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다빈치 art 18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에는 서사적 장르가 주는 감흥같은 것은 없다.
이중섭이 대부분 아내에게 쓴 편지를 옮겨 적어놓았고
뒤에 화가 '대향'에 대한 일대기를 담담하게 정리했으며
삽화로 그의 그림을 풍성하게 덧보태주었다.

애초에 그림 구경하자는 것이었고, 화가 이중섭에 대해
좀더 알고 싶기 때문이었으니 잘못된 책도, 독서도 아니다.

민족이나 일제저항 등의 단어를 떠올리기 전에
그는 열과 광에 빠져 있는 인물이었다.
영감으로 열이 끓었고, 순수함과 추진력으로 빛이 난다.
그 열과 빛에 마침내 온몸이 누렇고 검게 그슬렸고
그가 그리던 소처럼 배가 불룩해져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남았다. 그림과 열전, 뜨겁게 써내려간 편지들.

미치도록 타올랐던 한 화공을 이해하게 된 후세들이
따뜻하게 그의 열기를, 광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200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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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마천
커원후이 지음, 김윤진 옮김 / 서해문집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의식주에 대한 의무가 없었다면 책을 펼쳐든채 단숨에 읽어갔을지 모른다.
그것이 사마천의 매력이었는지, 커원후이의 매력이었는지,
또는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지성의 태고시절 은밀히 잉태되고
사투로 출산된 비밀고서를 찾아낸 듯한 매력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모든 것 때문이겠지.

등장인물과 인용된 인물까지 합하면 제각기 명쾌하게 색다른 캐릭터가
수십, 수백명이 등장해 <사기>의 출산에 기여한다.

사기는 사마천의 뭇을 빌렸고, 무제의 팔꿈치를 빌렸고,
임안의 술을, 굴원의 노래, 서아의 바느질, 어린 뚱이의 혀까지 빌렸다.
저 스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거대한 운명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웅장한 시놉시스를 단호하고도 수려하게, 경쾌하고도 온화하게
장편으로 그려보인 작가에 경탄한다.

'사기' 그 자체에 대한 진한 경외가 없었던들 가능했으랴.
문제는 글솜씨가 아니라 열정일 것이다. 진정성일 것이다.

(200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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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반짝반짝 빛나는>으로 에쿠니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이후
동질감이나 연대의식까지 느끼며 그녀의 신간들을 탐독했던 것 같다.

왠지 이 책을 끝으로 철들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또는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결함을 가진
(내심 이 결함을 부끄러워 하거나 이 때문에 힘들고 괴로운 때가 있으면서도
겉으로 무심한 듯,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하는)
서른 일곱살, 또는 마흔 두살, 또는 스물 한두살의 철들지 못하는 성장소설은
더 이상 매력적으로 읽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패턴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랄까.
또는 캐릭터가 어느덧 진부해져버렸달까.
차라리 <바리데기>의 '바리'가 정반대의 극한적 캐릭터이기는 하나
더욱 호감과 경외가 가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결혼을 해서인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서른 일곱한 무심한 듯한 어리광, 과장된 외로움,
무력한 결함극복의 의지 등은 더이상 어쩐지 시크해보이지 않는다.

개인의지와 상광없이 찾아온 나라의 부,
단계적으로 열리지 못한 문화의 개방,
그 바람에 밀도있게 인간성을 구축해오지 못한 허무주의적 경향의 일본인과
그 캐릭터. 그 어리광을 더는 못 받아주겠달까.

(200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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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와이오밍의 카우보이는 자고로
굵게 주름진 얼굴에 눈을 반만 뜨고 딱 붙는 부츠의 박차를 번쩍이면서
말과 자연을 호령하는 미국적 댄디의 전형인 줄 알았다.

11개의 단편들이 마치 이웃처럼 엮여 있는 이 책 속에서 카우보이는
극한의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는 처연한 노동자일 뿐이다.
생명을 앗아사는 폭설과 토네이도, 피와 살을 탐하는 거대한 메뚜기떼,
광기와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거친 자연 속 노동자 말이다.

책을 다 읽자 심지어 하루끼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가 떠올랐다.
지진으로 부서진 고베 사람들의 사연들처럼, 고통들처럼
관광객이 카메라 들고 반나절 체험에 호들갑을 떠는 와이오밍 카우보이의
진짜 생활은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웠기 때문이리라.

동서고금을 막론한, 그 안에서의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식의
질기고 위대한 인간의 운명은 오늘도, 어디에서도
그 굳은 살을 두텁게 하고 있다.

(200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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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록, 조선 선비 일본을 만나다 - 기행문 겨레고전문학선집 16
신유한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애국충정의 순결한 뜻 때문인가.
시대적 선비상의 깔끔한 때문인가.
알룩달룩 요란한 왜국기행문임에도 문장은 너무도 검박하고 평화롭다.
북한 출판사가 먼저 번역한 것을 옮긴 것이라
북의 검박함 또한 가미되었으리라.

특히 그 옛스러우면서도 천진난만한 의성·의태어는
어찌나 정감어리고 감칠맛이 나면서도 귀여운지
멋부리지 않은 것인데도 향기롭고
자랑 삼지 않았음에도 보는 내가 다 흐뭇하다.

문장이 뛰어난자를 선별해 사신행렬의 제술관으로 보냈다고 하나
다만 글실력만이 아니라 글에 담긴 정신이 그토록 순결하지 않고서야
그토록 순진하고 사랑스럽게 쓰여질 수 있었을까.
글의 스스로 사심없이 빛나는 주제가
기교와 학식을 뛰어넘는 순간이었다.

(2008.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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