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데스의 유산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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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데스의 유산

나카야마 시치리 ㅣ 문지원 옮김 | 블루홀 6

역시 나카야마 시치리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어떻게 사회적인 주제들을 이렇듯 미스터리와 섞여서 훌륭하게 비벼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 그여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의 주인공들은 영원한 악인도 그렇다고 온전한 성인도 없는 이유다. 단지 인간이기에, 사람이기에 틈이 있고, 그 틈의 벌어짐 정도의 차이랄까?

닥터 데스라고 불린 의사는 안락사를 통해 환자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준다. 그에게 그런 권한이라는 것이 애초에 어떻게 주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환자들과 유가족들은 그의 손길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그는 그것을 주는 존재였다. 고통이란 것은 무엇일까? 고통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아무리 타자를 이해한다고 해도, 공감한다고 해도 그 고통까지 대신 경험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고통이 개인적 체험이라면 죽음은 어떠할까? 죽음은 고통과 비견할 수 없는 체험이다. 일생에 한번, 필연적으로 거쳐서 영원한 그곳,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할 체험 의식이다. 죽음이 만일 행복하거나, 짜릿하거나, 즐겁다는 그런 경험으로 여겨진다면 좋겠지만 죽음이란 항상 고통스럽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변의 이웃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고통으로의 해방을 위해 독한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받고, 나중에는 모르핀 투여를 통해 고통의 희미함을 느껴보려 한다. 결국엔 죽음으로 간다. 이럴 때 어쩔 수 없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닥터 데스를 추적하고 끝내는 검거했던 형사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한다. 범인은 잡았지만 죄는 잡지 못했다고 말이다. 이누카이에게는 난치병이 있는 딸이 있다. 그 아이의 고통의 모습을 매일 보면서 그 역시 훗날 어떤 선택을 하리라 장담하지 못했으리라...... . 하지만 그의 딸은 아마 잘 회복될 것 같다. 한번 싸워보겠다고 씩씩하게 마음을 먹었으니 말이다.

예전에 읽은 책 중 [자유 죽음]이란 책이 있었다. 왜 우리는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주어진 그 무언가로 생각하고 받아들여하는가? 죽음 역시 자율적으로 죽을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살아남았지만 일평생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지병으로 고통받았던 작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으로 세상과 작별을 했다.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사형에 대한 집행 유예자이다. 그 사형이라는 형이 언제 집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집행자가 누구를 먼저 데려갈까? 그 순서에 노소도 없고 돈도 없다. (물론 젊으면 확률이 더 줄어들고, 돈이 많으면 치료법의 선택이 훨씬 더 자유로울 테니 그 경중은 예외가 될 수도 있겠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행여 안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 집행의 순서가 아직 스스로의 차례가 아니라고 말이다. 아니면 애써 모른 척하는가? 아닐 거야... 나에겐 안 올 거야... 같은 희망을 품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미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온몸이 망가져있고, 끔찍한 고통의 연장 밖에 삶을 이어갈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당신 역시 스스로 닥터 데스를 찾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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