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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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들었던 '달'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도 토끼가 절구 방아를 찧고 있다는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크면 달에 토끼를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달에는 토끼는커녕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상상의 나래를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치 산타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 선물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게 된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단어나 낱말 혹은 문장이 주는 전해주는 강력한 힘을 어렸을 때부터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달 위의 낱말들>을 펴낸 황경신 작가는 이런 낱말들에 담긴 감성을 다시 한번 강하게 자극하는 에세이를 선보였다. 어쩌면 작가가 여행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단어가 가진 속뜻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p.4

낱말의 숲속에서 자라는 낱말의 나무,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려 있는 낱말의 열매를 땄다. 던져보고 굴려보고 핥아보고 깨물어보았다. 잘 익은 낱말 한 알을 당신에게 주려고 사랑을 품듯 마음에 품었다. 하지만 당신이 건네받은 낱말은 맛과 생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 당신은 어리둥절했고 나는 속이 상한 채로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쌓여갔다. 낱말의 열매들은 망각의 정원에 버려져 뭉그러지고 썩어갔다.


p.5

어느 적막하고 쓸쓸한 밤, 당신이 그리워 올려다본 하늘에 희고 둥근 달이 영차 하고 떠올랐다. 달은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달의 표면에 달을 닮은 하얀 꽃들이 뾰족 솟아 있었다. 썩을 열매의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달로 날아가, 꼬물꼬물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고 꽃잎을 여는 중이었다.


p.12

스무 살에 사랑이 찾아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빛이 명명하고 꽃이 피었다 시들었다. 네 곁에 있는 사람은 뜨겁다가 차가워지고 다정하다가 냉정해졌다. 너의 평화는 깨어졌다. 안달하는 마음과 분별없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고, 어리석은 행동과 무의미한 말이 마구 뿌려졌다.



<달 위의 낱말들>은 멋진 일러스트 표지가 인상적인 책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전지나의 감성적인 일러스트는 책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그동안 자신이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단어의 중력', '사물의 노력'이라는 두 개의 테마로 풀어냈다.


우선 '단어의 중력'에서는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대목이다. '내리다, 찾다, 터지다, 버티다, 닿다, 쓰다, 인연, 기적, 안녕, 연민, 고독, 재회' 등 28개 단어를 촘촘하게 얽어 하나의 이야기처럼 전달하고 있다. 이 단어에 얽힌 이야기 속에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도 함께 들어 있다.


'사물의 노력'에서는 '컴퓨터, 자동차, 오디오, 소파, 피아노, 카메라, 책, 청소기' 등 이름이 붙여진 10개의 사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사물들에 자신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이 사물들이 자신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알 수 있다.


p.22

네가 여섯 해 동안 살았던 원룸은 작고 어두웠다. 창문도 없어서 좁은 발코니에서만 밖을 내다볼 수 있었는데, 그래봤자 보이는 건 아스팔트와 못생긴 건물들이었다. 그래도 여섯 번의 봄은 찬란했다. 건물 외벽에 기대듯 자란 벚나무 두 그루 때문이었다.


p.69

생애 처음 만나는 지중해였다. 너는 늘 지중해를 그리워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의문을 삼키면서. 지중해, 라고 되뇔 때마다 너의 심장은 북을 울렸다. 먼 바다에서 일어난 지진처럼, 볼 수는 없어도 느낄 수는 있는 진동이 너를 휘감았다.


p.135

다음 날 아침, 별들이 사라진 자리에 금빛 햇살이 가득 들어찼다. 수천 수억 개의 햇살방울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오래된 골목 안에서 찰랑찰랑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눈을 감았을까. 그들의 삶과 죽음이 언덕을 휘감는 바람으로 맴도는 듯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황경신 작가처럼 내가 나의 이야기에 쓸 낱말을 고른다면? 뭘 고를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비, 김현식, 인연, 친구, 혜화동, 거리에서, 광화문 연가, 추억, 안녕...' 살다 보면 이미 익숙한 낱말도 있지만 메타버스, NFT처럼 기존에 없던 낱말과도 어울려 살게 되겠지. 다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시의 <꽃>처럼 내가 선택한 단어들만이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에세이를 참 다양한 방식으로 쓸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책을 읽어보면 삶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진중하게.



이 포스팅은 태일소담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 출처 : 박기자의 책에 끌리다, 책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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