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윤대녕 지음, 조선희 사진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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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폴로 11호가 착륙한 달을 두고 사막같다는 말을 들은 이래
주인공 '나'의 가슴 속 1할은 언제나 사막으로 메꿔져 서걱거렸다.

VIP 신용카드로도 결제되지 못하는 그 1할의 빚은
책 뒤에서 사진작가 조선희가 사막을 다녀와 회고했듯 "자살하기 좋은 곳"이 아니라
사실 살 수 있는, 살아야 하는 구실이다.

달걀 속 조그만 빈 공간이 있어 위태롭게 약한 달걀껍질이 깨지지 않으며
그 안의 생명체가 모정 없이도 제 스스로 성숙할 수 있는 것처럼
가슴 속 1할의 사막이야 말로 그가 두고두고 회상하며 그리워하며
변명하기 좋은 삶의 이유인 것이다.

돌덩이같은 구근에서 싱그런 꽃대를 피워올린 백합과
차압딱지를 물리치고 녹턴의 연주곡을 울려내는 피아노처럼
그의 사막은 적막해서 작은 소리와 움직임도 도드라져보이고
척박해서 작은 생명력이 더욱 기대되는 생존의 땅, 극복의 땅이다.

(2008.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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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 언니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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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고 나도 내 인생을 고뇌할 수 있다면.
부끄럽고 참담한 고백의 중간 중간, 알다시피 이건 소설입니다,
가공된 허구의 이야기죠, 감안하세요,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공지문을 믿고 더욱 더 격렬하게 슬퍼지고 부끄러워지고
주저앉아지는 감정들을 일부로 극대화해도 된다면,
그 남사스러운 탄로 끝에도 나는 낯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있겠지.

그건 소설가의 특권이자 동경해마지 않는 면책권이다.
누구라고 세련되게만 훑어지지 않는 인생사를
조근조근 정리하고도 너무 부끄러울 필요없는 권리.
죽어가던 메리와 희망을 쥐어짜던 봉순이 언니를 외면했던 과거사가
소설이 되고, 19쇄를 찍어내고, 방송국의 추천도서가 되어
베스트셀링을 기록하고도 작가는 참담해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 참담한 제스츄어마저도 상품이 되니 이 얼마나 부럽는가 말이다.

봉순이 언니에게, 내가 다 미안하다.
인류가 미안해해야 한다.

지금도 사람에게 미안한 일들이 나로부터 인류로부터
계속 이어져 오는 것의 어쩔 수 없음을 어찌하면 좋을까.

(2008.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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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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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엔 내내 통화가 안된던데?
으응.. 핸드폰을 깜박 두고 나갔었거든.

할 때의 그 깜박으로, 세상은 두 명의 중학생, 그것도 한 세트가 되어버린
못과 모아이를 깜박했다.

조물주가 아차, 내가 그 애들도 만들었지, 하니까
같은 반 안경잽이까지 다수에 휩쓸려 그들을 없는 사람, 존재해서는 안될 사람 취급한다.

그런 그들을 탁구계는 잘도 찾아내었다.
탁구계는 핼리혜성처럼 순식간에 지구를 접수했고
지구계가 외면한 이들을 단박에 찾아내
결코 인류를 대표할 수 없는 이 둘이 인류를 대표해
훈련받은 쥐와 새와 탁구를 친다.

얻어터지는 게 정기적 일과인 이들은 경기에서 이기고
(사실은 상대선수가 과로사하여 판정승하고)
지구를 포맷하고 새 프로그램을 까는 것을 막는다, 라는 것이
기승전결을 가진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 소설의 전부다.

나머지는 도무지 엄마에게 읽은 책 얘기를 말로 전해줄 수 없을 만큼
기상천외하고 무한질주하고 상상력이 폭발한다.

'입담'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거대 우주의 기운이 여겨지는 글폭풍이랄까.
그 발랄함에 세 번 웃었고, 거침없이 읽어나갔고, 은희경의 추천에 혹했으나
내가 동경하는 글쓰기는 아니다.

(200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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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7시에 떠나네
신경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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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로 가득한 기억을 제스스로 낙태시킨 하진의 몸으로
체온처럼 따뜻한 음식이 들어가 조용한 위로가 된다.

내다버린 기억의 조각을 찾아 맨발로 나섰다 맨손으로 들어온 하진의 몸에
그의 뜨끈한 맨몸과 맨숨결이 닿아 또 고요한 위안이 된다.

사람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어디 애완견 뿐이랴.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머니를 닮지 않은 사향노루라 할지라도
사람을 위로하는 끈질긴 힘이 되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도려낸 상처자국은 그 자체가 부재다. 공허다.
한 조각 잃어버린 퍼즐판처럼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채 먼지가 쌓여가고
프로포즈를 거절해가고 한밤중 전화를 받아내고만 있던 하진이
내다버린 피와 고름, 살과 뼈를 엉금엉금 기어가 겨우 보고 오더니
마침내 '한밤 중 그녀'에게 먼저 전화를 걸기에 이른다.

기어이 목도해야 하는가.
기어이 대면하고 바닥을 쳐야만 그 통증을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인생은 잔인한데 잣죽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2008.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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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팅 마인드 - 섹스는 어떻게 인간 본성을 만들었는가?
제프리 밀러 지음, 김명주 옮김, 최재천 감수 / 소소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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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영장류는 어떻게 마음이라는 유전자적 특질을 개발, 진화해올 수 있었을까?
물론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렇게 전문용어로 가득찬 문장으로는 질문할 수 없었지만
여튼 같은 의미의 호기심이었다 이 책을 뽑아들었을 때는.

책 부제에서 놀랍게도 그것은 '섹스'라고 밝히고 있었고
본문을 읽다보면(거의 첫 머리에서) 그것은 성선택, 번식욕, 생존욕 때문이라고
고상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구애과시용 예술'이라는 논증 또한 강렬하게 마음 들끓어 동의하게 되고
특히 근원거리를 향한 필자의 커뮤니케이션에 매혹당하는 내가 그 증거다.

감수자의 너털웃음같은 우려와도 같이 저자의 과감하고 신속한 단정들마저도
자연과학도의 영민한 재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열람실에서 칠백페이지가 넘는 책을 무작위로 펼쳐봤던 처음 몇 초만에
소재상으로나 스토리텔링으로나 분명 재밌는 책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면
이토록 꼼꼼히 필기까지 하면서 읽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몰입은 구애에 있어서, 즉 어떤 비즈니스에 있어서도 성공의 시작이다.
애정어린 몰입을 위한 화술, 작화법, 공감유도, 매력발산술, 그보다 앞서 매력 고양에
모든 에너지와 잠재력을 쏟아부어야 할 때이다.

앞으로 인문서적과 과학서적을 섞어 있으며 자료와 이야기꺼리 수집에 만전을 다해야지.

(2008.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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