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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 김난주 옮김 | 소담출판사
에쿠니 가오리의 청아한 문체는 잊었다 할 만하면 다시 생각난다. 흡사 책상 서랍 속에서 몰래 숨겨두고 먹는 초콜릿처럼 그 맛이 생각나서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가오리 특유의 문장을 간결하게 쓰는 법이라든지, 사물의 묘사방식도 인상깊다. 또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일일이 사물을 나열해도 그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처럼 다가온다.
이 소설집에는 <손가락>, <초록고양이>, <천국의 맛>,<사탕일기>, <비,오이,녹차>,<머리빗과 사인펜> 총 여섯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빗, 색깔 입는 립글로스, 비누, 과일 향이 나는 오데코롱, 바인더, 수첩, 매점에서 파는 비닐봉지에 든 빵, 멋이라고는 하나 없는 천 커튼, 아무도 없는 교단, 전동 클리너로 하루치 분필 먼지를 털어 낸 지우개...
가오리가 방과 후 교실을 묘사한 풍경이다. 사물의 나열만으로 한편의 이야기가 태어나는 느낌이다. 방과후의 느낌, 그 냄새가 오롯이 전해온다. 그래서 가오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는 것같다. 그녀의 이러한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말이다.
<손가락>은 어떤 불감증이라고 느끼던 기쿠코가 지하철에서 치한에게 당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알고보니 그 치한은 여성이었으니, 빨간코트를 입은 예쁜 결혼한 여자였다. 기쿠코는 왠지 그녀가 싫지 않다. 오히려 끌렸다. 그녀가 올법한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집으로 가서 맛있는 홍차도 대접받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묻는다. 혹시 당신도...불감증이냐고 말이다.
<초록 고양이>는 무슨 일에선지 갑자기 변해버린 친구 에미에 대한 이야기이다. 에미는 어느날부터 멍해진다. 그녀는 삶에 발을 내딛지 못한다. 그녀의 정신은 어디론가 가버린 듯하다. 하지만 모에코에게 에미는 유일하게 자신과 통하는 친구다. 에미는 초록 고양이가 되고싶어한다. 보라색 눈을 가진 초록 고양이, 외톨이로 태어나서 열대 우림 어딘가에 살고 죽을 때까지는 다른 생물과 한 번도 만나지 않는 그런 초록 고양이를 꿈꾼다.
여섯 편의 이야기 모두 특유의 에쿠니 가오리의 심성이 살아있다. 그리고 이 단편집을 모아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란 제목으로 묶어내었다. 알고보니 다 사라질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다. 어린시절 학창시절의 기억들... 그 순간에는 무엇보다 반짝 반짝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그것이 전부였다. 언젠가 사라진다해도 그 순간은 진실이었고, 그때만큼은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사라진다해도 붙잡고 싶은 것은 언제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