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혜원세계문학 43
J.E.스타인백 지음 / 혜원출판사 / 1993년 3월
평점 :
절판


<브로크백 마운틴>을 읽을 때 입안에서 까끌대던 모래 알갱이가 다시 씹혔다.
땀과 열기로 후끈거리는 부츠를 벗지 못한 채 삶은 감자를 우겨넣는 고단한 휴식,
끝을 알 수 없는 가뭄 속으로 시위하듯 기형으로 비틀어진 옥수수 줄기를
바라보는 그악한 심정이 다시금 되어버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톰조드 가족의 고단함은 그보다 더 절망적이어서 그보다 더 맹위로웠다.
형체가 없으면서도 그 수가 많고 종류가 다양한 난관과 투쟁해야 했으며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에 관계없이 죽어야 했고 굶어야 했고 또 굶겨야 했다.

가족들과 모여앉아 과즙이 풍부한 포도알갱이들을 우물거리며(침이 고인다)
할아버지의 허풍 섞인 무용담을 탄식을 내뱉어 가며 듣고만 싶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포도는 그저 삼엄한 경비 하에 썩어가고 있었다.

폭풍우나 사냥총, 진실 따위보다도 더 강력한 '가족'이란 이름의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가족이 끊임없이 짛이겨 지면서 더욱 강력해졌으며
더욱이 전염되고 파급되는 위력까지 지녔다.
비록 가족이란 이름의 힘이 사람을 먹이지 못하고 죽음을 막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너무 비장하고 또 아름답기까지 그 무엇도 막아서지 못할 듯 싶었는데
하물며 맨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을 먹이고 죽음을 막아내는 모습에서
나는 여전히 입안에 까끌대고 낡은 부츠를 편히 벗지 못했음에도
완전히, 압도적으로 승리한 기분이 들어 우쭐하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던 것이다.

(2008.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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