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선 - 이데아총서 4
한스 페터 헴펠 지음 / 민음사 / 1995년 5월
평점 :
품절


동양학에 관한 좋은 개론서로는 김용옥의 책이 있다. 그의 책 중에 특히 맘에 드는 부분 중 하나가 서양에서 동양학에 관한 연구가 더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점에 관한 논의이다.(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역시 이 서양 작가가 선(禪)에 대해 정말 깊은 이해를 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기껏해야 법정 스님이나 라즈니쉬 류의 교양적인 선(禪)에 관한 이해를 가진 독자들도 유식한 축에 속하는 편이고 더욱이 동양의 신비 사상이 어떠니 서양의 과학문명이니 하는 헛소리만 하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서양인으로서 이만한 사고를 보여줌은 대단하다. 더욱이 혜능과 조주에 대한 인용까지 한 대목은 절로 감탄이 나오게 한다.

'우리 궁사(弓師)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궁수는 활의 상단으로써 하늘을 꿰찌르고, 하단에는 대지를 매달아 하나의 활줄로 고정시킨다. 시위를 세게 당겼다 놓으면, 하나의 활줄이 끊어질 위험이 있다. 이경우 의도를 갖거나 난폭하게 다루는 사람은 결국 흐트러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과 대지 사이의 아물 수 없는 중심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인간은 무한한 관계의 사방에서부터 아집에 빠진 자신을 멀리한 것이다.(p354)

하이데거가 행한 서양의 형이상학적 정신의 해체는 어떤 개념의 확립이나 대상의 정리가 아닌 '하나의 의문과 막연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통찰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선의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다.

이 책은 하이데거의 전기사상부터 후기까지 되집어 보며 나중에 가서야 동양의 선이라는 말과 대비시키는 철저한 비교를 보여준다. 사실 하이데거도 선에 관한 지식에 무지하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이 책은 도식적인 설명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에 대한 전혀 다른 상반된 의미를 보여주는 체계를 취함으로써 하이데거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선(禪)을 경험하는 사람은 '더이상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자신의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 속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또 삶 자체, 즉 현실적인 삶도 아닌 셈이다. 그는 자아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떠받쳐지지 않음으로써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겐 개개의 순간이 모두 영원의 가치를 갖는다. 그는 전적으로 현재 속에, 순간 속에 살고 있다.'

저자는 하이데거를 이해한다는 것이 단지 '존재와 시간'의 목표들을 잘 구성하는 것이나 또 그것들을 문헌학자들처럼 저서들에서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禪)적인 숙고 속에서 우리들의 삶과 같이 다의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은 결코 그의 책 안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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