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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절망과 희망이 샴쌍둥이처럼 얽혀있지 않았더라면 모세의 엑소더스도,
노아의 방주도, 또 그것을 우주적으로 각색한 베르베르의 <파피용> 우주선도,
대한제국의 일포드호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도 없었을 것이다.
글쓰기 시작할 때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씹는 기분이었다는 작가의 막막함도
끝끝내 해갈되지 못했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참으로 번잡스럽게도, 안쓰럽게도, 성미 급하게도
분노, 두려움, 슬픔, 좌절 등의 박탈 끝에는 공히 '희망'이라는 기대가
냉큼 달라 붙어 있기 십상이라 사람들은 배에 오르고, 용병에 지원하고,
파업을 일으키고, 에나켄 최고 수확량을 갱신해 내곤 한다.
그렇게 전표로 밥을 바꿔먹는 일은 모래바람이 입안에서 서걱대는 것만큼이나
모호할 것없이 명명백백한 일이자 가치중립적인 일이므로
나는 마치 굶어 죽은 아우의 몸뚱이 옆에서 얻어온 주먹밥을 미어터져라
입에 가득 넣고 우물거리는 듯한 오열을 참기 위해 무릎에 힘을 딱 주고선
문장을 한 번 더 찬찬히 음미하듯 읽고픈 감상을 가까스로 밀어내며
기계적으로 종이에 쓰인 글자만을 줄줄 읽어나가려고 애써야 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그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어 경쾌하게마저 느껴지는
그 거리두기식 묘사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민족수난사를 눈물 콧물 닦아내며 읽고 앉았기엔 오늘의 역사,
지금 이 시간의 역사들이 너무 성미 마르다.
지금도 사람들은 절망 끝자락에 희망을 질질 끌고 다니면서 출근을 하고
통화를 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생각한 다음 말을 한다.
나도 이렇게 숨가쁘게 책장을 덮고 감정을 추스리고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작가도 끝인사로 그랬다.
이제 다음 소설을 생각해야 한다고.
(2008.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