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작가가 하는 이야기에 빨려들고 만다. 이렇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 표면 아래 깊이있는 층위의 레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근래 발표되는 깔끔하고 세련된, 호텔침구 같다고 표현했던 그의 작품들보다 약간은 투박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 있어 좋다. 특히 뒷부분의 뭔가 여기저기 늘어놓는 듯한 마무리는 요즘의 그의 작품에선 잘 찾아보기 힘든 결말 방식이라 흥미롭기도 하고.
뒷부분에 역자가 재밌는 말을 하더라. 하루키가 보통은 자신의 나이대로 주인공을 설정하는데 이 책에선 25세로 낮추면서 주인공의 영역을 확장했다고-
나의 의견을 말하자면 여기 이 주인공도 물론 하루키 자신처럼 느껴진다. 다이나믹하고 다채로운 색깔을 가진 스미레와 뮤에 비해, 무색무취의 평범남으로 자신을 표현하지만, 바깥의 제 3자를 이용해 글만으론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장점을 슬쩍 덧붙이는 표현방식은, 조금은 약하다하더라도 늘, 항상,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진행된다. 모두에게 인기있는 타입은 아니지만, 자신은 잘 모르겠는 자신의 어떤 매력때문에 어쩐일인지 여자는 늘 따르고 그 여자들과 육체적인 관계는 갖지만 정신적으로 교류하는 일은 없다, 는 설정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왜 그렇게 자신이 인기있는 타입이냐 아니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주인공으로서 자신을 소개할 때 '인기'는 빠지지 않는 항목이다.) 자신에서 완전히 분리된 배경의 남자로서 (젊은데다 키도 크고) 설정된 주인공이지만 그 자신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본다.
재밌는 점은 여자주인공인 스미레 또한 작가의 극단적인 곳에 있는 파편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창작자로서의 에너지와 고뇌의 현신이라고나 할까. 그는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온통 사로잡혀 있다가 뮤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가 제안하는 '일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받아들인다. 뮤는 스미레의 자유로운 창작을 방해하는 일상의 굴레이자, 결국 스미레가 각성하고 저 너머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게끔 폭발의 원인을 제공하는 인화제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 스미레는 '저 쪽', 하루키가 사랑해 마지 않는 '저 쪽' 세상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지금 여기와 거의 같다고 할 만큼 비슷하지만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그 곳. 또다른 내가 지금의 나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곳. 이때부터 이미 작가는 이 쪽과 저 쪽에 대해 깊게 사로잡혀서, 종국엔 <1Q84>같은 걸 써버렸구나. 아무튼 스미레는 저 쪽 세상에서 페르디난도와 적극적으로 사랑을 나눈 경험이 있는 뮤와 행복한 연인관계를 이루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창작자로서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면서, 주인공과 닿을 수 있는 중간세계의 공중전화를 찾은게 아닐까. 뮤와 대조적으로 '나'는 그녀를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약간은 괴짜였던 창작자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존재였으니까.
하루키의 책들 중에서 나를 충격과 혼란에 빠뜨렸던 상실의 시대 다음으로, 나는 이 책을 꼽을 것 같다. 흥미로운 소재와 깊이있는 주제에 작가의 에너지가 좀 더 날 것으로 생생하게 와닿는 느낌이 좋다. 무슨 생각으로 여행길에 이 책을 골랐을까. 비행기 안에서 이미 절반을 읽어버려 남은 날 동안은 뭘 봐야 하나 초조하게 만들어 버렸다.
2015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