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에트가르 케레트 지음, 장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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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다분히 주관적인데다 나름의 유행이 있어서, 문학 속에서 발견되는 것에 약간 회의적인 편이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보통 소설가들이 글 속에서 '이것은 유머입니다' 하고 사용하는 것들이 나에겐 그다지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번뜩이지만 호감이 가지 않거나, 재미를 느끼기에는 너무 무겁거나, 오직 재미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아쉽거나. 소개팅하는 남자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처럼 어떤 설명도 필요없이 단박에 알아차려 버리는 것이다. 이 유머가 나에게서 웃음을 유발해낼 수 있는지 아닌지를 말이다. 이 얼마나 사적이고 억지스럽고 불가해한가. 이 책이 유머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 아주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데이트 상대를 만난 기분이다. 그가 표현해내는 블랙 코메디들은 밸런스가 아주 좋아서 부드럽게 넘어가면서도 상당한 깊이가 느껴진다.


250페이지 정도되는 책 한 권에 서른 여섯개의 적지 않은 수의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이야기 하나에 10페이지가 넘지 않는 것이 대다수일 정도로 길이가 짧은 편이다. 어떤 글은 (앞선 이야기에 이어진다고는 하지만) 달랑 한 줄 뿐이기도 하다. 그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반복되거나 겹쳐지는 내용이 거의 없다는 것이 놀랍다. 종종 펼쳐지는 초현실적인 상황에서도 지극히 인간적인(그러니까 지극히 어리석고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들이 농담처럼 독자를 웃기는 한편, 저만치 놓여있던 이야기를 성큼 내 안으로 들여다 놓는다. 나 또한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간이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 인간이기에 그의 실존에 대한 통찰력에 그저 공감할 수 밖에 없다.




평행우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곳과 평행하는 우주가 무수히 존재하며 그 각각의 우주는 조금씩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 그 중에는 당신이 태어나지 않은 우주도 있고, 태어나기를 원치 않을 우주도 있다. 내가 말과 섹스하는 평행우주도 있고 로또에 당첨된 평행우주도 있다. 내가 침실 바닥에 누워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우주도 있고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된 우주도 있다. 나는 지금 그런 평행우주 중 어디에도 관심이 없다. 내 흥미를 끄는 우주는 오로지 그녀가 잘생긴 어린 남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는 곳. 그녀가 완전히 혼자인 곳뿐이다. 많은 우주가 그럴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그 우주들을 생각해본다. 그중에는 우리가 만나지 못한 우주들도 있다. 그런 우주는 됐다. 남은 우주 중 몇몇에서는 그녀가 날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가 싫다고 말한다. 상냥하게 거절하는 곳도 있고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거절하는 곳도 있다. 둘 다 지금은 됐다. 이제 그녀가 내게 좋다고 말하는 우주들만 남고, 나는 청과상에서 과일을 고르듯 그중 하나를 골라잡는다. 제일 잘 익었고, 제일 달고 제일 좋아 보이는 것으로.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완벽한 날씨에, 우리가 숲속 작은 오두막집에 사는 우주다. 그녀는 집에서 자동차로 사십 분 거리에 있는 도시의 도서관에서, 나는 도서관 맞은편 건물의 지방의회 교육부에서 일한다. 우리는 항상 점심을 같이 먹는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그 우주로 갈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이라도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가는 길을 찾아낼 때까지는 생각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 숲 한가운데서 사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그녀와 함께, 완벽한 행복 속에서.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평행우주가 있다. 그중 한 우주에서 나는 말과 섹스하고 있고, 다른 우주에서는 로또에 당첨된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오로지 그곳, 숲속의 오두막집만 생각하고 싶다. 내가 손목을 긋고 피를 흘리며 침실 바닥에 쓰러진 우주가 있다. 끝날 때까지는 살 수밖에 없는 우주다. 지금은 그곳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냥 저 다른 우주를 생각하고 싶다. 숲속의 오두막집. 해가 지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침대에 놓인 내 오른팔은 칼에 베이지 않은데다 보송보송하다. 그 팔을 베고 그녀가 누웠고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있다. 그녀가 팔베개를 하고 누운 지 아주 오래라 팔에 거의 감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꼼짝하지 않는다. 그렇게 팔 위로 그녀의 따뜻한 몸을 느끼고 있는 것이 좋고 팔에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계속 좋아할 것이다. 내 얼굴에 그녀의 숨결이 와 닿는다- 리드미컬하고 규칙적이고 끝이 없는 호흡. 이제 차츰 눈이 감긴다. 이 우주, 숲속, 침대에서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다른 우주들에서도. 나는 어떤 장소를 알고 있어 기쁘다. 숲 한가운데, 내가 행복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곳을.

p.208-210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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