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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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축복받은 집>을 읽었을 땐 배경이나 등장인물이 작가의 인생과 상당히 겹치는데도 어쩌면 이렇게 객관적일 수 있을까 싶었다. <그저 좋은 사람>에서는 한발짝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아마도 가장 강렬한 2부 속 세 편의 단편이 상당 부분 1인칭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늘 옆집 사는 사람들, 내가 아는 누군가가 겪은 일을 들려주는 듯 하던 작가의 목소리가 주인공의 목소리와 겹쳐지면서 뭔가 다른 분위기를 낸다. <축복받은 집>에선 레이먼드 카버가 연상되었었는데 이건 좀 다르다. 좀 더 맨살을 드러낸 느낌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나는 <축복받은 집>이나 <그저 좋은 사람>의 1부에서의 서늘하고도 객관적인 시선이 더 좋은 것 같다. 특별한 서사보다는 오히려 일상이나 삶의 연대기를 통해 인간과 가족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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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에트가르 케레트 지음, 장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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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다분히 주관적인데다 나름의 유행이 있어서, 문학 속에서 발견되는 것에 약간 회의적인 편이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보통 소설가들이 글 속에서 '이것은 유머입니다' 하고 사용하는 것들이 나에겐 그다지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번뜩이지만 호감이 가지 않거나, 재미를 느끼기에는 너무 무겁거나, 오직 재미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아쉽거나. 소개팅하는 남자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처럼 어떤 설명도 필요없이 단박에 알아차려 버리는 것이다. 이 유머가 나에게서 웃음을 유발해낼 수 있는지 아닌지를 말이다. 이 얼마나 사적이고 억지스럽고 불가해한가. 이 책이 유머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 아주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데이트 상대를 만난 기분이다. 그가 표현해내는 블랙 코메디들은 밸런스가 아주 좋아서 부드럽게 넘어가면서도 상당한 깊이가 느껴진다.


250페이지 정도되는 책 한 권에 서른 여섯개의 적지 않은 수의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이야기 하나에 10페이지가 넘지 않는 것이 대다수일 정도로 길이가 짧은 편이다. 어떤 글은 (앞선 이야기에 이어진다고는 하지만) 달랑 한 줄 뿐이기도 하다. 그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반복되거나 겹쳐지는 내용이 거의 없다는 것이 놀랍다. 종종 펼쳐지는 초현실적인 상황에서도 지극히 인간적인(그러니까 지극히 어리석고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들이 농담처럼 독자를 웃기는 한편, 저만치 놓여있던 이야기를 성큼 내 안으로 들여다 놓는다. 나 또한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간이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 인간이기에 그의 실존에 대한 통찰력에 그저 공감할 수 밖에 없다.




평행우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곳과 평행하는 우주가 무수히 존재하며 그 각각의 우주는 조금씩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 그 중에는 당신이 태어나지 않은 우주도 있고, 태어나기를 원치 않을 우주도 있다. 내가 말과 섹스하는 평행우주도 있고 로또에 당첨된 평행우주도 있다. 내가 침실 바닥에 누워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우주도 있고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된 우주도 있다. 나는 지금 그런 평행우주 중 어디에도 관심이 없다. 내 흥미를 끄는 우주는 오로지 그녀가 잘생긴 어린 남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는 곳. 그녀가 완전히 혼자인 곳뿐이다. 많은 우주가 그럴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그 우주들을 생각해본다. 그중에는 우리가 만나지 못한 우주들도 있다. 그런 우주는 됐다. 남은 우주 중 몇몇에서는 그녀가 날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가 싫다고 말한다. 상냥하게 거절하는 곳도 있고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거절하는 곳도 있다. 둘 다 지금은 됐다. 이제 그녀가 내게 좋다고 말하는 우주들만 남고, 나는 청과상에서 과일을 고르듯 그중 하나를 골라잡는다. 제일 잘 익었고, 제일 달고 제일 좋아 보이는 것으로.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완벽한 날씨에, 우리가 숲속 작은 오두막집에 사는 우주다. 그녀는 집에서 자동차로 사십 분 거리에 있는 도시의 도서관에서, 나는 도서관 맞은편 건물의 지방의회 교육부에서 일한다. 우리는 항상 점심을 같이 먹는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그 우주로 갈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이라도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가는 길을 찾아낼 때까지는 생각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 숲 한가운데서 사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그녀와 함께, 완벽한 행복 속에서.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평행우주가 있다. 그중 한 우주에서 나는 말과 섹스하고 있고, 다른 우주에서는 로또에 당첨된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오로지 그곳, 숲속의 오두막집만 생각하고 싶다. 내가 손목을 긋고 피를 흘리며 침실 바닥에 쓰러진 우주가 있다. 끝날 때까지는 살 수밖에 없는 우주다. 지금은 그곳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냥 저 다른 우주를 생각하고 싶다. 숲속의 오두막집. 해가 지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침대에 놓인 내 오른팔은 칼에 베이지 않은데다 보송보송하다. 그 팔을 베고 그녀가 누웠고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있다. 그녀가 팔베개를 하고 누운 지 아주 오래라 팔에 거의 감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꼼짝하지 않는다. 그렇게 팔 위로 그녀의 따뜻한 몸을 느끼고 있는 것이 좋고 팔에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계속 좋아할 것이다. 내 얼굴에 그녀의 숨결이 와 닿는다- 리드미컬하고 규칙적이고 끝이 없는 호흡. 이제 차츰 눈이 감긴다. 이 우주, 숲속, 침대에서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다른 우주들에서도. 나는 어떤 장소를 알고 있어 기쁘다. 숲 한가운데, 내가 행복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곳을.

p.208-210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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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와 여가
제임스 설터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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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깃털처럼 가벼운 문장들이 나부끼는걸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묘사는 직관적이고 날카롭고 매우 감각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생생한 문장들이 작가가 표현하지 않은 것들까지 상상하게 한다. 수면위를 떠다니는 듯 하기도 하고,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들을 놓치지 않고 싶어서 함부로 쉽게 읽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사뿐사뿐 금방 읽히는 책인데도.


최근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하다고 느꼈다. 어떤 감각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책을 손에서 잠시 내려 놓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올해가 다갔다.
내가 피곤하든 어떻든간에 좋은 책은 좋다. 이렇게만 둘 수 없어서 억지로나마 다시 책을 읽고나서 내린 결론이다. 섹시한 커플의 쓸쓸한, 하룻밤 꿈같은 사랑이야기. 영웅이 남아있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듯이, 이들의 다시없을 사랑이야기도 관찰자인 화자에 의해 신중하게 걸러지고 아름답게 진열된다. 직접 겪거나 모든걸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더 완벽해지면서.


아침 식사를 주문하는 그녀의 좁고 차가운 등. 음식을 가져온 웨이터는 침대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웨이터가 가자 그녀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나와 여전히 알몸인 채로 식사를 준비한다. 조용한 빛 속에서 그녀는 하녀처럼 기민하게 크루아상을 벌리고 버터를 고르게 발라 다시 접시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는다. 그녀의 살이 빛난다. 그를 끌어당긴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마치 아이처럼 그녀가 웃어주기를, 그에게 음식을 맛보여주기를 기다린다. 자신은 주위를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것 같고, 그녀는 몹시 바쁘고 차분한 것처럼 느낀다. 그녀가 콩피튀르(잼) 병을 연다. 여기 좀 발라줘, 말하고 싶다.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고 싶다. 그녀의 팔꿈치에 입 맞춘다. 그녀가 그를 힐긋 보며 미소를 짓는다.
조용한 일요일 아침 스타니슬라스 광장. 순수한 빛에 둘러싸인 낭시의 고요함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음울한 가을날 그녀는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집을 떠나 정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혼자였다. 추웠던 그해 겨울, 돌처럼 완강하고 눈 많던 겨울 지붕을 따라 햇빛 속에서 번쩍이던 얼음. 그녀는 그것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수태된 어느 겨울.
p.94-95

그가 튕겨지듯 몸을 일으킨다. 돈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듣자 식욕이 되살아난 모양이다. 우리는 텅 빈 거리를 따라 샹 호텔 쪽으로 걸어 내려간다. 오툉은 조용하지만 그곳의 고요는 늙은 여자의 잠과 같다. 자면서도 온갖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오툉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도 볼 줄 안다.
마을 깊숙한 곳 다른 건물들에 묻힌 -사람들이 지나쳐버리는 고양이들만 아는 골목길들이 있다- 방, 나무들, 검은 잎사귀들, 신비로운 향기, 나뭇가지들의 움직임, 그 위에 있는 방, 저녁의 서늘한 외기로 가득 찬 그 방 안에서 그녀가 자고 있다. 입을 살짝 벌리고 하얀 두 팔을 떨어뜨린 채. 아르무아르(옷장)의 니스로 마감된 오렌지색 문들은 닫혀 있고, 개수대 옆에는 수건 한 장이 널려 있다. 그녀의 칫솔-나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볍게 건드려본다-은 물기가 말랐다. 바닥에는 옷가지들이 떨어져 있다. 그녀의 신발, 너부러진 스타킹이 보인다. 마침내 나는 자고 있는 그녀에게 눈길을 던진다. 심장에서 피가 빠져나간다. 그녀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 눈의 순수한, 신선한 흰 빛, 그 푸른 흰 빛-그것이 나를 포착한다.
p.243


작가가 지어내는 감탄스러운 문장이 빛을 투과해 여러 빛깔을 내는 프리즘처럼 눈부시고 아름답다.
더 많은 문장을 옮기고 싶지만 수위가 좀 높아서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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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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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스토너보다 더 나은 책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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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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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작가가 하는 이야기에 빨려들고 만다. 이렇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 표면 아래 깊이있는 층위의 레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근래 발표되는 깔끔하고 세련된, 호텔침구 같다고 표현했던 그의 작품들보다 약간은 투박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 있어 좋다. 특히 뒷부분의 뭔가 여기저기 늘어놓는 듯한 마무리는 요즘의 그의 작품에선 잘 찾아보기 힘든 결말 방식이라 흥미롭기도 하고.


뒷부분에 역자가 재밌는 말을 하더라. 하루키가 보통은 자신의 나이대로 주인공을 설정하는데 이 책에선 25세로 낮추면서 주인공의 영역을 확장했다고-

나의 의견을 말하자면 여기 이 주인공도 물론 하루키 자신처럼 느껴진다. 다이나믹하고 다채로운 색깔을 가진 스미레와 뮤에 비해, 무색무취의 평범남으로 자신을 표현하지만, 바깥의 제 3자를 이용해 글만으론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장점을 슬쩍 덧붙이는 표현방식은, 조금은 약하다하더라도 늘, 항상,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진행된다. 모두에게 인기있는 타입은 아니지만, 자신은 잘 모르겠는 자신의 어떤 매력때문에 어쩐일인지 여자는 늘 따르고 그 여자들과 육체적인 관계는 갖지만 정신적으로 교류하는 일은 없다, 는 설정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왜 그렇게 자신이 인기있는 타입이냐 아니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주인공으로서 자신을 소개할 때 '인기'는 빠지지 않는 항목이다.) 자신에서 완전히 분리된 배경의 남자로서 (젊은데다 키도 크고) 설정된 주인공이지만 그 자신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본다.


재밌는 점은 여자주인공인 스미레 또한 작가의 극단적인 곳에 있는 파편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창작자로서의 에너지와 고뇌의 현신이라고나 할까. 그는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온통 사로잡혀 있다가 뮤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가 제안하는 '일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받아들인다. 뮤는 스미레의 자유로운 창작을 방해하는 일상의 굴레이자, 결국 스미레가 각성하고 저 너머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게끔 폭발의 원인을 제공하는 인화제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 스미레는 '저 쪽', 하루키가 사랑해 마지 않는 '저 쪽' 세상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지금 여기와 거의 같다고 할 만큼 비슷하지만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그 곳. 또다른 내가 지금의 나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곳. 이때부터 이미 작가는 이 쪽과 저 쪽에 대해 깊게 사로잡혀서, 종국엔 <1Q84>같은 걸 써버렸구나. 아무튼 스미레는 저 쪽 세상에서 페르디난도와 적극적으로 사랑을 나눈 경험이 있는 뮤와 행복한 연인관계를 이루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창작자로서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면서, 주인공과 닿을 수 있는 중간세계의 공중전화를 찾은게 아닐까. 뮤와 대조적으로 '나'는 그녀를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약간은 괴짜였던 창작자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존재였으니까.


하루키의 책들 중에서 나를 충격과 혼란에 빠뜨렸던 상실의 시대 다음으로, 나는 이 책을 꼽을 것 같다. 흥미로운 소재와 깊이있는 주제에 작가의 에너지가 좀 더 날 것으로 생생하게 와닿는 느낌이 좋다. 무슨 생각으로 여행길에 이 책을 골랐을까. 비행기 안에서 이미 절반을 읽어버려 남은 날 동안은 뭘 봐야 하나 초조하게 만들어 버렸다.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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