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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집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쓰는 것이 내게는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글자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헤매이는 것은 좋지만, 무작정 따라갔던 그 좁은 골목길들 사이에서 '내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나의 지난 발걸음을 되새겨 보지만 안개 자욱한 새벽길을 지나온 것처럼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느낌에 상응하는 올바른 단어와 문장을 찾는 것이 어렵고, 제대로 나열하는 것은 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생각을 적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생각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을 언어화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생각은 단어이기도 하고 이미지이기도 하고 소리나 냄새이기도 하다. 하나의 생각이 제대로 닫히기도 전에 전혀 다른 생각의 문이 불쑥 다른 곳에서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어떤 일련의 생각에 매달려 있다면, 그 사람이 주구장창 그 생각만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그걸 문자화하는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쉼표로 이어진 파트마의 생각들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렇게 느꼈다. 생각은 쉴 새 없이 머리 속 빈 공간을 파고든다. 파트마 할머니가 하루종일 매달려 생각하는 것은 과거이다. 과거 남편과의 대화, 사실 대화라기 보단 남편의 일방적인 일장연설에 가깝지만.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남편이 했던 말들과 생각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당시에 하지 못했던 말과 지금 하고 싶은 말을 쉬지 않는 쉼표로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할머니가 입밖으로 꺼내는 말은 신경질적으로 누군가를 찾거나 화를 내는 일 뿐이다. 하루종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할머니의 머릿속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과거를 품은 현재의 생각들로 가득한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 수록 더 깊이 과거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웃는다. 노인들은 정말 이상해, 그들은 웃는다, 할머니, 잘 지냈어요, 그들은 웃는다, 텔레비전이 뭔지 알아요, 그들은 웃는다, 왜 아래층으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아요, 그들은 웃는다, 재봉틀이 정말 멋져요, 그들은 웃는다, 페달도 있네요, 그들은 웃는다, 왜 주무실 때 지팡이를 침대로 가져가세요, 그들은 웃는다, 차 타고 바람 쐬러 갈까요, 그들은 웃는다, 모닝 가운 자수가 정말 예쁘네요, 그들은 웃는다, 선거에서 왜 투표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웃는다, 왜 만날 장롱을 뒤지세요, 그들은 웃는다, 왜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웃니, 라고 하면, 그들은 또 웃는다, 웃는다, 우린 웃지 않는데요, 할머니! 라고들 한다. 그러고는 또 웃는다. 어쩌면 아이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평생 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착잡했다.
-1권, p.225
하지만 나는 열다섯 살 때도 그렇게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무언가를 기다리곤 했다. 마차에 실려 흔들거리며 돌아다닐 것을, 피아노 칠 것을, 이모 딸들이 올 것을, 그리고 왔던 사람들이 돌아갈 것을, 음식을 먹을 것을, 음식을 먹을 때는 일어날 일을 그리고 이 모든 기다림을 끝내 줄 더 깊은 기다림을,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것들을, 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후 구십 년이 지나자, 수백 개의 작은 수도꼭지에서 대리석 우물로 모이는 맑고 깨끗한 물처럼, 모든 것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덥고 잔잔한 여름밤의 정적 속에서 우물의 서늘함에 몸을 가까이 가져가면, 그것에서 나 자신을 보고, 내가 나 자신만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 더럽혀지지 않도록, 맑고 깨끗한 물 위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나는 공중으로 나 자신을 불고 싶었다. 나는 작고 가녀린 여자애였다.
-1권, p.232-233
과학과 이성을 신봉하는 파트마의 남편 셀라하틴이 생전 파트마에게 설파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파트마, 내 말을 주의깊게 들어! 화내지 말고, 알았지? 신이 없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왜냐하면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신의 존재를 기초로 하는 종교는 모두 공허한 시적인 지껄임에 지나지 않아. 그러면 그 지껄임이 설명하는 천국도 지옥도 물론 없어.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그러면 죽음 이후의 삶도 없어. 내 말 잘 듣고 있는 거지, 파트마? 죽음 이후에 삶이 없다면 죽은 자들의 삶은 전적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 이 상황을, 이번에는 주검의 관점에서 한번 살펴보자고. 죽음 이전에 살던 주검은, 죽음 이후에 어디에 있지? 육체에 대한 얘기가 아냐. 의식, 감정, 이성으로서 지금 그는 어디에 있지? 그 어떤 곳에도 없어, 그렇지 않아, 파트마? 존재하지 않는 것 안에 있어, 내가 '무'라고 했던 것에 파묻혀 있어. 이제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아. 이제 이해했어, 파트마, 내가 '무'라고 했던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생각할수록 난 공포에 휩싸여, 난. 하느님, 얼마나 기이하고, 얼마나 소름끼치는 생각인지! 눈앞에 떠올려 보면 오싹해! 당신도 생각해 봐, 파트마, 안에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것을 한번 생각해 봐. 소리도, 색깔도, 냄새도, 감촉도 없고, 그 어떤 특징도 없고, 장소도 없는 공간을 생각해 봐, 파트마. 공간도 차지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무언가를 떠올릴 수 없지, 그렇지? 얼마나 칠흑 같은 어둠인지, 처음과 끝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건 인지하지도 못해! 죽음이라는 것은 이것보다 더 어두워, '무'는 이것보다 더 너머에 있고! 두려운거야, 파트마? 우리의 시체가 역겹고 차가운 땅의 고요 속에서 썩고 있을 때, 내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전사자들의 몸, 산산조각이 난 두개골 그리고 땅에 흩어진 뇌, 흘러내리는 눈과 피범벅으로 찢어진 입이 콘크리트 위에서 썩고 있을 때, 아, 그들의 의식은, 우리의 의식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무'의 어둠속에 파묻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 밑으로 머리를 아래로 한 채 등을 보이며 영원히 추락할 때 자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장님처럼, 아냐, 이보다 더 너머에 있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것. 빌어먹을, 이러한 것들이 떠오를수록 공포에 휩싸이고, 죽고 싶지 않아. 죽는다는 생각이 들면 저항하고 싶어, 하느님, 얼마나 큰 좌절감을 주는지, 계속해서 영원의 어둠 속에 파묻히면서 처음과 끝이 없을거라는 것을, 단지 어둠 속에서, 다시는 절대, 절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사라져 간다는 걸 안다는 것. 파트마, 우리는 모두 '무'속으로 침몰할 거야. 소멸은 우리를 끝까지 채울 거야. 두렵지 않아,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당신은 두려워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자각해야만 해, 반란자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당신 마음속에 일어나기 전에는 오늘 밤 당신을 놔주지 않을 거야. 들어 봐, 들어 봐, 천국은 없어, 지옥도 없고, 당신을 주시하고, 보호하고, 벌을 주고, 용서할 그 누구도 없어. 죽음 이후에 당신은 아무도 없는 '무'속으로,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어두운 바다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내려갈 거야. 되돌아올 수 없고, 아무도 없는 고요 속에서 질식할 거야. 당신의 시체가 차가운 땅속에서 썩을 때, 두개골과 입은 화분처럼 흙으로 찰 것이고, 살은 마른 거름 조각처럼 떨어져 나와 흩어져 버릴 것이고, 해골은 석탄 조각처럼 가루가 될 것이며,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권리조차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당신을 녹여 없애 버릴 역겨운 늪으로 들어갈 것이고, '무'의 무자비하고 얼음 같은 진흙 속에서 홀로 사라져 갈 거야, 파트마, 이해해?"
-2권, p.211-213
파트마의 손자 손녀가 겪는 사랑의 소용돌이는 파트마의 과거로 침전하는 내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젊은이들은 이념간의 대립과 성장의 고통을 동시에 겪으면서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눈 앞의 사랑에 빠져든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하지만 단어들은 추하고 게대가 절망적이었다. 텅 비어 있었다. 한 번 더 말했다. 그런 후 갑자기 나의 머리는 그녀의 품에 있는 손 위로 떨어졌다.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리는 그녀의 손에 몇 번 급하게, 마치 뭔가를 놓칠까 두려운 듯 입을 맞췄다. 그리고 또다시 텅 비어 있고 추한 단어들을 빠르게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내 손으로 감쌌다. 손 위의 짠 맛이 땀인지 눈물인지 알지 못해 절망과 패배감에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몇 번 더 입을 맞추고, 그 의미 없는 단어들을 중얼거린 수 절망감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깨끗한 공기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2권, p.128
...여자들은 때로 나를 두렵게 한다. 그녀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내가 알 수 없는 어두운 생각들이 있는 것 같다. 그녀들의 어떤 부분은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지, 한번 휩쓸려 가면 재앙이 온다. 죽음 같은 것이다, 하지만 머리에 푸른 리본을 달고 미소도 짓는다, 창녀! 하늘이 멀리서 샛노랗게 발아지자, 번개가 무서웠다. 구름, 어두운 폭푸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의 노예인 것 같다, 때로 우리는 잠시 멈춰서 반항하려 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두려워한다. 번개를, 천둥을, 미지의 먼 재앙을 우리 위에 던진다. 그럴 때면 나는 우리 집 조용한 불빛 아래서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죄악이 두렵다! 나의 가련한 복권 장수 아버지처럼.
-2권,p.151
마침내 비가 그치자, 내가 그들도, 다른 사람들도 아니라 계속 너를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닐귄! 너는 침대에 누워 있겠지, 어쩌면 빗소리에 깨어났을 수도 있고, 창밖을 바라보며, 천둥이 칠 때마다 몸서리치며 생각에 잠기겠지. 아침에 비가 그치고 해가 뜨면 해번에 나오겠지, 너를 기다릴게, 마침내 너는 나를 볼 것이고, 우리는 이야기를 할 것이고, 나는 말하고 또 말하겠지. 긴, 아주 긴 이야기. 인생. 널 사랑해.
-2권,p.153
마침내 너는 나를 볼 것이고, 우리는 이야기를 할 것이고, 나는 말하고 또 말하겠지. 긴, 아주 긴 이야기. 인생. 널 사랑해.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