. 아마도 나의 아들 딸들이 한스처럼 똑똑하다가 어떤 친구를 만나 변화하고 심약해져서 세상과 담을 쌓
아버리거나 한다면 나는 그 아이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위로하고 보다듬기만 할까? 아님 그들의 나약함을 탓하면서 그들이 부족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만 할까?
잠시나마 생각한다. 아마 고전을 읽는 이유..고전을 읽었다면..나는 옳은 것와 옳지 않은 것을 분명히 자각해야 하며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분명 너의 인생의 마차의 주인이 너이고 그 마차는 어쩜 바퀴아래에 걸린 수많은 장애물을 치워가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차가 잠시 쉬더라도 너 자신이 부단히 끄는 것임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