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탁상담화 - 종교개혁자의 사적인 대화록 세계기독교고전 49
마르틴 루터 지음, 이길상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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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탁상 담화]   마르틴 루터 , ,유럽의 중세 개혁가 , 독일 1483년 도일 작센안할트 주 아이슬레벤에서 광산업에 종사 하는 아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사이에서 출생 ,,, 엄격한 가정 환경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 공부를 하엿고,,, 그 와중에 비가 쏟아 지는 뇌우속에서 , 신부가 되기를 결심한 그는 곧 집안의 거센 반대에도 무릅쓰고 '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 소속 검운 수도원에 입회 하여 수사 신부가 되었다..


간략한 루터의 신부배경은 줄이고 다시 책으로 돌아가면 , 마르틴 루터의 [ 탁상담화] 라는 책은 1566년 처름 출간 되엇으나 당시 면죄부를 판매한 카톨릭 교회의 분노를 사서 겨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명으로 모두 소각 되었고,, 1626년 기적적으로 발견 되어 영국으로 보네어져 1646년 영어 번역본이 나오게 된 것이 시초 이다. 그러나까 지금으로 부터 보면 373년만의 발견 이고 루터가 작성한 시점으로 보자면 약 453년 전의 일이다.  중세시기 이다.


이 탁상 담화라는 책은 말그대로 동양적으로 풀이 하자면 밥상 머리 잔소리 처럼 소소한 하루 일상과 묵상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적인 대화와 우매한 일반 군중들이 어떤 식으로 성서와 교화와 하나님을 알아 가야 하는 지에 대한 독해서와도 같았고 ,, 약 400여년을 지나오는 동안 독일 개신교도들에세 성경에 버금 가는 지워를 누렸다..


다시 역사속르로 들어가면 당시의 상황은 어떠한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강제적인 면죄부 사업을 하였다.. 이는 일반인들속에서도 죄을 지어도 면죄부를 사면 사함을 받을 수 있다라는 잘못된 믿음을 안겨 주었고, 예를 들어 부자들은 더 많은 면죄부를 살 수 있었으므로 , 더큰 사기나 죄가 횡행 해지는 도덕 무감증의 시대라고도 할수 잇겠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 하면서 , 하지만 이는 투터의 신앙을 근본 부터 들들게 되었고 순응 할수 없었던 그는 이를 비판 하였고 기존 교회와의 마찰의 시발점이자 종교 개혁의 시점이 된 사건 들이다.


더욱 전개가 되어 이를 공개 논쟁 하기로 결정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제성 기념일 전야에 95개 논제를 성자교회의 문에 네어 걸었다...


좀더 루터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 하려면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 하여야 하고 , 그의 일대기에서 주요한 사건들을 망라 하여야 하는데 영광의 신학 또한 그중의 하나이다.. 이는 "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 하고자 하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통해서 그의 보이지 않는 본질의 지혜를 파기 하는것 " 이라고 한다.


이후 " 십자가 신학은 인강은 구원을 받을 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 하던 영광의 신학을 부정 하고 ,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 함으로써 ,, 하나님의 자비와 은례를 강조한 은혜의 신학 이기도 하였고 , --이는 탁상 담론의 근간을 흐르는 맥락과 일치 한다.


마지막으로 로마카톨릭과의 충돌로 종교 재판에 넘기려는 그를 로마로 소한 지시 하였고 이에 데해 추기경과의 칭의론 주장과 라이프치히 논쟁이 그 뒤를 이었더.


논쟁의 쟁점을 간략히 요약해 본다. ============================

  • 첫째, 교황의 기원과 권위에 관한 것. 에크는 교황권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교황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권세는 위조문서인 '이시도리안 교령집(de)'에 기초하여 세워졌으므로 허위라고 반박하였다.
  • 둘째, 성경의 권위에 관한 것. 루터는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도리와 생활의 규범이 되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자고 외쳤다. 반면 에크는 '오직 성경' 사상은 중세 말 현대주의 사조를 따르는 이단들의 주장이라고 지적하며 루터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웠다.
  • 셋째, 연옥에 관한 것. 에크는 연옥사상이 마카비 2서 12장 45절에 나오므로 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루터는 마카비서가 성경이 아니라 외경에 불과하다고 하므로 신적인 권위가 없고, 따라서 연옥교리는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 넷째, 면죄부와 고해성사. 에크는 면죄부와 고해성사가 교회 전통에 근거한 것이므로 교회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잘못될 수 있고, 오직 성경만이 오류가 없으며, 면죄부와 고해성사는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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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카톨릭 교회로부터 이단을 선고 받고 파문을 당하고 만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받은 화영 영장을 태워 버리고 만다..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면 하는 교황의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 -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 은  1521 년 1월 3일 로마에서 공포 되었다.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63세를 일기로 사망 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암송한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 을 얻게 하여 하심이니라 "


    종교개혁가로서의 그를 존경 한다.... 책력거99  .


    ValUE Up Tip :  마르틴 루터 중세시대의 배경 철학 / 위티파디아 침조


    성례와 은혜의 수단[편집]

    루터(Martin Luther)는 말씀은 주님이 제정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전달해 주는 방편이 되는 성례전을 절충해 주는 것이므로 말씀이 없는 성례전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루터는 1530년에 저술한 그의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 (The 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에서 로마교회의 성례전 제도와 신학적 과오를 지적하면서 로마교회가 범한 세가지 잘못을 논박하였다. 첫째는 평신도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는 주지 않은 것이고, 둘째는 마술적인 화체설의 과오이며, 세째는 성례전을 희생의 반복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거 가톨릭의 전통을 모두 개혁하고자 한 것은 아니고, 다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성찬을 받기 전에 시행한 부분 중 불을 켜 놓는 것, 제복의 사용, 향을 피우는 것은 그대로 존속 시켰으며 이에 반해 성찬 예배에서 성별의 기도는 변화시켰으며, 화체론을 수정하여 공재론을 수립하였다. 루터는 초대교회에서 사용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었고, 처음에는 매일 성찬식을 거행하라고 권했지만 매주일 시행하라고 권장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즉 주님의 몸이 성찬 물질의 안에, 밑에, 함께 (in, under, along with) 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14세기에 있었던 오캄의 유명론에서 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터는 믿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접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며,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의 임재를 믿었고, 공간 속에 연장된 몸 (body extended in apace) 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루터는 이것이 내 몸이다 라는 주님의 제정어에서 ...이다 를 윤리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과 화체교리를 거절했다. 루터의 성찬에 대한 견해는 여러번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1519년 성찬에 관한 교설 을 쓴 때이고, 둘째는 1520-1529년 교회의 바벨론 포로 를 쓴 때(쯔빙글리와 말부룩 회담을 하기까지)이고, 세째는 말부룩 회담 이후이다.

    첫째, 성찬에 관한 교설 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 아래 두고, 성물인 떡과 포도주는 도장(siggel)으로 그 아래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성례는 본체의 표징이라고 했다.

    둘째, 교회의 바벨론 포로 에서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찬의 결정적 요소는 신앙이라고 했다. 성찬은 약속이며, 성찬의 은혜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라고 했다. 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둘째가 우리의 신앙이며, 세째가 사랑이라고 했다. 세째, 말부룩 회담이후에 성찬에 관한 루터의 견해는 공재설로 형성되었다. 또한 그는 쯔빙글리의 견해에 반박했는데, 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표상한다는 것과 ② 이것은 내 몸이다 를 이것은 내 영적 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박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도 피를 흘리셨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를 제외시키는 행위는 사악한 행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권한은 천사에게도 없고 교황 이나 공의회의 권한에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루터는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사제가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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