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옳은가 - 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
후안 엔리케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세계사 / 2022년 4월
평점 :
품절






리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옳음과 그름에 대한 판단은 앞으로 우리 세대를 넘어선 후세에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윤리에 대한 절대적이라 생각되는 가치 또한 변할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한 시대에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여졌던 일들이 후대에 이르러서는 야만적인 혹은 비상식적인 기준들로서 적용되어 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윤리적 변화는 기술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날이 갈수록 빠르게 진화해가는 도구들의 발전에 맞추어 우리의 생각과 판단의 잣대 역시 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윤리를 이야기하는 미래학자 후안 엔리케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Prologue

극우와 극좌에 속하는 사람들만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떠는 게 아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좋든 싫든 신기술의 발명과 적용이 워낙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그 각각의 기술을 놓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은 없으며, 각 기술에 적응할 시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청년들이 좋아하는 아무 책이나 영화 하나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대부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post-apocalypse' 에 해당될 것이다. ...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왜 이젠 예전의 관습과 규범과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걸까?

어떤 점에서 우리는 온 세상이 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처럼 걱정스럽게 돌아간다고 결론짓고 만다. 이런 것들에 너무 많이 노출되고 또 무감각해진 나머지 예전과 달리 많은 것들이 좋아졌다는 사실, 또 여러 가지가 개선됨에 따라 윤리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린다.

오늘날 우리가 '올바르다' 혹은 '그르다' 고 생각하는 대상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들과 다르다. ... 윤리를 그저 '지루한 것' 으로만 여기는 이유는 다들 자기가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회에서든 구성원 다수가 윤리적이라 여기는 것도 불과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당대의 관습 뿐 아니라 인간관계 메뉴얼을 숙지하고 충실히 따랐을지라도 어느 한순간에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는 바람에 눈총을 받을 수 있다.

기술은 윤리를 바꾸어놓고, 오래된 믿음들을 향해 문제를 제기하며, 더 이상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않는 제도들을 뒤엎는다. 소통 채널과 미디어에 대한 접근성이 강화됨에 따라 부패와 차별, 제도적 학대등은 과거와 달리 세상에 고스란히 알려지고, 그렇기에 '과거의 대응 방식'은 위기를 맞는다. ... 세상에는 '용인되는 것' 과 '용인되지 않는 것'을 가르는 기준이 존재하고, 기술은 그 기준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촉매제 혹은 지렛대가 된다. ... 지금 우리는 기술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바뀌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현재는 윤리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바뀌는 시대란 뜻이다.

과거를 돌아볼 때든, 미래를 예측할 때든, 현대 윤리는 오늘날의 격정적인 토론과 무모한 절대적 확신에 대해 요즘 쉽게 찾아보기 힘든 단어 하나를 요구한다. 바로 겸손이다. ... 나는 도덕적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옳음과 그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나은 판단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으려면, 또 보다 관대해지려면 여러 사회와 사람들의 가치를 수용해야 하며 새로운 기술과 관련된 선택권들이 필요하다. ... 극단적으로 양극화되고 스스로 확실하다고 여기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겸손한 태도와 덜 비난하는 자세, 그리고 후손들이 지금 우리의 행위를 놓고 야만적으로 여기리란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대가 내일 평가받고 싶은 내용 그대로,

오늘 그대 자신을 평가하라.'

Chapter 01. 인간을 다시 설계하는 것은 옳은가

-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시대를 초월해서 자식 (자녀와 손자 손녀)의 수만큼 가족구조와 문화에 본질적인 충격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피임이 보편화되고 여성의 권한이 커지자 가장 근본적인 가족 규범도 무섭게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미래 세대들을 위해 섹스-젠더-생식 윤리와 관련해서 무엇을 용인하고 무엇을 용인하지 말아야 할까?

내 목적은 이런 복잡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윤리적이라 믿는 것이 기술의 영향을 받아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당신이 깨닫게 하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스펙트럼상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미래 세대를 근본적으로 다시 만드는 것은 과연 윤리적인 일일까? 우리가 재설계를 바라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인간이 특이하게도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80억 명 가까운 전 세계 사람들의 유전자가 거의 동일할 정도로 차이가 미미한 것은 딱 하나의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 단일한 종이 이처럼 거대한 개체수를 가진 데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이런 종류의 의미 있는 유전공학적 성과조차도 인간 신체를 본질적으로 재설계한 것이라기보다는 유전자 배열을 그저 살짝 수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음 질문은 충분히 던져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지금 생명체를 심지어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수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근본적 재설계의 윤리적인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 이제 비DNA 생명체 (non-DNA life)를 만들 수 있기에 생명체와 유전이 여러 화학물을 통해 발생 가능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유일무이의 독특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인류는 이제 새로운 생물종으로 분화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신 오작동이 범죄라고?

윤리적 법률적 선을 넘은 사람이 정말 아프다면, 또 우리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 만일 이 살인광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환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환자 개개인에게 우리는 어떤 이유로, 어떻게 벌을 주어야 할까?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 범죄자들의 행동을 보다 잘 예측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선제적 행동을 취할까? 세 번째 질문. 만약 사이코패스의 뇌 배선 brain wiring 을 바로잡는 기술이 발명된다면 사회는 사이코패스이 뇌를 강제적으로 바꿔야 할까?



Chapter 02. 기술이 윤리를 바꾸는 것은 옳은가

오늘날 우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기술이 앞으로 우리의 윤리를 바꿀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 햇빛의 가격이 내려간다면

기후변화는 궁극적인 윤리적-존재론적 과제다. 지금 당장 우리가 이 주제와 연관된 생각과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 해서 특별히 문제될 건 별로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는 점점 좁아지고, 날마다 맞닥뜨리는 결과도 점점 암울해진다. ... 사정이 이런데 우리는 왜 지금까지 좀 더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을까? 기후변화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들여야 하는 돈과 그 돈을 들이지 않을 때 미래에 발생하는 결과를 따지는 비용의 문제이자 동기부여의 문제다. 널리 퍼져 있는 새로운 윤리적 규범이 채택되는 티핑 포인트는 언제나 그렇듯, 단지 문제를 파악하는 것뿐 아니라 기존 생활방식을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고서도 윤리적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저렴한, 또 적용 가능한 대안을 가지는 것에서 비롯된다.

만일 탄소발자국을 줄이면서도 높은 수준의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면 우리는 안락함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보다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비용곡선이 보다 빠르게 내려갈수록, 또 새로운 대안이 보다 명확하고 쉬워질수록 믿음과 윤리의 세대교체는 더 빨리 이루어 질 것이다. 기후 비상사태 climate emergency 의 세상에서 청정 기술은 '하나의 대안' 이 아닌 유일하게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길이다. 그리고 그것에 드는 비용은 지금보다 더욱 낮아질 것이다. ...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부터 해왔던 일들이 다른 대안들로 한결 쉽게 대체되면 후손들은 우리가 했던 일들을 혹독하게 비판할 것이다. 과거에는 그 대안을 선택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많은 비용이 드는지에 대해선 잊어버린 채 말이다.

풍요는 잠재적으로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타인에게 관대해지고 윤리적으로 행동하게 할 뿐 아니라 공중도덕의식을 갖게 만들어준다. 우리는 배를 곯거나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관대해질 수 있다.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의 총량이 많은 덕분이다. ... 비록 전쟁이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전보다 훨씬 평화롭고, 번영한 상태이며, 인구도 많이 늘었다.

문제는 충분한 생산 혹은 재화의 효용성이 아닌 '분배'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자본주의가 넘어서야 할 근본적인 과제다. ... 자본주의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다음의 2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또 성실하게 일하면 나중에 잘살게 될 거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부모는 자녀 및 손자 손녀가 자신들보다 더 여유롭게 잘살 것이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급진적 좌파 사이에선 늙은 백인 남성을, 또는 자신들이 절대적이라 여기는 의견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사람을 낮춰 바라보는 행태가 점점 유혈 스포츠로 굳어지고 있다. 한편 급진적 우파에게 있어 '자유주의자들'을 도발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어 자신을 조금은 중요한 사람으로 비춰지게 하고, 같은 의견을 가진 '종족'에 소속되게 하며, 권력과 비슷한 무언가를 갖게 한다. 나와 다른 계층과 세대를 소외시키고 폄하하며 업신여기는 행위는 갈등을 일으킬 뿐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자신의 일과 지위 또는 소득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중산층에서 빈민층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공포는 분노와 적개심을 쌓는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오래된 사회적 지위나 평생 연마한 업무 능력에 대한 존중은 점점 사라진다.

기술은 많은 사람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었고, 그들의 시간과 업무적 가치는 더 이상 예전만 못하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 공포보다는 분노를 표출하기 쉬운데, 소수의 위험한 이데올로기와 정치적으로 편향된 호전적 MAGA 부대가 점점 위세를 떨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과학에 반대하고 기후변화에 반대하며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한 도피처다. 뿐만 아니라 이는 컴퓨터만 아는 괴짜들과 척척박사 세력이 만든 급속한 변화에 분노하는 많은 사람들의 저항 방식이기도 하다. ... 분열과 파벌주의와 근본주의, 또 세계무역과 기술 체제의 전반적 붕괴 등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지금의 우리는 충분히 현명하고 공감 능력도 높을까? 현 자본주의 체제가 맞닥뜨린 주요 극복 과제는 다음과 같다.

● 소득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다.

●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

● 노동의 미래가 불확실하다.

기술은 우리에게 엄청난 부를 형성할 기회를 많이 준다. 그러나 결국 사회적 차원의 어떤 폭넓은 거부권이 기술로 발생한 이득의 분배방식을 좌우할 것이다. 이는 윤리적 공유에 관한 질문이다. 인공지능, 자동화, 로봇, 세계화 등이 노동 시장을 새롭게 구축하고, 일-정체성 work-identity 의 연관성이 중요해짐에 따라 윤리적 공유에 대한 질문은 더 긴급한 것이 되었다. 내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의 자본주의는 매우 냉혹하게 보일 수 있다.



Chapter 03. 어제의 세계는 지금도 옳은가

지금과 같은 자기중심적 도덕적 판단의 시대 oh-so judgemental times 에는 단 한 번의 행동이나 한 통의 이메일 혹은 한 개의 댓글이 평생 일군 성과와 명예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다. 당신은 이전 세대보다 잘못된 과거에 발목 잡힐 가능성이 높다. 수십년 혹은 불과 10초 전에 했던 어떤 말로 인해 자신의 사회적 자본이 하루 아침에 증발해버릴 수 있는 위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 어찌 되었든 이젠 무언가가 옳은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방다들여지지도 않고, 옳지 않은 것이 흔히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던질 수 있는 핵심적인 질문은 당신이 지금 절대적으로 옳다고, 또 그르다고 알고 있는 것을 과연 '예전 그때에는' 얼마나 깨닫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역사와 문화를 초월해 많은 이가 인간이 인간을 소유해도 괜찮다고 자신을 설득시켰다. 그런데 그렇게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사악한 관행이 왜 갑자기 산업혁명 직후에 사라지기 시작한 걸까? ...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그 시기의 역사적 맥락과 개인들의 행동을 함께 이해하는 것이 조금은 중요하지 않을까? 워싱턴과 제퍼슨 그리고 링컨 같은 인물들도 그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그토록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는데, 과연 우리가 그들보다 더 똑똑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토록 많은 이가 그 끔찍한 관행에 동참하고 그것을 보호하며 또 널리 퍼트렸던 방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후손들이 완전히 비도덕적인 관행이라 비난할 일들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묵인하고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노예제도의 역사는 사회에서 합법적인 것으로 용인되는 윤리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극단적 예다. 새롭게 등장한 기술들은 우리에게 여러 선택권을 주고, 그에 따라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 혹은 '우리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 이라 여겨온 이들을 한층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깨우침의 아침은 서서히 밝아온다.

과거의 사람들이 수천 년에 걸쳐 저질렀던 끔직한 짓들을 합리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계몽 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행위나 제도가 잘못된 것임을 빠르게 자각하고 변화를 도모했다 하더라도, 그 어떤 문명사회에서든 훗날 도저히 윤리적이라 인정받지 못할 행위나 제도를 얼마든지 계속해서 실행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며 현재 만연해 있는 사회적 갈등과 분열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세대차이, 경제의 빈부차이 모두들 기술의 발전과 그로인해 나타난 윤리와 상식에 대한 변화에서 겪는 과도기적인 현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현재 우리가 옳다라고 믿는 부분 역시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몰상식한 행동, 기준이었다고 비난받을 수 있을 가능성 또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나 발전에 따라 나아가는 윤리적인 잣대의 진화(?)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가치관의 이해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며 동시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시대상의 모습들 앞에서 겸손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회적 현상과 모순들, 갈등들에 고민해본적 있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깊이 있는 인문학 서적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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