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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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지 꽤 되었는데 어쩐지 리뷰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빨간책방의 애청자로서 출간되고 얼마 안되어 구입해 읽었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소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종류라 함은 그러니까 상상력의 세계이자 재치의 세계, 혹은 사건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사람의 미묘한 감정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바깥의 공기가 더 짙은 이야기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겉으로 보여지는 것 아래로 더 깊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층층이 쌓여있다 해도, 세상에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는 이야기엔 기본적으로 마음이 동하지 않는 면이 있다. 분명 그들의 직업도, 겪고 있는 일도 특이하고 흥미로운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걸 겪고 있는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너무 가볍거나 쿨하게 느껴져서 그들의 마음의 진동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뭐랄까 인물들과 나 사이에 어쩌지 못할 두꺼운 벽이 있는 듯하달까. 그 벽은 투명해서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볼 수는 있지만, 그 너머의 세계는 내가 절대 다다를 수 없는, 단지 나와 같은 언어를 공유할 뿐인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느낌이다. 그 안에서 인물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듯 해서 아 참 재밌게들 사네, 싶기는 해도 나라면 어땠을까, 에 대입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화려한 배경장치들이 사실은 꽤나 무용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 김중혁 소설의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크레파스로 쓱쓱 그린 듯 투박한 인물들이 내가 알고 있는 세상과 비슷하지만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어떤 재밌는 일을 겪으면서 벌어지는 일들, 그 바로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들이 숨어 있다. 이야기들은 그렇게 흥미롭고도 가벼운 템포로 흘러가는 듯 보이다가 마지막에선 작가에게 늘 한방 먹게 된다. 반전같은게 있다는게 아니라, 결말이 강렬하게 남는다는 의미에서. 시종일관 유유히 흘러다가 마지막에 무심하게 던지는 무게가 꽤 나가는 문장들이 있어 그의 단편들을 나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부드럽고도 가차없이 마무리한다는 느낌이다. 그런면에서는 카버의 소설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식으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송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신음을 내뱉으면서 차양준을 보고 있었다. 차양준은 고개를 돌려야 할지 계속 보고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송미가 차양준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차양준은 자신의 머릿속 한 부분이 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흐릿하고 커다랗던 하얀색은 조금씩 작아지더니 단단하게 응축되었다. 차양준은 송미의 탁구공이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탁구공은 격렬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똑, 딱, 똑, 딱, 규칙적으로 움직이다가 머리에서 뒷덜미를 타고 내려와 차양준의 심장 속으로 들어갔다. 차양준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처럼 탁구공이 손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차양준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p.44 <상황과 비율>


미요의 자동차가 떠나고 난 후, 용철은 생각보다 가방이 가벼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빠져나간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미요가 무언가 빼낸 것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가방 속에 든 무언가를 용철이 직접 버렸을지도 몰랐다. 기억나지 않는 일들이었다. 뭐가 없어졌기에 가방이 가벼워졌을까. 착각일지도 모른다. 가방 안은 그대로일 것이다. 용철은 가방을 들고 손목을 까딱거려 보았다. 가방 속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정확하게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가방을 열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다.
p.198 <종이 위의 욕조>


​음, 그의 소설은 역시 결말이 절정이나 다름없는데, 이건 상당한 스포일러인가...?
그러나 그 무게감이란게 이야기의 흐름을 타고 앞에서부터 와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일테니까.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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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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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일본인이라는 특수한 민족성에 상당히 기대어 존재하고 있다. 사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아내가 가해자인 남편을 죽인다는 설정은 별로 특이한 소재는 아니다. 아홉시뉴스만 봐도 간혹 나오는 이야기니까. 다만 일본인의 어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이 이야기는 조금 더 활력을 얻고 조금 더 극적으로 느껴지면서, 500페이지에 가까운 두꺼운 책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케미와 린류키라는 중국인들에게서 도움을 받게 되는데, 이건 중국인은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주인공들이 중국인에게 받게 되는 도움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일본인에게선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예를 들면 낯두꺼운 뻔뻔함과 이유를 묻지않는 무조건적인 의리 따위를 어떻게 일본인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까. 모두 한 사람을 제거하고 잡히지 않는데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지만 가나코는 지하철에서 치한에게 추행을 당해도 소리조차 못내며 꾹 참고 넘길게 뻔할, 지극히 일반적인 일본 여성이다. 나오미는 가정폭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공포인지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가나코에게 적극적으로 현재 상황에서 벗어날 것을 독려한다. 친구인 나오미의 격려 덕에 각성을 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된 가나코와 본인의 일도 아닌데 당사자보다 더욱 적극적이 되어 가해자 남편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몰두하는 나오미. 그녀가 남의 일에 이렇게 발벗고 나서는 것은 그녀 자신이 어렸을 적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가나코의 남편을 죽이는 행위는 나오미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마음 속에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폭력적인 아버지를 죽이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마음을 졸이게 되는 진짜 서스펜스는 남편의 죽음, 그 후 부터이다. 빈 틈이 거의 없었다고 생각했던 계획은 사실, (당연하게도)구멍 투성이였고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잠긴 남편의 본가 가족들이 발을 벗고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기 시작하면서 그 구멍들은 점점 더 크기가 커져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뒤늦게 구멍을 막아보려 해도 이미 손을 쓸 틈도 없이 벌어져 버려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이렇게 잡혀버리는 건가, 하는 긴장상태에 책장은 정신없이 넘어간다.


책을 꽤 천천히 보는 편인데도 토요일 하루동안 다 읽어버려서 일요일엔 무엇을 읽어야 할지 난감했다. 꽤 두꺼웠기에 주말은 이 한 권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이건 문장이 아니라 장면이다.

우선, 나오미가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어머니와 대화하는 장면.



 "그렇게 싫으면 아버지하고 이혼하지?"

 내친김에 말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안색이 싹 바뀐다.

 "그러니까 앞으로 함께 살 일이 걱정되잖아. 노후는 길어. 아버지도 앞으로 몇 년 있으면 지금 회사 역시 그만둬야 할 테고. 그렇게 되면 하루 종일 집에서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데. 내가 엄마 입장이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남은 인생, 계속 참고 살지, 내 마음대로 살지 그건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말하다 보니 나오미 본인이 괜히 초조하여,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하고 말았다.

 "이혼이라니, 네 아버지가 들어주지 않을걸."

 어머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들어주든 말든 결혼이라는 건 두 사람의 의사로 성립하는 거니까 엄마가 싫다면 그냥 이 집에서 나가도 돼."

 "집을 나가서 어디에서 살라고."

 "아파트든 연립주택이든 어디든 찾아서 들어가면 되잖아."

 "엄마, 돈 없어."

 "변호사를 고용하면 반드시 재산의 반은 받을 수 있어. 나는 엄마 편이 돼줄게."

 "그런...." 어머니가 할 말을 잃었다. 설마 딸한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듯 곤란한 모습이다.

.

.

.

 "엄마는 역시 자신 없어."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음, 그래? 어쨌든 엄마가 결정할 문제니까."

 "이웃도 있고, 친구도 많아. 와타나베 씨나 곤도 씨 모두 서로 돕고 살자고 예전부터 이야기했어. 그래서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단다."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공연히 어색해지기만 해서 나오미는 묵묵히 식사에 열중했다.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켜고 멍하니 바라봤다.

 "아버지 빨리 돌아가시는 편이 좋은데."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다 털어놓아서인지 나오미는 내뱉듯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와이드 쇼의 리포터가 탤런트 누구가 음주 운전으로 입건됐다고, 마치 테러릴스트라도 잡은 것처럼 요란을 떨었다.

 나오미는 아침식사를 마치는 대로 곧바로 도쿄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p.109-112



그리고 중국여성과 일본여성의 대조적인 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아케미와 나오미의 대화.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휘드르는 사람이라면 상하이에서는 어떻게 되나요?

 "보복합니다. 어쨌든 무사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케미는 화난 듯 목소리에 힘을 담아 대답했다.

 "아내가 보복하나요?"

 "본인이 할 수 없다면 부모 형제가 대신 보복해요. 예를 들어 만약 내가 남편한테 폭행을 당했고, 내 힘으로는 대항할 수 없는 상태라면 큰오빠가 캐나다에서 달려와 처리해줄 거예요."

 "굳이 캐나다에서 와서요?"

 "당연하죠. 그럴 때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가족이라고 하겠어요? 가족이 없다면 가까운 친구가 도와주죠. 그게 우정입니다. 아닌가요?"

 아케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일본 여자는 불만스러워도 그냥 체념하고 마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오미의 머릿속에 가나코의 멍투성이 얼굴이 떠올랐다.

 "잘못된 거예요. 일본인은 하고 싶은 말을 참아요. 그건 정말 좋지 않아요. 중국에서는 잠자코 있으면 계속 당하기만 해요. 왜 일본 여자는 그렇게 얌전히 있는 거죠? 나는 일본에 와서 무엇보다 그것에 제일 놀랐어요."

 "무슨 일이든 여자보다 남자가 우선이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건 좋지 않아요. 좀더 자기주장을 해야 해요."

.

.

.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친한 친구가 남편으로부터 폭력 피해를 받아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이때는 아케미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죽여버리세요"하고 내뱉었다.

 "그런 남자는 살 가치가 없어요. 죽여도 아무 불만 없을 겁니다."

 "그건 좀....." 역시 나오미는 할 말을 잃었다. "죽이면 감옥에 가잖아요. 나만 손해예요."

 "그럼 잡히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생각해야죠. 나 같으면 상하이로 같이 여행 가서 거기에서 갱한테 의뢰해 죽일 거예요. 중국 갱의 소행이니까 일본 경착은 손을 쓸 수 없겠죠. 중국 경찰은 일본인 여행자가 한 명 죽은 정도로는 쉽게 수사하지 않아요. 그걸로 끝이에요."

 아케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오미는 이 여사장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중국인에게 산다는 건 전쟁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활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이나 책력은 모두 정당방위가 된다.

 "나도 그렇게 강해지고 싶네요."

 나오미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당신은 충분히 강해요. 내가 만난 일본인 여자 중에 제일 강한걸요."

 아케미가 손을 들고 왜건을 끌고 가는 종업원을 불렀다. 거기에는 가지각색의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자, 단것 먹고 일이나 열심히 하죠." 하얀 이를 드러낸다.

 나오미는 기운을 얻은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밉살스러운 도둑이었는데 지금은 일종의 존경심마저 품게 됐다.


p.114-117



마지막으로 죽은 전남편의 동생인 요코와 가나코가 진실공방을 하는 장면.


요코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너와 일대일로 이야기하는 건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 앞으로는 너, 감옥 안에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나도 하고 싶은 말을 못 할테고, 그래서 온 거야. 다시 한 번 말할게. 죽어줘."

 "싫어.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가나코가 다시 말했다. 또다시 침묵. 이번에는 일 분 가까이 지속됐다.

 요코의 어깨가 축 처진다. 눈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히는가 싶더니 곧바로 흘러넘친다. 그 자리에 쪼그려 앉는다.

 "죽일 것까지는 없었잖아.... 내 오빠인데....."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간헐적으로 흐느낀다. 마룻바닥이 금세 눈물로 젖었다.

 "왜 너같이 변변한 경력도 없는 여자 때문에 내 인생에 오점을 남겨야 하는데?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차근차근 계단을 올라왔어. 그런데 너 같은 것 때문에...."

 요코가 이젠 거의 울부짖는다.

 가나코는 우두커니 서서 요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서로의 감정이 뒤바뀐듯 차분해졌다. 자신도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요코를 동정하는 마음도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다쓰로를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었을 것이다. 혹은 평생을 노예처럼 살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코가 일어섰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물을 멈추고 다시 가나코를 바라본다.

 "경찰이 취조할 때 오빠에 대한 험담은 하지 마. 그게 네가 해야할 최소한의 보상이야."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가나코는 요코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었구나 시었다. 이 말을 하러 온 것이었나. 그렇다면 안심해. 나는 체포되지 않아.

 "미안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코의 오른손이 날아왔다. 가나코의 빰에서 찰싹하고 소리가 났다. 다쓰로에게 맞고 그의 여동생에게도 뺨을 맞았다. 가나코는 손으로 뺨을 누르며 요코를 봤다. 두번씩이나 날아오지는 않았으므로 방어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요코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등에 분노와 슬픔을 띤 채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간다. 가나코는 배웅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거실에서 듣고 있었다.


p.438-439




덧붙여 나의 개인적인 생각에 일본인이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는 까닭은,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극도로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만큼 나또한 남에게서 피해입고 싶지 않다는 자기방어적 태도인 것이다. 반대로 중국인은 별다르게 미안한 기색도 없이 타인의 개인적인 영역에  발을 들여놓거나 스스럼없이 폐가 되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한국인은 지리적으로나 민족성으로나, 그 사이에 있는 것 같다. 남에게 피해를 입으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자신이 가해자가 되면 어쩔 수 없었다며 뻔뻔하게 구는 면은 중국인과 비슷하지만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생활을 간섭받고 싶어하지 않는 면은 일본인스럽기도 하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에겐 한국인이 이도 저도 아닌 이해하기 어려운 부류일 수 있듯이, 나 또한 일본인과 중국인의 극단적인 민족성이 비슷한 정도로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인과는 가면을 벗고 진정한 친구가 되는게 어렵고, 중국인과는 부담스러운 요구나 과도한 침범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이렇게 쓰고 보니 상당히 편협한 민족주의자같지만, 다만 같은 언어와 문화의 공유로 외국인에 비해 한국인이 다소 편안한 정도로 가까워질 기회나 확률이 많다는 뜻일 뿐이다.


아, 책 이야기를 하자면 흥미진진하고 재밌다(말했던가?). 일본인의 내성적인 성격 탓에 별 것 아닌 상황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들은 약간, 위화감이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도 까놓고 보면 별반 다르지 않으므로 공감하는데 어렵지는 않다. 중국인과 일본인의 다른 민족성과 그 장단점들을 이야기 속에 재밌게 잘 녹여냈다. 다만 아케미라는 존재가 너무 대상화된 중국인으로서 작용한 면이 없지는 않다고 본다. 말하자면 중국인 대표랄까. 자꾸 일본인 중국인 들먹이게 되는데 그 정도로 이 책에선 민족성이 제 2의 주제처럼 보인다.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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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집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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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쓰는 것이 내게는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글자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헤매이는 것은 좋지만, 무작정 따라갔던 그 좁은 골목길들 사이에서 '내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나의 지난 발걸음을 되새겨 보지만 안개 자욱한 새벽길을 지나온 것처럼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느낌에 상응하는 올바른 단어와 문장을 찾는 것이 어렵고, 제대로 나열하는 것은 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생각을 적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생각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을 언어화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생각은 단어이기도 하고 이미지이기도 하고 소리나 냄새이기도 하다. 하나의 생각이 제대로 닫히기도 전에 전혀 다른 생각의 문이 불쑥 다른 곳에서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어떤 일련의 생각에 매달려 있다면, 그 사람이 주구장창 그 생각만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그걸 문자화하는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쉼표로 이어진 파트마의 생각들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렇게 느꼈다. 생각은 쉴 새 없이 머리 속 빈 공간을 파고든다. 파트마 할머니가 하루종일 매달려 생각하는 것은 과거이다. 과거 남편과의 대화, 사실 대화라기 보단 남편의 일방적인 일장연설에 가깝지만.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남편이 했던 말들과 생각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당시에 하지 못했던 말과 지금 하고 싶은 말을 쉬지 않는 쉼표로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할머니가 입밖으로 꺼내는 말은 신경질적으로 누군가를 찾거나 화를 내는 일 뿐이다. 하루종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할머니의 머릿속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과거를 품은 현재의 생각들로 가득한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 수록 더 깊이 과거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웃는다. 노인들은 정말 이상해, 그들은 웃는다, 할머니, 잘 지냈어요, 그들은 웃는다, 텔레비전이 뭔지 알아요, 그들은 웃는다, 왜 아래층으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아요, 그들은 웃는다, 재봉틀이 정말 멋져요, 그들은 웃는다, 페달도 있네요, 그들은 웃는다, 왜 주무실 때 지팡이를 침대로 가져가세요, 그들은 웃는다, 차 타고 바람 쐬러 갈까요, 그들은 웃는다, 모닝 가운 자수가 정말 예쁘네요, 그들은 웃는다, 선거에서 왜 투표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웃는다, 왜 만날 장롱을 뒤지세요, 그들은 웃는다, 왜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웃니, 라고 하면, 그들은 또 웃는다, 웃는다, 우린 웃지 않는데요, 할머니! 라고들 한다. 그러고는 또 웃는다. 어쩌면 아이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평생 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착잡했다.
-1권, p.225


하지만 나는 열다섯 살 때도 그렇게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무언가를 기다리곤 했다. 마차에 실려 흔들거리며 돌아다닐 것을, 피아노 칠 것을, 이모 딸들이 올 것을, 그리고 왔던 사람들이 돌아갈 것을, 음식을 먹을 것을, 음식을 먹을 때는 일어날 일을 그리고 이 모든 기다림을 끝내 줄 더 깊은 기다림을,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것들을, 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후 구십 년이 지나자, 수백 개의 작은 수도꼭지에서 대리석 우물로 모이는 맑고 깨끗한 물처럼, 모든 것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덥고 잔잔한 여름밤의 정적 속에서 우물의 서늘함에 몸을 가까이 가져가면, 그것에서 나 자신을 보고, 내가 나 자신만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 더럽혀지지 않도록, 맑고 깨끗한 물 위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나는 공중으로 나 자신을 불고 싶었다. 나는 작고 가녀린 여자애였다.
-1권, p.232-233


과학과 이성을 신봉하는 파트마의 남편 셀라하틴이 생전 파트마에게 설파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파트마, 내 말을 주의깊게 들어! 화내지 말고, 알았지? 신이 없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왜냐하면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신의 존재를 기초로 하는 종교는 모두 공허한 시적인 지껄임에 지나지 않아. 그러면 그 지껄임이 설명하는 천국도 지옥도 물론 없어.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그러면 죽음 이후의 삶도 없어. 내 말 잘 듣고 있는 거지, 파트마? 죽음 이후에 삶이 없다면 죽은 자들의 삶은 전적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 이 상황을, 이번에는 주검의 관점에서 한번 살펴보자고. 죽음 이전에 살던 주검은, 죽음 이후에 어디에 있지? 육체에 대한 얘기가 아냐. 의식, 감정, 이성으로서 지금 그는 어디에 있지? 그 어떤 곳에도 없어, 그렇지 않아, 파트마? 존재하지 않는 것 안에 있어, 내가 '무'라고 했던 것에 파묻혀 있어. 이제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아. 이제 이해했어, 파트마, 내가 '무'라고 했던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생각할수록 난 공포에 휩싸여, 난. 하느님, 얼마나 기이하고, 얼마나 소름끼치는 생각인지! 눈앞에 떠올려 보면 오싹해! 당신도 생각해 봐, 파트마, 안에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것을 한번 생각해 봐. 소리도, 색깔도, 냄새도, 감촉도 없고, 그 어떤 특징도 없고, 장소도 없는 공간을 생각해 봐, 파트마. 공간도 차지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무언가를 떠올릴 수 없지, 그렇지? 얼마나 칠흑 같은 어둠인지, 처음과 끝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건 인지하지도 못해! 죽음이라는 것은 이것보다 더 어두워, '무'는 이것보다 더 너머에 있고! 두려운거야, 파트마? 우리의 시체가 역겹고 차가운 땅의 고요 속에서 썩고 있을 때, 내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전사자들의 몸, 산산조각이 난 두개골 그리고 땅에 흩어진 뇌, 흘러내리는 눈과 피범벅으로 찢어진 입이 콘크리트 위에서 썩고 있을 때, 아, 그들의 의식은, 우리의 의식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무'의 어둠속에 파묻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 밑으로 머리를 아래로 한 채 등을 보이며 영원히 추락할 때 자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장님처럼, 아냐, 이보다 더 너머에 있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것. 빌어먹을, 이러한 것들이 떠오를수록 공포에 휩싸이고, 죽고 싶지 않아. 죽는다는 생각이 들면 저항하고 싶어, 하느님, 얼마나 큰 좌절감을 주는지, 계속해서 영원의 어둠 속에 파묻히면서 처음과 끝이 없을거라는 것을, 단지 어둠 속에서, 다시는 절대, 절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사라져 간다는 걸 안다는 것. 파트마, 우리는 모두 '무'속으로 침몰할 거야. 소멸은 우리를 끝까지 채울 거야. 두렵지 않아,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당신은 두려워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자각해야만 해, 반란자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당신 마음속에 일어나기 전에는 오늘 밤 당신을 놔주지 않을 거야. 들어 봐, 들어 봐, 천국은 없어, 지옥도 없고, 당신을 주시하고, 보호하고, 벌을 주고, 용서할 그 누구도 없어. 죽음 이후에 당신은 아무도 없는 '무'속으로,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어두운 바다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내려갈 거야. 되돌아올 수 없고, 아무도 없는 고요 속에서 질식할 거야. 당신의 시체가 차가운 땅속에서 썩을 때, 두개골과 입은 화분처럼 흙으로 찰 것이고, 살은 마른 거름 조각처럼 떨어져 나와 흩어져 버릴 것이고, 해골은 석탄 조각처럼 가루가 될 것이며,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권리조차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당신을 녹여 없애 버릴 역겨운 늪으로 들어갈 것이고, '무'의 무자비하고 얼음 같은 진흙 속에서 홀로 사라져 갈 거야, 파트마, 이해해?"
-2권, p.211-213


파트마의 손자 손녀가 겪는 사랑의 소용돌이는 파트마의 과거로 침전하는 내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젊은이들은 이념간의 대립과 성장의 고통을 동시에 겪으면서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눈 앞의 사랑에 빠져든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하지만 단어들은 추하고 게대가 절망적이었다. 텅 비어 있었다. 한 번 더 말했다. 그런 후 갑자기 나의 머리는 그녀의 품에 있는 손 위로 떨어졌다.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리는 그녀의 손에 몇 번 급하게, 마치 뭔가를 놓칠까 두려운 듯 입을 맞췄다. 그리고 또다시 텅 비어 있고 추한 단어들을 빠르게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내 손으로 감쌌다. 손 위의 짠 맛이 땀인지 눈물인지 알지 못해 절망과 패배감에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몇 번 더 입을 맞추고, 그 의미 없는 단어들을 중얼거린 수 절망감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깨끗한 공기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2권, p.128



...여자들은 때로 나를 두렵게 한다. 그녀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내가 알 수 없는 어두운 생각들이 있는 것 같다. 그녀들의 어떤 부분은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지, 한번 휩쓸려 가면 재앙이 온다. 죽음 같은 것이다, 하지만 머리에 푸른 리본을 달고 미소도 짓는다, 창녀! 하늘이 멀리서 샛노랗게 발아지자, 번개가 무서웠다. 구름, 어두운 폭푸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의 노예인 것 같다, 때로 우리는 잠시 멈춰서 반항하려 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두려워한다. 번개를, 천둥을, 미지의 먼 재앙을 우리 위에 던진다. 그럴 때면 나는 우리 집 조용한 불빛 아래서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죄악이 두렵다! 나의 가련한 복권 장수 아버지처럼.
-2권,p.151


마침내 비가 그치자, 내가 그들도, 다른 사람들도 아니라 계속 너를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닐귄! 너는 침대에 누워 있겠지, 어쩌면 빗소리에 깨어났을 수도 있고, 창밖을 바라보며, 천둥이 칠 때마다 몸서리치며 생각에 잠기겠지. 아침에 비가 그치고 해가 뜨면 해번에 나오겠지, 너를 기다릴게, 마침내 너는 나를 볼 것이고, 우리는 이야기를 할 것이고, 나는 말하고 또 말하겠지. 긴, 아주 긴 이야기. 인생. 널 사랑해.
-2권,p.153


마침내 너는 나를 볼 것이고, 우리는 이야기를 할 것이고, 나는 말하고 또 말하겠지. 긴, 아주 긴 이야기. 인생. 널 사랑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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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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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다. 그보다는 말끔하다. 간결한 문장과 표현이 너무나 깨끗하고 가지런히 모여 있어서, 이 한 권 안에 허투루 쓰인 문장은 단 하나도 없을 것만 같다.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어떤 느낌일까.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보다 나는 작가의 표현방식에 더 매료된 것 같다. 어려운 주제를 가볍지 않은 무게감으로 풀어가면서도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지루함 한 방울 없이, 나처럼 싫증 잘 내고 쉽게 지치는 성급한 독자를 한번도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힘이라니. 중반부에서 마지막장 까지는 거의 네 시간동안 꼼짝않고 한 호흡으로 읽었다. 마지막장을 덮는 순간 머리끝까지 차 올랐던 몰입의 열기가 정수리에서 증기가 되어 퐁퐁 빠져나가면서 나 또한 피오나처럼 굉장히 무거운 것을 토해낸 듯한 기진함이 느껴졌다. 분명 차갑게 잘 제련된 문장인데 어째서 읽는 나는 이렇게 뜨거워졌을까.

가정법원과 아동법.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선 굉장히 민감하고도 중대하게 다뤄지는 분야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아직 멀었지만) 조금씩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거기에 개인의 가장 극대화된 가치관인 `종교`라는 것이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 사회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의 복지와 안녕이, 나의 삶을 내가 결정하는 개인의 존엄성과 맞부딪혔을 때, 법은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더구나 그 대상이 이제 막 법적 성년을 코 앞에둔 사실상 청소년이라면, 그가 내린 자신의 목숨에 대한 결정이 온전하다고 판결할 수 있을까? 그러나 법이 내린 결정으로인해 개인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변화를 겪어야 하고, 그에 따라 예기치 못한 변수와 상황들이 생겨나게 된다 하더라도 법은 그에 대해 더이상 책임지거나 관여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같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

냉철한 법의 대리인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포기하지 않는 피오나에겐 이런 상황은 극적인 딜레마가 되어 그녀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결국은 (사실 당연하게도) 사회적 통념안에서 인도주의적인 판결을 내리지만 나이만 성인일 뿐 아직 미성숙한 아이에겐 피오나가 깨우쳐준 현실이 너무나 크고 두려운 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법을 상징하는 피오나는 이 어리디 어린 아이에게 어떤 복지와 안녕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간혹 양심적병역기피자에 대한 뉴스가 나오곤 한다.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개념이 상대적으로 약한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들은 대체로 `유난을 떠는` 사람이 되거나 `사이비 종교인`으로 치부되었다가 곧 잊혀져 버리곤 한다. 징병제를 받아들이는 나라에서 개인의 가치관과 존엄성에 대한 존중은 사실 장려되기 힘들다. 법보다 국가나 사회통념에서의 윤리가 우선시 되는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서구유럽에서 보이는 법에 대한 강한 외경심과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사명감은 우리가 조금쯤 받아들여도 좋을 듯 싶다. 법이 갖는 힘이 올바르게 강해질수록 개인은 그 법의 테두리 안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될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러면 안되는데 어떤 면에서 자꾸 하루키 생각이 난다. 스카치나 클래식이나 재즈 같은, 이야기를 꾸며주는 자잘한 소품들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같은 소재들인데 어째서 이 글 속에선 어느하나 삐죽 튀어나와있지 않고 편평하게 잘 녹아든걸까. 그 뿌리가 서구유럽에 있는 것들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이언 매큐언과 같은 서양 작가들이 우아하고 지적인 주인공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이 즐기는 문화에 동양적 코드를 넣었다면, 그것 또한 나에게 거슬렸을 것이다. 자연스럽지 못한 소재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불편하다. 아마도 하루키라는 사람 자체가 약간은 위선적이고 약간은 촌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승전하루키라니!!!!!)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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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열 - 제149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성애의 쾌락뒤에 남겨진 지저분한 흔적과 상흔의 기억을 바라보고 있는 이야기들. 호텔 로열이라는 일본의 소위 러브 호텔을 배경으로 한 일곱개의 단편이 실려있다. 장소를 드나드는 무작위의 사람들에 대한 수평적인 이야기이지 않을까, 라는 예상과는 달리 호텔이 건물로서 버텨온 시간을 뒤에서부터 거스르는 수직적인 구성으로, 이야기들이 서로서로 슬그머니 연결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제 더이상 사람이 찾지 않는, 폐허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낡아버린 건물의 모습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건물이 올라가기 전, 야심만만한 한 남자가 부푼 꿈을 안고 호텔 부지를 둘러보는 장면에서 마지막 단편이 끝을 맺는다. 거꾸로 흘러가는 구성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결국 어떻게 되었나, 하는 결과가 아닌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는 원인에 좀더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한다. 허물어져가는 건물과 권태로운 등장인물들이 실상 모든것의 출발점에선 얼마나 희망에 가득차 있었는가를 지켜보는 일은 무척 서글프기도 하면서 묘하게 감동적이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별을 보고 있었어>는 다른 여섯개의 이야기와는 살짝 다른 느낌이 있다. 모두 다른 개개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면에 호텔의 흥망성쇠라는 커다란 줄기를 놓지 않고 있었는데, <별을 보고 있었어>는 좀 더 개인의 내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다. 호텔이 한창 활발하게 운영중이던 때, 그러니까 호텔을 구심점으로 가장 많은 인물들이 모여 있던 시기로 호텔이 중요한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이루기는 하지만 나에게 이 이야기는 조금 더 독립적으로 보인다. 호텔의 커다란 그림자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고나 할까. 호텔이 막상 전혀 등장하지 않는 ˝쌤˝보다도 더 그렇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 미코가 일하고 있는 곳이라는 점 말고 호텔 로얄이 갖는 의미는 크게 없어 보인다. 그런면에서 호텔의 시간적 흐름과 같이하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뒤에 실린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이 작품이 작가 스스로에게는 성에 대한 묘사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작품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글쎄 성에 대한 묘사는 좀 약한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다른 것보다 나에게 이 작품은 배경에 대한 묘사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진다. 표현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의 숨소리가 느껴질 듯이 생생하다. 인생에 어떤 원망도 계산도 하지 않는 순수함과 하늘아래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그저 편히 쉬고 싶다고 생각하는 미코의 인생 전체에 걸친 피로감이 일부러 길을 잃은 공空의 한가운데에 조용히 차오르는 것을 바로 곁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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