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리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옳음과 그름에 대한 판단은 앞으로 우리 세대를 넘어선 후세에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윤리에 대한 절대적이라 생각되는 가치 또한 변할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한 시대에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여졌던 일들이 후대에 이르러서는 야만적인 혹은 비상식적인 기준들로서 적용되어 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윤리적 변화는 기술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날이 갈수록 빠르게 진화해가는 도구들의 발전에 맞추어 우리의 생각과 판단의 잣대 역시 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윤리를 이야기하는 미래학자 후안 엔리케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Prologue
극우와 극좌에 속하는 사람들만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떠는 게 아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좋든 싫든 신기술의 발명과 적용이 워낙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그 각각의 기술을 놓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은 없으며, 각 기술에 적응할 시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청년들이 좋아하는 아무 책이나 영화 하나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대부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post-apocalypse' 에 해당될 것이다. ...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왜 이젠 예전의 관습과 규범과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걸까?
어떤 점에서 우리는 온 세상이 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처럼 걱정스럽게 돌아간다고 결론짓고 만다. 이런 것들에 너무 많이 노출되고 또 무감각해진 나머지 예전과 달리 많은 것들이 좋아졌다는 사실, 또 여러 가지가 개선됨에 따라 윤리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린다.
오늘날 우리가 '올바르다' 혹은 '그르다' 고 생각하는 대상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들과 다르다. ... 윤리를 그저 '지루한 것' 으로만 여기는 이유는 다들 자기가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회에서든 구성원 다수가 윤리적이라 여기는 것도 불과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당대의 관습 뿐 아니라 인간관계 메뉴얼을 숙지하고 충실히 따랐을지라도 어느 한순간에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는 바람에 눈총을 받을 수 있다.
기술은 윤리를 바꾸어놓고, 오래된 믿음들을 향해 문제를 제기하며, 더 이상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않는 제도들을 뒤엎는다. 소통 채널과 미디어에 대한 접근성이 강화됨에 따라 부패와 차별, 제도적 학대등은 과거와 달리 세상에 고스란히 알려지고, 그렇기에 '과거의 대응 방식'은 위기를 맞는다. ... 세상에는 '용인되는 것' 과 '용인되지 않는 것'을 가르는 기준이 존재하고, 기술은 그 기준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촉매제 혹은 지렛대가 된다. ... 지금 우리는 기술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바뀌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현재는 윤리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바뀌는 시대란 뜻이다.
과거를 돌아볼 때든, 미래를 예측할 때든, 현대 윤리는 오늘날의 격정적인 토론과 무모한 절대적 확신에 대해 요즘 쉽게 찾아보기 힘든 단어 하나를 요구한다. 바로 겸손이다. ... 나는 도덕적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옳음과 그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나은 판단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으려면, 또 보다 관대해지려면 여러 사회와 사람들의 가치를 수용해야 하며 새로운 기술과 관련된 선택권들이 필요하다. ... 극단적으로 양극화되고 스스로 확실하다고 여기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겸손한 태도와 덜 비난하는 자세, 그리고 후손들이 지금 우리의 행위를 놓고 야만적으로 여기리란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대가 내일 평가받고 싶은 내용 그대로,
오늘 그대 자신을 평가하라.'
Chapter 01. 인간을 다시 설계하는 것은 옳은가
-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시대를 초월해서 자식 (자녀와 손자 손녀)의 수만큼 가족구조와 문화에 본질적인 충격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피임이 보편화되고 여성의 권한이 커지자 가장 근본적인 가족 규범도 무섭게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미래 세대들을 위해 섹스-젠더-생식 윤리와 관련해서 무엇을 용인하고 무엇을 용인하지 말아야 할까?
내 목적은 이런 복잡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윤리적이라 믿는 것이 기술의 영향을 받아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당신이 깨닫게 하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스펙트럼상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미래 세대를 근본적으로 다시 만드는 것은 과연 윤리적인 일일까? 우리가 재설계를 바라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인간이 특이하게도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80억 명 가까운 전 세계 사람들의 유전자가 거의 동일할 정도로 차이가 미미한 것은 딱 하나의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 단일한 종이 이처럼 거대한 개체수를 가진 데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이런 종류의 의미 있는 유전공학적 성과조차도 인간 신체를 본질적으로 재설계한 것이라기보다는 유전자 배열을 그저 살짝 수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음 질문은 충분히 던져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지금 생명체를 심지어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수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근본적 재설계의 윤리적인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 이제 비DNA 생명체 (non-DNA life)를 만들 수 있기에 생명체와 유전이 여러 화학물을 통해 발생 가능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유일무이의 독특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인류는 이제 새로운 생물종으로 분화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신 오작동이 범죄라고?
윤리적 법률적 선을 넘은 사람이 정말 아프다면, 또 우리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 만일 이 살인광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환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환자 개개인에게 우리는 어떤 이유로, 어떻게 벌을 주어야 할까?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 범죄자들의 행동을 보다 잘 예측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선제적 행동을 취할까? 세 번째 질문. 만약 사이코패스의 뇌 배선 brain wiring 을 바로잡는 기술이 발명된다면 사회는 사이코패스이 뇌를 강제적으로 바꿔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