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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목격자
황민구 지음 / 부크럼 / 2022년 8월
평점 :
영화 <살인의 추억>은 1986년 경기도 지역을 배경으로 젊은 여인이 무참히 강간,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는 살인 사건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연쇄살인이라는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는데, 당시에는 CCTV나 차량의 블랙박스 같은 영상 저장장치가 없던 시절로 주변 검색과 탐문 수사에 의존해야 했다.
40여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요즘도 폭력이나 무기를 사용하는 강력범죄 기사가 많이 나오고 있다. 과거에 비해 CCTV나 블랙박스를 통해 범죄 현장이 담긴 영상들이 공개되면서 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들의 실마리가 풀리기도 한다. 물론 영상의 화질이 항상 깨끗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영상 분석가는 어떻게 사건 현장의 진실을 찾아내는지 궁금했다. <천 개의 목격자>의 저자인 황민구 법영상 분석가는 범죄 현장을 찍은 영상은 해당 사건과 그 범죄를 저지르거나 목격한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 잠자고 있던 그날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기록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p.40
법영상분석이 무엇인지 언론에 홍보되면서 점차 각종 사건 사고들에 대한 문의가 많아졌다. 나는 '어떤 사건이라도 의뢰인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다'라는 사명감으로 모든 상담과 테스트를 성실하게 진행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고 싶지 않은 의뢰들이 점점 많아졌다. 귀찮아서가 아니다. 이유 없이 그냥 하기 싫은 일이 있듯이 종종 나에게도 '그냥'이라는 이름을 붙여 하고 싶지 않은 분석들이 있다.
p.88
분석을 위한 실마리는 찾았기에 내 전공인 영상 처리를 시작했다. 주름 패턴을 대조하기 위해 화질 개선을 통한 디테일 증폭실험이 진행되었다. 실밥의 형태와 길이, 두께, 간격을 정량적으로 이미지에서 계측했다. 그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의뢰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방을 구매할 당시 사진 속 가방과 현재 가방의 DNA 패턴이 일치한 것이다.
그는 끔찍하고 가슴 아픈 사건들의 진실을 목격한 CCTV 같은 영상 매체를 통해 사건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첫 에피소드로 소개한 '뒤바뀐 운전자' 편에서는 '조작되지 않은 영상은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이 책의 주제를 피력하고 있다.
이 사건은 감옥에 있는 피고인의 아들이 찾아왔는데 감옥에 있는 아버지가 억울한 판결을 받아 아무리 무죄를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저자에게 사건을 의뢰하면서 건네준 USB에 담긴 영상에 진실이 담겨 있었다. 이 영상을 분석해 보니 피고인이 중앙선을 넘지 않았고 맞은편 음주 운전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온 장면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증인석에 나와 검사와 판사로부터 국가수사기관이나 감정기관에서는 영상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자신이 분석한 영상을 믿을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반복되는 같은 질문에 자신이 하는 일에 깊은 회의가 밀려왔다고 말했다.
그 후 자신의 영상 판독 분석 결과가 반영되어 사건은 무죄 판결을 받게 됐다고 한다. 이 일을 통해 그는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 영상 분석에 사명감이 생겼다고 이야기했다.
p.116
극단적 선택을 한 안타까운 영혼은 조용히 보내 줘야만 한다. 유가족과 지인들에게 '자살'이라는 단어는 금기어이며 주변에 알리기 싫은 비밀이다. 하지만 나의 업무 중에는 이런 금기어를 깨야만 하는 사건들이 많다.
p.158
이 세상에 정말 신이 있을까? 영상을 보는 내내 나는 자신을 욕하고 비난했다. 왜 이들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에 대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봤지만, 재수가 없었다는 말로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올 수 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사건을 영상 분석을 통해 해결해 온 저자의 삶에 대한 회고가 담겨 있다. 책에 소개된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황망한 비극들과 직접 마주하고 있는 저자의 고달픈 삶이 느껴졌다. 이와 동시에 사건의 진실을 알려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저자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매일매일 사건 현장의 그날과 정면으로 마주 서서 최선의 증거를 내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면할 수 없는 하나의 '삶'이 영상 안에서 '제발 살려 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다툼부터 누군가의 참담한 죽음까지, 풀리지 않은 진실이 숨어 있는 영상을 보는 일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도 일이 아니었다면 절대 보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장면을 수없이 돌려 보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뭉클했다. 이런 영상에서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처럼 엉뚱한 사람이 피의자가 되어 감옥살이를 했을 것이다.
p.199
성범죄가 기승이다. 점점 진화하면서 범죄 영역이 늘어나고 있다. N번방 사건을 보면서 인간의 잔인함은 끝도 없다는 것을 느낀다. 악마들은 나체가 된 피해자를 촬영하고 이를 유포한다. 그러면 다른 악마들은 승냥이가 되어 그 장면을 찾아본다. 그들은 이야기한다. 호기심에서 봤다고. 인간이 타락하는 첫 단계가 호기심이다.
p.229
요즘 들어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나를 괴롭힌다. 고양이를 케이지에 가두고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붙이는 인간도 보았고,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던지는 인간도 보았다. 악마의 탈을 쓴 인간들이 주변에서 나를 너무 괴롭힌다. 나는 악마도 천사도 아니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중간계의 사람이다. 그런데 악마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나는 중간계를 이탈해야만 했다.
2015년 조사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CCTV 수는 약 27만 대라고 한다. 또한 각종 차량에는 블랙박스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다. 따라서 요즘에는 사소한 시비만 일어나도 객관적인 증거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CCTV 영상이 동원되고 있다. 카메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건의 증거를 보여주지만 영상이 조작되거나 물리적으로 훼손될 경우에는 이런 실적인 증거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확보된 영상의 화질을 개선하고, 미세한 픽셀이 담고 있는 정보를 해석하고, 진술자의 기억과 영상 증거를 대조하며 사건을 판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책은 범죄에 대한 기록을 살펴온 황민구 법영상 분석가가 CCTV나 블랙박스 같은 영상 기록 매체에 담긴 영상들의 분석을 통해 사건의 진위 여부를 명확하게 가리기 위해 노력해온 흔적들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진실을 찾기 위해 끝까지 영상을 봐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천 개의 목격자처럼 영상 속 진실을 찾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저자의 멋진 삶을 엿볼 수 있다. 법영상 분석가의 역할은 영상만 분석하는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건의 증인이 되어 ‘진실 규명을 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포스팅은 부크럼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 출처 : 박기자의 책에 끌리다, 책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