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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삐라로 묻어라 - 한국전쟁기 미국의 심리전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10월
평점 :
1.
“저녁때였다.
내 주위를 애들이 맨발로 하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새된 소리를 마구 질러대면서 공중을 날고 있는 하얀 삼각형 모양을 잡으려고 벼룩처럼 날뛰고 있었다. 공중에 떠다니고 있는 하얀 것은 종이로 접은 비행기였는데, 아이들은 종이비행기가 땅에 흩날려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다 못해 남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뛰어올라 빼앗으려는 바람에 몇 번이나 땀내 나는 몸을 나에게 부딪쳤다.
그렇게 날뛰면서도 아이들의 눈은 하나같이 그 농기구 창고 이층을 향해 있었고, 아무렇게나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는 사람의 하얀 팔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흙먼지로 불투명해진 창 중 열려 있는 창 하나의 어두운 내부에서 하얀 팔은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그러나 공중에는 늘 두세 개의 비행기가 떠 있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잇달아서, 때로는 종이비행기 두 개를 한 번에 날려보내고 있었다.
종이비행기는 여름해가 진 직후 새의 잿빛 깃털처럼 부드럽게 부푼 공기를 떠다니며 천천히 크게 선회하면서 아이들이 뻗치고 있는 팔들 사이를 빠져나가 마른 땅 위에 떨어졌다.”
<벽화>의 첫 장면을 보면, 흩뿌려지는 종이와 비행기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한국전쟁 발발 후 미 육군 장관 프랭크 페이스는 “적을 종이로 묻어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적을 삐라로 묻으라는 뜻이었다. 유엔군이 한국전쟁 기간 동안 살포한 삐라는 25억장 이상으로 이는 한반도를 스무 번 뒤덮고 지구를 열 바퀴 돌고도 남는 양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삐라가 처음 등장한 것은 제1차대전 때였고 2차 대전 때에는 더 많은 양이 전선에 뿌려진다. 한국전쟁 때 뿌려진 삐라는 이러한 경험치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총력전이라 일컬어지는 근대전은 인간을 동원하고 인간을 학살하는 전쟁이었다. 따라서 심리전은 이러한 ‘인간’의 전쟁에서 인간의 심리를 자극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일으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 근대전의 특성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심리전은 전쟁 중일 때 뿐 아니라 전후에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심리전은 전후 사회를 전시사회로 조직하고 재생산하는 기제였다.
이임하는 삐라들 속 한국전쟁이 ‘한국을 자주통일 자주국가로 세우기 위한 유엔의 끊임없는 노력의 기록이다’로 시작하여 ‘친애하는 한국시민들이여…유엔은 여러분의 협력으로 한국의 통일과 재건을 위하야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끝나고 있다고 정리한다. 문제는 이러한 서사는 모두 북한의 군인과 민간인, 중국군을 대상으로 생산된 삐라 속에 들어 있는 거이었는데, 어느새 한국의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교육내용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심리전 실험장이었고 이를 연구한 로빈은 한국전쟁 때 마련된 심리전이 1960년대 베트남 전쟁, 1990년대 걸프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북한의 선전은 사회주의 선전선동론을 기반으로 첫 대상은 자국민이었고 “제국주의, 식민주의, 노예, 독립, 자유, 평등, 민주주의, 평등하게 사는 인민, 잔학행위, 자유, 민주적 개혁, 내전, 세계 평화와 안전, 민주적 진보적 운동, 사회주의” 따위를 선전 주제로 삼았다.
앞서 언급한 “적을 종이로 묻어라”는 지시처럼 미국의 심리전은 자국민이 아닌 전장의 ‘적’을 대상으로 했고, 전후에도 변함이 없었고, 아군 선험적으로 선한 존재로 상정되었다. 민주주의, 자유, 자본주의, 개인, 평등을 설명하는 방법이 아닌 공산주의라는 적의 이미지와 호명을 생산했다. 냉전세대가 진리로 믿었던 이미지와 상징은 대개 심리전에서 비롯되었다. 삐라를 포한한 심리전은 인종, 계급, 성별로 사회를 위계화하는 익숙한 틀과 냉전에 걸맞은 반공주의와 결합했고, 증오와 두려움을 극대화한 이미지를 생산했다.
삐라에서 재현된 여성 이미지는 후방에서 남편이나 아들을 기다리는, 보호받는 여성이자, 외국 군대의 강간의 대상으로 재현되었다.
심리전의 이미지, 상징, 호명은 선-악 구도로 세계를 분할하고 어둠-빛, 결박-자유, 죽음-부활, 부패-재생 따위의 이분법을 활용했다. 구체적으로 유엔-공산세계라는 호명이 자주 불리게 되었다. 삐라에서는 유엔의 목적을 “평화는 유엔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목적이다. 통일은 유엔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목적이다. 재건은 유엔의 한국에 대한 경제적 목적이다”로 정리한다. 실제로 신생기구인 유엔은 한국전쟁으로 명실상부하게 세계기구로 발돋움하게 된다.
심리전 프로그램은 포로들의 교육 자료로도 활용되었다. 이러한 포로 교육 프로그램은 한국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전환된다. 미군정기 공민교과서는 사회운영 원리인 자유, 인격, 민주정치, 정의, 노동, 사회와 관련된 항목을 가르쳤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는 도의 교과서와 1960년대 도덕교과서에서 반공이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을 시키는 교사 지침서에는 적개심, 신고정신, 무장정신을 불러일으키도록 제시하였다. 또한 교과서 디자인도 삽화가 삐라의 대본과 같은 이미지를 닮아 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한국사회의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교육을 통해서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정치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데, 이러한 학습 방법은 자국을 선험적인 ‘완전한’ 사회로 명시했던 한국전쟁때의 심리전을 닮아 있다고 이임하는 지적한다. 심리전은 송환 포로에게 사회 운영 원리를 가르치기보다 선험적인 국민의 도리와 의무만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임하는 한국전쟁 때 뿌려진 1억장 이상의 삐라의 생산과 살포가 과잉생산과 소비를 닮았다고 지적한다. 냉전은 과잉생산과 소비를 재생산하는 촉매였으며 미국과 소련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냉전을 만들고 소비하는 중심이었다. 이러한 냉전은 무한경쟁과 과잉생산, 과인소비의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잉태하고 있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1억장의 삐라로 뒤덮였던 한국이 신자유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여기에서 찾고 있다. 한국이 아직도 냉전의 틀 속에 갇혀 냉전과 결합된 신자유주의는 왜곡되고 극단적 형태를 산출하는데, 경쟁, 부, 과잉생산과 소비가 최고 가치이기 때문에, 예전에 ‘정의’라고 외쳤던 가치와 윤리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고 이임하는 말한다.
2.
『적을 삐라로 묻어라』는 5개의 장으로 나누어 한국전쟁의 삐라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1장에서는 미국의 심리전 정책과 기구, 2장에서는 극동사령부와 8군사령부의 심리전 매체, 3장에서는 삐라 내용의 분석과 삐라 속 상징, 이미지, 기호에 대해서, 4장에서는 삐라의 상징, 이미지, 재생산 구조, 5장에서는 심리전의 상징, 이미지, 기호가 한국사회의 신념, 윤리, 규범, 가치로 전환되는 과정에 대해서 논한다.
1장의 첫 부분은 ‘1950년 6월 25일 평온한 일요일 아침, 한국군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침략당했다’는 한국전쟁 발발의 서사로에서 시작한다. 이임하는 이 서사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라는 의미가 미국이 전쟁이 시작될 때 심리전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다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2차 대전 때 미국은 선전, 사상전이란 용어를 심리전으로 바꾸어 ‘전장에서의 선전, 우방국 군대를 위한 이데올로기 교육, 국내에서 사기와 규율 진작과 같은 전시 문제들에 심리학과 사회심리학을 응용하는 것’으로 확장시켰다. 나치의 선전이 대중동원을 위해 자국민을 향한 것이었다면, 미국의 사상전은 적의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심리전은 표면적인 적대행위가 종식된 뒤에도 계속된다는 원칙을 따르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매카시즘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군사적 필요를 넘어 심리전의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적 잠재성을 이해하고 전후 일본에 대한 점령 정책의 일환으로 심리전을 계획한다. 이것은 심리전이라는 것이 지배와 통치를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심리전의 목표는 빈곤과 종속, 고질적인 부패라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던 급진적인 사회운동의 열망을 좌절시키는 데 있었다. 한국전쟁 동안 미국은 정치가 아닌 개인의 행동에 초점을 두어 심리전의 표준적 교의를 만들어 제공했다.
1장에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선전기구였던 전략활동국(OSS)와 전쟁정보국(OWI)가 중앙정보단(CIG)로 바뀌고 1947년 7월 중앙정보부(CIA)로 연속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전쟁 동안 모든 심리전은 극동사령부의 정책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총사령부 특별참모 부서인 심리전부(PWS, 1951년 승격)는 한국전쟁 심리전의 총책임 기구로 기획정책과 첩보과, 작전과, 특수제작과로 구성되었다.
심리전의 형식과 내용은 모두 극동사령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1950년 극동사령부 심리전과(PWB)는 심리전의 4가지 원칙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지침은 전쟁 초기 심리전의 목표가 미군의 전쟁 개입을 정당화 하는 데 있었음을 알려준다.
첫째, 언제나 미국의 의견으로 말하지 말고 유엔으로 말하라.
둘째, 내전이 아니라 침략에 따른 충돌로 다루어라.
셋째,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용어가 아닌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눈에 띄는 용어로 공산주의를 공격하라.
넷째, 단순한 표현과 구체적 주제에 집중하라. 곧 쉽게 표현하라.
1950년 10월 3일 ‘정책지침 10호’는 공식 발표가 있기까지 38선을 넘는 문제를 거론하지 말도록 하는 등 심리전의 정책을 살펴보면 미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을 알 수 있다.
2장에서는 삐라의 제작 과정과 삐라의 살포, 생산 기관에 따른 삐라의 분류와 삐라의 종류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삐라는 극동사령부 심리전부와 8군사령부 심리전과, 국방부 정훈국에서 제작되었고, 모든 삐라는 극동사령부 심리전부의 승인을 받았다. 삐라의 문구와 디자인은 선전 대상의 구체적 행위를 불러 올 수 있게 하기 위해 6하원칙으로 구성되었다.
삐라의 살포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요건은 “첫째, 인구, 둘째, 도로, 철도 연결지역이나 운송 지역과 같은 중요한 지점, 셋째 군사지역”이었다.
심리전의 대상은 북한군 점령 지역 안의 남한 민간인, 북한군과 중국군 그리고 북한 지역 민간인이었다. 극동사령부와 8군사령부의 월간 보고서에는 삐라와 이를 소개하는 메모가 함께 딸려 있었는데, 문서에 삐라의 목적, 언어, 번호, 배포대상, 해설, 삽화, 내용 등이 쓰여 있어 삐라의 목적과 내용, 표현방식, 배포 대상까지 알 수 있다. 삐라는 생산기관에 따라 전쟁 초기의 미 공보원과 국방부 정훈국의 삐라, 8군사령부에서 생산한 삐라로 나뉜다.
1950년 6월 28일에 남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최초의 삐라가 뿌려지고, 북한군을 대상으로 하는 삐라는 1950년 8월 9일에 뿌려진다. 그리고 1953년 6월 23일 중국과 북한군을 대상으로 뿌려진 삐라가 마지막 삐라가 된다.
‘낙하산 뉴스’는 2차세계대전 때 일본인을 대상으로 뿌린 삐라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97쪽의 사진을 보면 2차대전 당시의 낙하산 뉴스보다 매우 소략한 소식지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혹독하게 비판당했다.
낙하산 뉴스를 대체할 매체로 <자유세계>가 만들어졌고, 주간 100만에서 200만장 살포되었다. 자유세계와 노예세계로 양분하여 자유세계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발간의도를 밝히고 있는 <자유세계>는 유엔 관련 기사, 세계정세, 한국 관련 기사, 전쟁 소식을 주로 실었다. 한국 관련 기사는 정치적 기사보다 사회, 경제에 초점을 두고 의료, 교육, 고아, 피난민 관련 내용이 많았다.
유엔군 최고 작전 책임자였던 마크 클라크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가장 위대한 심리전의 승리는 1952년 초 한명의 전쟁 특파원이 술을 마시면서 제기한 문제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작전명이 물라(Moolah)이다. 이는 남한으로 전투 가능한 MIG기를 가져오는 조종사에게 5만 달러를 지급하고 처음으로 오는 조종사에게는 5만 달러를 추가 지급한다는 내용. 실제로 물라작전 때문에 귀순한 미그기 조종사는 없었다. 그러나 물라 작전 이후 미그기 조종사들은 전쟁을 통틀어 가장 적은 비행 횟수를 기록했다. 1953년 9월 21일에 북한군 중위 노근석이 미그-15를 타고 투항해 10만 달러를 받았지만, 이는 물라 작전의 영향은 아니었다고 한다.
삐라의 대표적인 유형에는 1)안전보장 증명서 2)좋은 대우, 3)도망과 투항, 4)개인의 곤경과 선물이 있다. 안전보장 증명서는 투항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특정 전선에 뿌려져 지역명과 부대 위치를 구체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2차 대전에 일본군에 뿌린 삐라는 ‘열심히 싸웠지만 패했고 앞으로는 일본을 재건할 임무가 있기’에 투항하라고 권유하지만, 한국전쟁 때의 삐라는 미군과 유엔이 ‘선한 자’이자 ‘정의’이기 때문에 투항의 요구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안전보장 증명서 형식의 삐라에는 투항하는 방법은 있으나 투항해야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게 된다.
좋은 대우를 주제로 한 삐라는 포로들이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리는 삐라로 포로가 직접 고백형 편지를 쓰게 하여 현실감을 높이게 했다.
미국은 심리전의 수행에서 도망과 투항이라는 순차적 절차를 거친다고 보았다. 투항이 돌발적 행위가 아니라 삐라 살포(사기 저하)->공포스러운 폭격->삐라 살포(항복 권유)라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중국군을 상대로 도망경로를 세세하게 알려주는 삐라도 살포하였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는 일본 사회 재건의 임무를 언급했지만, 한국전쟁 때에는 재건이 유엔사령부의 일이라 여겼기 때문에 북한군이나 빨치산을 재건의 임무로 설득하지 않았다.
미국의 행동주의 사회과학자들은 심리전에서 감성적 개인의 곤경이나 죽음에 호소할 것을 충고했다. 이에 겨울철의 동상, 죽음 새해 선물과 같은 삐라가 활용되었다.
3장에서는 적 호명과 이미지 만들기, 성별화된 적, 자유세계와 노예세계, 유엔의 활용, 이데올로기가 아닌 개인의 감정 활요 등의 삐라에서의 적 이미지와 상징 그리고 기호 만들기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미국의 심리전의 일차적 대상은 자국민이 아니라 ‘적’군이나 민간인이었으므로 적을 어떻게 호명할 것인가, 적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적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심리전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 때에는 미국 행동주의 사회과학자들의 영향이 컸다. 미국 사회과학자들은 심리전 작전명을 ‘이아고’, ‘데스데모나’, ‘나이팅게일’ 등 문학작품에서 빌어다 쓰게 했는데 이것은 심리전의 기호와 상징, 언어 속에 담긴 거짓, 협박, 차별, 폭력 따위를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양 드러내려는 의도였다. 이임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분석보다 중요한 일은 이런 호명과 재현이고 이의 구조적 재생산이었다고 지적한다. 심리전은 전쟁의 삐라로 시작되었지만 전후에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 살아가는 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삐라를 포함한 심리전은 인종, 계급, 성별이라는 익숙한 틀과 냉전에 걸맞은 반공주의가 결합하면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증오와 두려움을 극대화한 이미지와 ‘호명’이 나타난다. 이임하는 태평양 전쟁 시기부터 삐라에 그려진 적의 이미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2차대전 시기에 일본인의 투항을 이끌어 내기 위해 ‘갱스터 군국주의자’와 ‘평화주의자 천황’의 대립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는 전쟁의 모든 원인과 책임을 군국주의자에게 묻고 사병들의 정신적 지주인 천황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작전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의 삐라에 중국은 오랑캐 또는 러시아의 개로 이미지화 된다. 중국 지도자들을 중국 인민이 아닌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존재로 묘사함으로서 중국 군인이 투항할 것을 유도하였다. 스탈린은 죽음의 사자로 이미지화 되었는데, 군국주의라는 말이 일본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극동사령부는 군국주의란 표현을 쓰지 않도록 하였다.
전쟁 전부터 김일성은 꼭두각시, 가짜의 이미지가 대표적이었다. 가짜 김일성을 선전하는 삐라에 대해 작전 연구소는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김일성에 대한 반대를 가져와야 한다고 지적했고 ‘김일성의 죄악사’ 등을 내용으로 하여 삐라가 만들어 졌다.
한국전쟁 심리전에서는 적에 대한 비인간 이미지(뱀, 문어, 곰 등)를 자주 사용하지 않았으나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의 폭력과 비인간성을 강조하면서 좌익세력을 짐승, 비인간, 악마로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레드 콤플렉스와 뿔 달린 괴물과 같은 이미지들이 전쟁동안 그려졌다. 전쟁이 끝나면서 비인간 이미지가 더욱 강렬해졌고 뱀, 늑대, 돼지 따위로 구체화 되었다.
삐라를 보면 적이 성별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극동사령부와 8군 사령부에서 생산한 삐라에서 소련과 중국은 자주 she 또는 her로 불렸다. 오랫동안 식민지 개척국과 식민 상대국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라는 젠더와 문화적 구조로 표상되어 왔다. 2차대전 시기에도 미군의 심리전은 일본을 철저히 여성화하였고 전쟁 뒤 미국과 일본 사이의 성적 관계는 정부 스스로 알선자가 되어 미군 병사를 위한 위안부를 모집한 일, ‘도쿄의 꽃 파는 처녀’, ‘긴자의 캉캉 처녀’ 따위로 긴자를 노래한 유행가의 가사까지 갖가지 일상 풍경으로 드러났다.
한국전쟁 때 극동사령부는 소련과 중국을 ‘여성’으로 호명했다. 이임하는 여성, ‘그녀’로의 호명은 이미 모든 권력구조에서 위계화된 여성성을 소련의 이미지와 결합시킴으로써 소련을 저열하다고 비난하는 동시에 여성성을 침해하는 행위였음을 지적한다.
이임하는 삐라 속의 남성은 자유의지를 갖고 실재하는 사람이라면 여성은 자유의지조차 없는 그져 상징과 대표성으로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상징과 대표성에는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전쟁 뒤 재건 과정에서 권력 구조가 작동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2차대전의 일본 본토의 심리전 전략 중 하나는 남성들의 일을 여성들이 하는 것으로 하여 일본인에게 전통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조장하고자 했는데, 이는 한국전쟁 삐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농촌에 남성이 없어 여성들이 농사일을 하는 그림이나, 남성의 부재로 결혼하지 못하고 아들을 낳지 못해 대가 끓어지리라는 공포 조성, 남자들이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여성들이 무기사용법을 배우는 그림 등을 그 내용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임하는 이런 삐라들이 여성들에게도 똑같은 두려움을 주었을까? 질문한다.
삐라에서 가장 많이 재현되는 주제 중 하나는 아들과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이라고 한다. 가족 간의 연대의 단절과 파괴는 중국군에게 반발을 일으키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후방의 가족들이 공산당의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식량과 거처를 빼앗기고 있다는 위협을 그림으로 실감나게 묘사한다. 많은 삐라들이 가족 속의 남성의 빈자리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다 공산주의 때문임을 강조한다.
삐라에 재현된 성적 판타지는 크게 ‘순결’(정조)과 ‘연애’로 나뉜다. 연애의 여성 이미지는 ‘낭만적’ 사랑을 암시하는 장면들과 ‘순결’의 이미지는 ‘강간’을 당하는 모습이다. 한국전쟁 심리전은 자국민이 아닌 적 민간인과 군인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스파이 이미지보다 후방 여성을 강간하는 외국 군대나 외국 군대와 놀아나는 후방 여성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한국전쟁의 심리전에서 병사들에게 유엔은 자유를 공산당은 노예와 죽음을 인식시키는 데 삐라의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유세계’보다 더 자주 호명된 명칭은 ‘유엔’이었고 한국전쟁 때 미국 심리전에서의 세계는 유엔과 공산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대비 자체가 틀렸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심리전에서 유엔은 정치나 사회체제를 의미했고 자유세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전쟁 초기 국방부 정훈국이 생산한 삐라에는 유엔보다 미국이라는 표현이 더 자주 등장했다. 북한은 일본 제국주의가 연상되도록 미국을 미 제국주의자로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선전에 대응해 극동사령부 심리전부는 미국이 아닌 유엔, 미군이 아닌 유엔군이란 용어를 강조하여 미국의 이익을 염두에 두었다. 미국은 유엔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우위에 서고, 전쟁이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에도 세계 여론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였다.
1950년 11월 유엔의 참전 목적을 알리는 구호는 ‘평화/통일/재건’이었는데 이는 중국의 슬로건인 ‘미국에 저항, 북한에 원조, 고향을 보호’에 대항한 것이었다. 유엔은 신생 세계기구에 불과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세계기구로서 힘을 갖게 되었다.
미국은 평화를 이미지화 하는데 두 가지 단상을 이용했는데 하나는 현실에 없는 판타지의 이용, 다른 하나는 군사력에 의한 제압이었다. 행복했던 시절을 이미지화 하고 이를 파괴한 원인에 공산주의가 위치하고 다시 행복했던 시절을 회복시켜주는 쪽에 유엔이 위치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유엔의 군사력이 필요하고 이 군사력은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임을 선전한다. 이러한 방식은 냉전 시대에 ‘평화’를 제기하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미국과 소련의 끝없는 군비 경쟁을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다. 즉 ‘평화’는 공존이 아닌 상대방을 군사력으로 억누르는 힘이었던 것이다.
통일은 민족의 정통성을 담보하는 핏줄의 강조하여 ‘한민족, 한핏줄, 한 할아버지’라는 민족주의를 강조하였다. 투항을 권유할 때에도 ‘같은 형제’임을 호소하고 북한군은 동족이지만 중국군은 동족이 아니라 섬멸해야한다고 했다. 이러한 단일민족이라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인종차별주의를 강화해갔는데, 비이성적인 한국인이기 때문에 무지하고 공산주의가 퍼져 있다는 등의 동양에 대한 선입견이 반영된 인종주의가 강화되기도 하였다.
미군은 제2차대전 때 일본군에게 재건의 임무를 강조하며 투항을 권했지만, 한국전쟁 때 미군은 북한군에게 ‘같은 피’만을 강조해 항복하라고 한다. 한국전쟁 삐라에서 재건은 한국인의 몫이 아니라 유엔의 임무였고 한국인은 구호대상으로 재현된다. 재현의 이미지화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재현되는데 유엔의 구호 물자 나열과 약자의 보호와 구호의 이미지이다. 유엔이 한국인에게 구세주로 각인된 계기는 이러한 원조와 재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