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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ㅣ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항재 옮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1. 고골의『외투』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 도스토예프스키
추운 계절이 다가오면 장롱 속에 깊숙이 박혀 큼큼한 냄새가 잔뜩 묻어있는 외투를 꺼내입어본다. 코끝이 시려오는 계절이면 길에는 외투로 온몸을 포근히 감싸고 서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외투를 입는다는 것은 춥고 시린 계절이 다가온다는 의미이며,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우리들의 모습 그 자체다. 이처럼 고골은 ‘외투’가 가진 상징성으로 하여금 당시에 처한 러시아의 모습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했다. 고골의『외투』는 ‘외투’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들을 작품 속 주인공 아까끼와 그의 외투를 통해 나타낸다.『외투』의 작가 고골은 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라 불릴만큼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단순한 소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 있는 작품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작품 속 사건은 주인공의 ‘새로운 외투’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에비치는 그의 인생에서 단 한번도 주인공의 자리에 서 본적이 없는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다. 관청의 말단 직원인 아까끼는 간단한 서류를 베껴 적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줄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묵묵히 몰두하는 모습은 우스움을 넘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느 날 아까끼는 자신의 외투가 너무 낡고 헤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선을 맡기려한다. 그러나 외투는 너무 낡고 낡아 더 이상 손 볼 수 없는 상태였고, 수선공은 그에게 새로운 외투를 살 것을 제안한다. 외투를 사야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까끼는 외투를 위해 저녁마다 마시던 차를 끊고, 촛불도 켜지 않고, 심지어 저녁을 굶는 것에도 익숙해지기 이른다. 그러나 비록 삶은 이전보다 궁핍해졌지만 새로 생길 외투를 생각하는 아까끼는 이전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마침내 외투를 처음 입은 날, 아까끼는 이전과는 다른 동료들의 반응을 얻기도 하고, 파티에 초대되기도 한다. 그러나 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갑작스레 강도에게 외투를 빼앗기고 만다. 이리저리 외투를 찾아보려 발버둥 치던 아까끼는 끝끝내 외투를 찾지 못한 아까끼는 죽음을 맞이하고 유령으로 다시 나타난다.
작품 속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주인공 아까끼가 낡은 외투를 수선하다 못해 새로운 외투를 구입하게 되지만 결국 다시 강도에게 강탈당한다. 끝내 외투를 찾지 못한 아까끼는 죽음을 맞이하고 유령이 되어 이 곳 저 곳을 떠돌아 다닌다.
2. 희극적인 요소
작품『외투』속에는 작가 고골의 창조력과 문학적 상상력이 살아 숨쉰다. 곳곳에는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 즉 희극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며, 그 웃음에 담겨진 의미와 그 웃음 밑바탕에 깔린 작가의 의도는 다양하다.
주인공의 이름 ‘아까끼 아까끼에비치’가 지어진 과정을 보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산모는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고민하다 결국 맘에 드는 것이 없자, 그냥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까끼’라는 이름을 지어버린다. 사람의 이름이란 그 사람을 대표하는 만큼 매우 중요하게 여거진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서로 좋은 이름을 짓고자 여기 저기 도움을 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아까끼 아까끼에비치’는 예외였다. 그의 이름에 특별한 이유따윈 없었다. 더한 것은 ‘아까끼’라는 이름이 러시아어에서 ‘응가’를 뜻하는 단어와 어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안타까운 웃음을 유발한다.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 없고 키가 작은 그 관리는 약간 얽은 자국이 있는 불그스름한 얼굴에 눈에 띄게 안 좋았으며, 이마가 조금 벗겨지고, 양 볼에 주름이 진데다 치질 환자 같은 얼굴빛을 하고 있다.
책 속에서 묘사하는 주인공 아까끼의 모습은 매우 우스꽝스럽다. 아까끼의 동료 중 어떤이는 그가 마치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머리가 벗겨지고 관리 제복을 입은 채 태어나기라도 한 것 같다고 조롱하기도 한다. 아까끼의 모습은 멀쩡한 부분이라는 눈뜨고 찾을 수 없을 만큼 여기 저기 엉성한 부분 투성이다. 이처럼 작품 곳곳에서 등장하는 아까끼에 대한 묘사는 단순한 그려내기가 아닌 작가에 의해 의도된 과장과 뒤틀림이다. 아까끼가 대표하는 당시 소시민들의 애환과 뒤틀린 사회의 부패한 모습이 부조화스러운 아까끼의 얼굴에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제복은 녹색이 아니라 불그스레한 밀가루 색이었다. 제복의 깃이 좁고 낮아서 그 깃 사이로 비어져 나온 목은 사실 길지 않은데도 유별나게 길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러시아에 있는 외국인들이 너무나도 안고 다녀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석고 고양이 같았다. 제복에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묻히고 다녔다. 지푸라기나 어떤 실밥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아까끼는 매일같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다닌다. 그가 늘상 입고 다니는 외투는 천이 닳고 닳아 속이 훤히 비칠 정도여서 추운 뻬쩨르부르그의 날씨를 견디기에 무리였다. 그의 외투는 항상 동료들의 놀림감이었고, 그나마 하나 있던 그 외투마저도 구멍이 뚫리고 안감이 헤져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러한 복장에 대한 희화화는 작품의 중심이 되는 사건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제복으로 대표되는 당시 관료사회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없을 때에는 취미 삼아서 자기가 보관해둘 문서의 사본을 만들곤 했다. 문체가 아름답다거나 하는 것보다, 어떤 새로운 인물이나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가는 서류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경우 그는 반드시 복사해두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마음이 흐뭇해지도록 정서를 하고 나면 그는 내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또 무슨 일거리를 주시려니 생각하고, 미리부터 내일 일을 머리 속에 그려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그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연봉 4백 루블의 초라한 자기 운명에 만족할 줄 아는 인간은 이렇게 평화로운 생활을 보냈다.
이름, 외모, 복장 뿐만 아니라, 그의 행동 또한 우리의 웃음을 자아낸다. 아까끼는 관청에서 문서를 정서하는 일을 맡고 있는데, 그는 항상 기계적으로 문서를 베껴낸다. 길 한복판에서도 가지런한 필체로 쓰여진 글씨들에게만 정신을 팔고, 집에 돌아와서 음식을 기계적으로 먹어 치우며, 취미로 보관해둘 만한 서류를 정서한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아까끼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기 보다 로봇의 모습과 같다. 심지어 양심적인 국장이 새로이 주는 업무도 거절하며 그는 다시금 정서를 하는 자리로 돌아온다. 이러한 기계적인 반복은 아까끼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계로 느껴지는, 인간의 존업성이 말살된 사회의 상황에 대한 비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아까끼의 모습은 일에 치여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 모습과 닮았다.
3. 외투의 의미
주인공 아까끼의 삶은 아주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는 아주 낡고 헤진 누더기에 그치지 않는 외투를 입고서는 매일같이 정서하는 일에 몰두한다. 젊은 관리들이 그가 하숙집 할머니에게 얻어맞고 지낸다느니, 결혼식은 언제 올릴 계획이냐느니 하고 짓궂게 물을 때에도 그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 길을 걸을 때에도 마찬가지 였다. 그는 날마다 길거리에서 벌어지곤 하는 일,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에게 정서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사는 없었다. 이러한 아까끼의 모습은 주체적인 삶을 잃어버린 채, 기계적으로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겉모습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복장에 따라서 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패션은 각자의 개성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까끼의 외투는 아주 비참하다. 이 추운 뻬쩨르부르크에서 구멍난 외투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헤지고 닳아빠진 외투는 아까끼의 삶을 그대로 대변한다. 아까끼의 삶은 그의 외투처럼 정체성도 없고 개성도 없는 아주 비참함 그 자체였다.
아까끼 아까끼에비치는 저녁마다 마시던 홍차도 없애버리고, 밤에는 촛불도 켜지 않기로 했다. 부득이하게 뭔가 일을 해야 할 경우에는 하숙집 주인 노파의 방에 가서 거기 있는 촛불 빛 아래서 일을 하기로 했다. 한길을 걸을 때도 돌로 포장한 길에서 구두바닥이 빨리 닳을까봐 되도록 조심스럽게, 뒤꿈치를 드는 자세로 살금살금 걷기로 했다.
어느날 아까끼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새로운 외투의 구입’이다. 아까끼는 더 이상 수선할 수 없도록 낡고 또 낡아버린 외투를 자꾸만 수선해 입으려 한다. 수선공에게 아무리 애절한 부탁을 해도 아까끼에게 돌아오는 말은 새로운 외투를 맞추는 말 뿐이었다. 결국 아까끼는 더 이상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외투를 맞출 것을 결심하게 된다.
한 달에 한 번씩이긴 했지만, 달이 바뀔 때마다 그는 뻬뜨로비치를 찾아가 어디에서 옷감을 살 것인지, 나사의 색깔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 감을 얼마나 끊으면 될 것인지 등 외투와 관련된 것을 상의했다. 아직도 약간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머지 않아 곧 옷감을 사다가 진짜로 외투를 지어 입게 될 날이 올 것을 생각하면 그는 언제나 흐뭇한 마음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예상과 달리, 새로운 외투를 마련하기로 결심한 아까끼는 평소보다 더 활기찬 모습으로 변해간다. 더 이상 그는 마셔오던 차도 마실 수 없었고, 밤에 키는 촛불조차 아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은 이전 보다 더욱 인간적여졌다. 처음으로 그에게 정서 이외에 목표가 생긴 것이다. 정서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삶은 어디서 옷감을 살지, 어떤 색으로 할지, 얼마나 할지 등 외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에게 외투는 인생의 반려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까끼는 외투를 사기로 결심한 이후, 처음으로 정서를 하다가 글자를 틀리는 실수를 범한다. 이러한 모습은 아까끼가 점차 기계적인 삶에서 조금씩 멀어져 인간적인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외투를 손에 쥔 날을 ‘생애 최고의 날’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까끼는 행복해한다. 외투를 가진 후로 부터 아까끼는 조금씩 달라진다. 이전에는 아까끼를 두고 조롱하던 동료들도 오히려 새로운 외투가 생긴 아까끼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파티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 이전까지 전혀 정체성이란 없어 보였던 아까끼가 처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더 많아져서 그 가운데에는 화려하게 차린 귀부인들과 수달피 깃을 단 남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삥 둘러 도금한 못을 박은, 격자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초라한 영업용 마차들은 점차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 대신 새빨간 빌로드 모자를 쓴 멋진 옷차림의 마부들이 곰의 털가죽 무릎 덮개를 깐 고급 마차를 모는 모습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띄었다. 화려하게 장식한 자가용 마차들이 눈 위를 요란스럽게 달려갔다.
이전의 아까끼는 길을 걸을 때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거리를 지나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외투를 얻게 된 후, 마치 새로운 삶이 생겨난 사람처럼 변화한다. 조금씩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기도 하고, 마차와 마부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기도 한다.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던 아까끼. 그는 외투를 가지게 되면서 조금씩 자신의 삶을 찾아가게 되고, 보통 사람들의 삶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새로운 삶에 만족해하던 아까끼에게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외투의 상실’이다. 외투를 받은 첫 날, 아까끼는 지나가던 강도에게 그의 소중한 외투를 강탈당한다. 외투는 아까끼에게 있어 삶 전부였으며, 아까끼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수단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추운 러시아에서 ‘외투’는 단순한 의복의 의미를 넘어 자신을 보호해주는 안식처와 같은 것이었다. 소중한 외투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까끼에게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과 같다. 그는 외투를 찾기 위해 고위 관리들에게 찾아가 호소하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차디찬 내침일 뿐이었다. 결국 삶의 의미를 상실한 그는 식음도 전폐하며 외투를 그리워하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주인공 아까끼에게 있어 외투는 그냥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유행따라 입고 싶어진 욕망의 발현이 아니라, 없으면 뻬쩨르부르크의 날씨를 이기지 못하고 바로 생명을 잃게 되는 아주 필요한 것이다. ‘외투’란 아카키 자신을 지켜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결국 그 자신을 의미한다. 외투가 없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결국 인간 실존에 대한 공포로 비춰질 수 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고서도 유령이 되어 외투를 되찾으려하는 모습은 마지막까지 삶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는 아까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 외투
고골의『외투』는극적 반전을 통해 신랄한 현실 비판을 하는 사실주의 기법과 풍자적 기법이 돋보인다. 직접적인 비판이 아닌 풍자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오히려 더욱 극적으로 당시 사회 모습을 느낄 수가 있다. 또한 작품 후반부의 덧붙인 아까끼가 유령이 되어 돌아오는 모습은 환상적인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날카로운 풍자 뒤에 한 가닥의 눈물을 곁들인 웃음에 이르게 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고골은『외투』를 통해 정체성을 잃은 채 획일화 되어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을 보여주고자 했다. 과거 말단관리로 일을 했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이처럼 고골은『외투』를 통해 우리 사회를 비판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씁쓸한 미소를 짓게끔 만들었다.
『외투』속 이야기는 작품 속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신분계층이 확연하게 있는 시대와 오늘날의 현실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사실 면밀히 따져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오늘날 신분과 계급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평등하다 말할 수는 없다. 제도적인 계급의 구분만이 없을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과거를 살았던 아까끼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소시민의 모습에 그친다. 우리 또한 아까끼 처럼 정체성을 잃은 채 기계적인 일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일인지, 무엇을 위해 하는지, 각자의 개성은 말살한 채 주어진 일 속에서만 만족하며, 그 속에서만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에게도 아까끼에게 있어서의 외투와 행복이 있을지 의문이다. 아까끼는 밤마다 뻬쩨르부르크의 유령으로 나타나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는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강탈이라 할 수 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당신의 외투는 무엇인지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