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서 프랑스 현대문학선 1
르 끌레지오 지음, 정혜숙 옮김 / 세계사 / 1989년 3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의 말들이 낯선 것은, 그것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것 같은데도 무언가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어떤 깊이가 말을 하는 것 같고 어느 한순간만 고정시킬수가 있다면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것일 수있는 무엇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순도 없었고 느낄 쓰라림도 수치도 증오도 없었다. 구원도 위안도 없었다. 나 스스로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내가 받았던 것, 내가 판단 할 수 없었던 이 기적적인 선물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가는 운동이었다.'(p57)

이 소설에 대해 단순히 역자의 말처럼 관념에 대한 우위를 말하는 것 만으론 족하지 않다. 소설작가의 글에 대한 원한과 말의 죽음에 대한 글쓰기. 지난 세계를 풍미한 말들이 없어지는 것이 우리 세계에 어울리는 작가의 발상이 아닌가 말이다.

말이 사라지고, 결코 휴식은 아닌, 확연한 침묵이 놀라움처럼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에 대한 독백들. 그 침묵이 정말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그 속에 다시 인간들이 담을 것들은 태고부터 있어온 수많은 유적들이 아닐까...

'내 속에는 언제나 죽어버린 인간들이 있었다. 물질로 되돌아간 사고, 싸늘하게 식어서 대지의 지층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육체, 허물어진 이름, 해체된 행동들........' (p146)

점점 더 새로운 글쓰기에 대해 얘기되어질 때 덧붙여지는 많은 방법들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소용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내면성과 목소리와 말의 모습을 이렇게 조화스럽게 표현하는 작가에게 그런 방법들의 구분을 들이대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다.

이 소설에서 주체는 말이다. 아니면 글쓰기나 기술로 번역되는 에크뤼티르가 된다. 결코 인간은 아니다.

친구가 자랑스레 들고 다니던 끌레지오의 절판된 책인 <눈>이 생각난다. 주말에 그거나 빌려 달라고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디자인하우스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난해한 척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독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독설이 가벼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의 미술에 대한 안목이 깊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그가 탓하는 것은 어느 오브제의 재료가 시장이나 가구점에서 사면 얼마나 하는가 하는 장사꾼적 시각이다.

이 책을 읽고 평론계의 서로 치켜 세워주기를 생각해 본다. 촌평이라는 명목이든 비평이라든 명목이든 사실 말만들어 의미 부여하기가 다인 그런 글쓰기들.

그런 '말만들기'의 예를 이 책에서 정말 재미있게 지적하는 예 하나. 다음의 말을 읽고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라.

1. '태아에 근접하는 파괴 계수의 폭발을 예고하는 기하학적이고 몽유병자적인 의식의 형태'
2. '멜로디의 과잉에 대한 시각적 거리로서 스케치된 흔들리는 진테제'

답 : 1. 부풀어 오른 콘돔
2. 뒷면에 작가의 사인이 있는 텅 빈 캠퍼스

1년 전에 클레의 그림을 담은 독일의 바우하우스에 대한 비디오를 구해 무슨 말인지도 모르며 그 그림에 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작가가 비판하는 대상은 클레나 르네의 그림이 아니라 그 아류작일 뿐.

이 작가는 그 비평능력에 대해 많은 의심을 받았나 보다. 뒷장에 그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몇가지 평을 하는데 교과서에 나오는 글하나를 인용하고 여기에 맞지 않으니 잘못된 그림이다 라는 전개는 글을 끝까지 읽게 해주는 코미디다.

좋은 그림책을 하나 가지는 가치는 있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데거와 선 - 이데아총서 4
한스 페터 헴펠 지음 / 민음사 / 1995년 5월
평점 :
품절


동양학에 관한 좋은 개론서로는 김용옥의 책이 있다. 그의 책 중에 특히 맘에 드는 부분 중 하나가 서양에서 동양학에 관한 연구가 더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점에 관한 논의이다.(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역시 이 서양 작가가 선(禪)에 대해 정말 깊은 이해를 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기껏해야 법정 스님이나 라즈니쉬 류의 교양적인 선(禪)에 관한 이해를 가진 독자들도 유식한 축에 속하는 편이고 더욱이 동양의 신비 사상이 어떠니 서양의 과학문명이니 하는 헛소리만 하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서양인으로서 이만한 사고를 보여줌은 대단하다. 더욱이 혜능과 조주에 대한 인용까지 한 대목은 절로 감탄이 나오게 한다.

'우리 궁사(弓師)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궁수는 활의 상단으로써 하늘을 꿰찌르고, 하단에는 대지를 매달아 하나의 활줄로 고정시킨다. 시위를 세게 당겼다 놓으면, 하나의 활줄이 끊어질 위험이 있다. 이경우 의도를 갖거나 난폭하게 다루는 사람은 결국 흐트러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과 대지 사이의 아물 수 없는 중심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인간은 무한한 관계의 사방에서부터 아집에 빠진 자신을 멀리한 것이다.(p354)

하이데거가 행한 서양의 형이상학적 정신의 해체는 어떤 개념의 확립이나 대상의 정리가 아닌 '하나의 의문과 막연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통찰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선의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다.

이 책은 하이데거의 전기사상부터 후기까지 되집어 보며 나중에 가서야 동양의 선이라는 말과 대비시키는 철저한 비교를 보여준다. 사실 하이데거도 선에 관한 지식에 무지하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이 책은 도식적인 설명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에 대한 전혀 다른 상반된 의미를 보여주는 체계를 취함으로써 하이데거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선(禪)을 경험하는 사람은 '더이상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자신의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 속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또 삶 자체, 즉 현실적인 삶도 아닌 셈이다. 그는 자아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떠받쳐지지 않음으로써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겐 개개의 순간이 모두 영원의 가치를 갖는다. 그는 전적으로 현재 속에, 순간 속에 살고 있다.'

저자는 하이데거를 이해한다는 것이 단지 '존재와 시간'의 목표들을 잘 구성하는 것이나 또 그것들을 문헌학자들처럼 저서들에서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禪)적인 숙고 속에서 우리들의 삶과 같이 다의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은 결코 그의 책 안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작품.

투르니에는 '항해일지'라는 로빈슨의 섬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이야기로써 소설 안에 내포된 철학에 대해 설명한다. 물론 후반부의 '태양의 섬'에 이르면 그 자체로 이야기화 되지만, 철학자이고자 했던 작자의 목소리가 가장 선명히 들어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마 상투적인 얘기로서의 타자성 '나는 너다'라는 말을 잊어버린다면 이 소설을 독해해 내기가 쉬울 것인데, 왜냐하면 아마 타자란 일종의 감추어진 세계관이기에 명확히 무엇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맑시즘 같은 사회 사상 마저 이데올로기 로서 타자가 되는 것이니까.

투르니에 자신이 직접 말하는 타자란 베르그송이 말하는 일종의 직관에 대한 해설을 그대로 보는 듯 하다. 로빈슨이 섬을 영국식으로 식민지 하기 위해 가축을 기르고 성을 축조하며 헌법을 만드는 등의 일련의 질서 지우기는 주체에 의한 인식에 해당된다. 하지만 우연히 섬 안에서 시간을 지배하던 물시계가 멈추어 버림으로써 과학과 기술, 노동과 사회적 야망을 상징하는 세계는 문을 닫아버린다.

'어두운 방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촛불 하나가 어떤 물체는 밝게 비추고 다른 물체들은 어둠 속에 남겨둔다. 그것들은 잠시동안 빛을 받아서 어둠 속에서 솟아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그런데 그들이 빛을 받아 밝아 지건 않건 간에 그들의 본질이나 존재는 변함이 없다. 그것들은 빛살이 그들 위에 던져지기 이전에도 그러했고 빛이 비쳐지는 동안이나 그후에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로빈슨의 주체로서 상징되는 '촛불'의 불빛이 사라진 후에도 소박하게 존재하던 사물들의 움직임은 계속 될 것이다. 스페란자(무인도 이름, 희망이라는 뜻)에 있는 모든 식물들과 모래, 태양들은 대상의 위치에서 벗어나 각각 그에 해당하는 주체를 가진다. 결국 세계는 송두리째 '나의 영혼 속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

그 후, 스페란자는 더 이상 사물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여인으로서 그 내밀함을 드러낸다. 로빈슨은 장미빛 골짜기의 나무와 섹스를 하기도 하고 그 후 섬은 새로운 식물들을 그 사랑의 결과로 잉태하기도 한다. 로빈슨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책인 성경의 '아가서'는 그 결합을 축복해주는 또다른 타자이다.

'이정도의 깊이에서는 스페란자의 여성적 본질에는 모성(母性)의 모든 속성이 깃들여 있었다.'(p127)

'나를 그대 가슴위에 도장처럼 찍으시라. 그대 팔 위에 도장처럼 찍으시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이기에!'(p162)

그곳에 사는 인디언들인 아로캉족의 희생제물이 될 뻔하다가 로빈슨의 실수로 목숨을 구하여 그의 노예가 된 방드르디(영어로 프라이데이, 금요일)는 로빈슨이 인식하지 못한 모든 신비를 가진 자연의 화신이 된다.

투르니에 자신은 수많은 상징과 신화들을 소설책에다 써먹는다. 한가지 예를 들면,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코울리지의 '노수부의 노래'에 나오는 새인 알바트로스와 거기에 나오는 죽음과 재생의 모티브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이젠 알바트로스가 그전의 독수리보다 낫고 푸른색이 붉은 색보다는 낫지'

방드르디 와의 교감 속에 직관과 본질적 인식에 익숙해진 로빈슨에게 더 이상 독수리로 대표되는 물질적 시선이 아니라 관조적이고 새로운 인간이 된 로빈슨에게 '시인'들의 새인 알바트로스가 더욱 적합한 것이다.

어려운 듯 하지만 그 안에 인간 정신이 승화되는 모습을 담고 있고 서술되는 상징들의 상호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삶에 '초상'을 부여한다.

정말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들을 다 읽기 위해 불어를 배우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 예하 / 1990년 9월
평점 :
절판


성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일 것이다. 마음의 모든 조작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무한한 공간이며 해방. 우리 마음속에 어떤 규율이 없을 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자신의 내부에서 번져 나올 수 있다. 이런 정치적인 것도 아니며 권력적이지도 않은 변화는 우리에게 단지 '반항'같이 보일 뿐이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좀 더 본질 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거야. 좀 더 작은 것인 상냥함, 서로 아끼는 마음 그런 거란 말이야. 우리는 세상의 다른 놈들과는 다른 차원에 살고 있으니까 서로가 더 아끼자는 거야'

류와 릴리의 동료들은 흑인들을 불러 함께 그룹섹스를 하기도 하고, 마약, 밴드 공연에서 벌거벗고 춤추기, 지하철에서 여자 옷째기(마무리로 다같이 침뱃기) 등등 사회에서 이탈된 모습을 보여준다.

등장인물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사회에 얽매어 있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진정하게 자유롭다는 것도 아닌데, 그런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종의 용기를 헛된 방황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해탈의 키치로서 '인도'가 있는 것처럼 그러한 추구는 각종 충동적 행위로 드러나게 된다.

즉 자기 삶에 있어서의 자유를 위한 변화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면에서 찾을 수 없기에 차라리 외부 환경이 바뀌는 것을 꿈꾸기도 한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미사일이 갑자기 폭발하기와 같은.

'그래서 미사일을 향해 마음속으로 소리치는 거죠. 폭발하라고 제발 폭발해 달라고.'

그런 키치적 방황이 아니라 어떤 진정함으로써의 자유는 '새'의 이미지로 류에게 나타난다.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를 죽여야 하지만 한순간에 투명해져 버리는 그런 우아한 곡선을 가진 새를 류는 항상 바라고 있다.

'나는 지면에 엎드려 새를 기다렸다. 새가 날아와서 따뜻한 빛이 이곳까지 와닿으면 길게 뻗은 나의 그림자가 그 회색빛 새와 파인 애플을 감쌀 것이리라.'

일본의 사소설 전통에 대한 상식이 없다면 소설 초반에 일어나는 온갖 성적인 묘사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 있으리라. 예를 들어 유미리 소설을 둘러싸고 일어난 평론가 이광호와 한기(문예중앙)가 벌인 논쟁같은 경우, 한기 같은 경우는 유미리 작품에 대해 아직도 구태의연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론이나 들이대고 있으니 웃기다 못해 한심할 지경이다.

하루끼보다는 가벼운 글을 쓴다고 생각되지만 특유의 신비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