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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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도라면 한글창제의 그 신비로움에 감탄하지 않는 자 없을 것이다.
유네스코가 뒤늦게 그랬듯 천방지축 열여섯에 불과한 내가
처음 그 원리를 보았을 때도 놀라움은 경악에 가까웠다.
(그것은 물론 경탄한 국문학도가 후에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 경이를 전도하듯 열강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전2권을 손에서 놓칠 수가 없더라는 호평을 듣고도
막상 문장의 서걱거림에 불편했다 처음에는.
읽다보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수사력이 좀 덜한다거나 작문의 테크닉이 세련치 않다거나 하는 건
전혀 독서를 방해하지 못하게 된다.

Faction을 흠모하며 스스로 써보기 갈망않는 나에게 한글 창제에 대한 경이와
지독한 사실연구와 자료해석으로 탄생된 역사소설에 대한 경의가 합쳐져
동경과 창작의 열망을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한글이 있어 이렇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소리대로 적고 있다.
마음의 움직임을 글자로 옮겨 저장하고 기록하고 두고 읽는 것이 가능하며
더욱 많이 적고 더욱 세면히 아름답게 적어내는 것에 대해 갈망하고 있다.

(200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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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67
노신 지음, 조성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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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는 나다.
아Q는 노신이다.
아Q는 근대 조선의 갑돌이이며
가짜 달걀이 만들어지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동사해 나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이다.

변화를 주도해내지 못하면서도 낙오한 것은 아니라 믿는 우리네 위안과
시대유행에 휩쓸리면서도 자신만은 주체적으로 능동적이 있는 변명이
아Q의 정신승리법과 소름돋게 꼭같다.

아Q를 연민하는 것은 그 안의 내 모습 때문이고
아Q를 조롱하는 것은 우민이라도 대다수에 속하기만 하면 된다는 계산 때문이다.

조롱 속에서 실낱같은 자아반성을 할 수만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노신을 스스로 아Q가 되어 바보 흉내를 내었다.
벽에 이마가 찢기어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주절주절 가지 확신의 논리를 되뇌이면서
종식난 구새대의 벽이자, 닥쳐온 새시대의 높은 계단턱에 부딪친 세상의 아Q와
갑돌이와 나와 그 자신을 조롱하며 연민했던 것은 아닐까?

(200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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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여기 머문다 - 2007년 제3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전경린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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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이름부터가 이인희다.
귀에 걸리는 발음, 입에 부딪치는 받침 하나 없이
그저 한 학년에 두 세명은 같은 이름이 있어왔을 눈에 띄지 않는 아이.

그 아이가 자라 백화점 관리부서에서 조용조용 숫자를 적어놓고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당뇨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모습에는 천사가 없다.

내 사람같다는 본능에 이끌려 유부남을 이혼시켜 결혼을 하고
유리창을 산산조각내고 전 남편에게 식칼을 던질 때
차라리 그 안에 그녀를 돌보고 사랑하며 이끌어지는 천사가 엿보일 따름이다.

그 천사는 흙 속에서, 잿 속에서도 날아올랐고
그녀 스스로 하늘거리는 흰 블라우스 날개옷을 영영 입을 수 없도록
앞뒤판을 꿰매버릴 때도 빛을 내뿜어 그녀를 충만케 한다.

평화 아닌 체념, 희생 아닌 자포자기는 여자에게나, 누구에게나 악마다.
기어이 참아낼만큼의 고통을 지속시키는 지옥이다.

자신 안에 머문 천사의 속상임을, 천국으로의 이끌림을 무시하지 않겠다.
수호천사가 이끄는 나의 행복을 쟁취해나가야 하기에.

(200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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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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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모래가 버적버적 박히 고리땡 바지 위에 신데렐라 책을 올려 놓고 읽을 땐
나도 나중에 브레지어를 할 때쯤이면 생의 질적 변화가 다가오리라 믿었고 소망했다.

그날 그날의 에너지를 닥닥 긁어 쓰기와 말하기에 쏟아붓던,
그리고도 다음날 다시 읽고 듣고 써도 마르지 않던 감성범람의 열여덟살엔
나는 은희경을 읽고 내 생의 체계적인 양적 축적을 시작해야겠다 마음 먹은 것 같다.

체계적이래야 대학시절, 직장시절 가끔씩 황활한 성취감에 사로잡혀
나의 소명은 전공분야, 전문업무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순간에도
은희경과 소설책 읽기를 본능적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정도?

그녀의 글이 누구라도 소설가가 되겠군, 할 정도로 성찰이나 기교가 얕아서가 아니다.
신데렐라의 마법이 어디 발생확률이 높아서 다들 동경하며 살겠는가.
다만 누구도 덜하고 더하고 할 것 없이 수억만년전부터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자라면
글의 주인공이 되고 그 소재의 관찰자가 되고 모사자, 변사가 될 수 있으리란 희망 때문이다.

과장된 고독이나 돈오의 잔소리가 없고, 허무를 부르짓거나 희열에 대해 시크한 척 굴지 않는다.
잘난 체도 방관도 없다. 도덕강박증 환자도 속물도 아니다.
그래서 나도 꿈꾸게 된다. 희망하여 몇 자 진척해본다.
아홉번째 그녀의 책에서 희망적 단서는 더욱 평화롭게 느껴진다.
그 단서들은 또한 사람에 대한 이해와 용서, 공감과 불완정성을 감싸는
포용의 레시피이지도 않을까.

(2008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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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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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생제가 많이 든 약을 세시간 간격으로 먹어대서였을까?
부은 편도선을 단 1분도 망각할 수 없도록 육체적으로 허약한 때라서,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엄마아빠에게 거짓말을 한 게 너무 마음 아파서였을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아픈 몸 사이를 비집고 눈물이 배어나오려던 참이라 그랬을지 모른다.
정작 즐겁다는 소설 제목과는 달리 미어터지는 연민과 그리움 때문에
몇 번이고 핑핑 코를 풀어대며 흐느끼느라 책을 덮어야했다.

'즐거운'은 애증을 좋게 써 놓은 것 뿐이었고
'나의'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것,
(설령 그것이 가족이나 사랑같은 추상적이고 이타적인 개념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집'이란 다시 말해 엄마와 아빠, 동생이나 엄마의 남자친구,
성씨를 붙여키우는 고양이 같은 사람(과 생물)간 관계의 구조물인 것이다.

나를 위로해줄 수도, 외롭게 할 수도, 절망에 빠지게 하거나
애증으로 숨막히게 해주면서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집착과 미련에 빠지게 해주는 관계들과 감정들.
그 환유물이 곧 가족이다.

그 가족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의 결핍이나 연민, 동경을 갖고
존재하기 떄문에 소설 속 내용을 누구나 자신에게 대입시켜
미열과 눈물과 땀을 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와 내 가족에 대한 글을 쓰게 되는 날이, 그래서, 오게 될 것이다.
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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