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어느 유튜브를 보다가 한류는 실패했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 문화가 K 컬쳐라는 이름으로 세계로 뻗어나가 나름 국제적인 위상을 떨치고 있다지만 그렇다면 그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하는데, 가까운 일본을 보면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고, 숨기고, 우익 분자들은 더 기를 쓰고 활개를 치며 혐한을 부축인다. 겨울연가가 들어와 일본 아주머니들이 그토록 한국 남성에 대한 호감이 생겼고, 한국을 찾아왔지만 그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역사를 정확히 보는 눈을 키워주는 일은 실패한 듯하다. 즉, 역사는 역사이고 문화는 문화일 뿐이다. 오직 소비되는, 시류에 의해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변화무쌍한 소비상품일 뿐인 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할 것들이 있다. 바로 고통스런 역사의 기억이다. 인간이 인류에게 저지른 끔찍한 폭력의 기억은 더 이상 되풀이 되서는 안된다. 이 책의 제목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인 것도 바로 그런 연유이다. 오히려 태중의 태가 복되다는 의미... 세상 끔찍한 뉴스를 볼때마다 느낀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참혹한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됐을텐데...하는 비극의 순간들 말이다.
케르테스는 청소년기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게 된다. 그 수용소는 나치가 철저히 비밀에 붙인 절멸 수용소라고 한다. 다른 포로 수용소와는 달리 오직 유대인의 절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수용시설... 그 안에서 차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범죄가 끊임없이 되풀이 됐는지는 상상하기도 싫다. 우리 나라 역시 그런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가... 일본이 여전히 부인하고 있는 위안부들의 실체, 광산 노동자들의 상황, 731부대로 대표되는 생체실험 등... 전쟁은 인간성의 말살을 통해 또 다른 종의 부활을 꿈꾼다. 그 종이란 오로지 자신만을 부흥을 목적으로 처참하게 같은 피를 흐르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집함으로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케르테스는 자신을 어머니에 의해서 거세당한 아들로 묘사한다. 그의 신경증은 물론 수용소 생활에서 촉발됐을 지라도 그의 뿌리는 유대인으로 나왔고, 어머니에게서 나왔으니 말이다. 그는 유독 신경증이 발발할때 쓰는 존재로 의미를 찾는다. 평온한 시기에 그는 아무런 쓰기의 욕망도 나오지 않는다. 그의 아내가 글을 쓰는 것이 성공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었냐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도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기에...즉, 이 지독한 불안증으로 벗어나기위해서 쓰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것이다.
케르테스가 자신들을 해방시킬 군인들이 점령한 짧은 수용소 시절에 어느날 홀로 화장실을 찾았다가 독일군 병사를 보고 순간 얼어붙어서 오줌을 지린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 독일군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 독일군 병사는 그저 세면대를 닦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는 아파트를 사는 지옥을 포기하고, 대신 아파트 없는 지옥을 선택한다. 자신의 집을 포기하는 선택...일평생 셋방살이로 떠도는 삶... 왜냐면 언제는 독일군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터이고, 그 평화는 깨질 것이니까... 언제든 시한 폭탄을 옆에 두고 사는 셈이다. 그에게 독일, 아우슈비츠란 이미 뼈 속깊이 새겨진 문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도한다. 이미 미래의 죗값을 다 치뤘다는 헝가리 기도에 빗대어 앞으로 올 미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살아갈 내일은 이와 같지 않기를... 뜨거운 피가 흐르는 한 모두 동등하기를... 기한 있는 생을 사는 동안은 모두 평화롭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