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때 노처녀(^^;) 영어선생님이 가끔씩 위대한 개츠비의 어떤 대목을 연극적으로 읽어주곤 했다. 그 해 교지에 선생님은 느낌표가 수도없이 빵빵빵 찍힌 독후감으로 개츠비를 다시 한번 찬양했더랬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반쯤 감은 듯 아련한 눈으로 개츠비와 데이지의 열렬한 사랑과 파멸을 이야기하던 혼 나간 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해 개츠비를 펴들었다. 쓰개치마 덮어쓰고 인당수로 빠져죽지는 못할망정, 자기를 그토록 사랑했던 개츠비를 결국 죽음으로 내몬 데이지는 도통 내 상식속에 포함시킬 지고지순녀가 아니었다.
십수년의 세월이 흘러, 삶도 알만큼 알았다는 결혼 생활도 할만큼 했다는 사랑도 뉜내 나도록 해봤다는 삼십대 중반에 참신하고 깔끔한 표지를 단 양장본 개츠비를 보고 위대한에 방점을 찍으며 다시 개츠비에게 되돌아갔다.
사실은 나에겐 아직도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은 위대하다기 보다는 얼음조각에 부딪혀 조각난 타이타닉호의 파편일 뿐이다. 그런 탓에서였는지 벤자민 버튼의 흐름이 너무 빨라 갑자기 불안해졌다. 장편소설이라고 마음대로 오해해버렸던 것이다. (단편으로 영화를?) 실록에 덜렁 한 줄짜리 광대를 모티브로 왕의남자가 태어났는데, 38쪽 짜리 단편소설 정도면 해리포터 시리즈라고 못 만들쏘냐. 여튼!
80 노인으로 태어나 0세 아이로 죽은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시계
도금시대의 풍요로부터 저만큼 벗어나 있던 젤리빈
마치 로맹가리의 단편을 떠올리게 했던 낙타엉덩이와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
판타지소설 형식으로 인간의 탐욕을 벌거숭이로 묘사하지 않았나 싶은 다이아몬드이야기
전쟁직후 생각의 혼류 부유함과 환멸이 뒤섞여 혼란과 참담함으로 점철된 메이데이
재즈시대는 도금시대의 끝자락과 맞물리며 대공황시대로 이어지는 그 언저리쯤 되나보다. 그 미국의 시간을, 그 시간 미국의 젊음들을 다큐멘터리 리포터처럼 설명한다. 리츠칼튼호텔만한 다이아몬드로 대변되는 욕망을 모던걸, 플래퍼를 등장시켜서 추상화로 그리며 말이다. 물론 로맹가리나 로얄드 달의 단편처럼 폭주기관차 같은 속도감을 주는 소설은 아니다. 비록 작가로 비전이 없어 젤다로부터 파혼당하고, 출판성공으로 젤다와 결혼하고, 위대한 개츠비로 성공과 부를 거머쥐었으나 끝없이 나락하고 만 피츠제랄드의 고백록 같아 읽는 내내 불편도 했지만, 피츠제럴드가 가고 근 7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독자들이 피츠제럴드에 열광하는지 충분히 공감하게 해준 미덕을 가진 소설임에 틀림없다.
『낙타엉덩이』『메이데이』『오, 적갈색 머리카력 마녀!』가 특히 좋았지만, 이 단편집의 백미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제목으로 선정된 작품이 아니라 미안하지만^^;)『행복의 잔해』를 뽑겠다. 아름다운 여배우 록산 밀뱅크과 단편소설가 제프리 커튼 부부의 이야기와 제프리가 간 뒤 록산과 해리의 장면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까지. 페인트가 벗겨지고 낱낱이 들고 일어난 쇠락해가는 대저택과 대비되며 제프리가 남긴 열두개의 못자국을 바라보는 록산의 마음이 잔잔한 물결같다. 커피를 다 마시고도 빈 잔에 오래도록 향이 머무는 아라비카 커피처럼.
독서진행이 매우 느려 하품이 나다가 중반을 넘으면 강하게 잡아매는 책이 더러 있다. 내겐 피츠제럴드가 그렇다.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나 영국의 자존심 세익스피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