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 양억관 옮김 | 민음사
갑자기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까지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수 있을까? 지금 하루키는 49년생이라고 하니 일흔은 훌쩍 넘은 셈이다. 그런데도 왜 유독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면 그가 청년으로 느껴질까? 성애의 묘사가 과감하고 책 곳곳에 스며있는 허무의 기운 때문인가? 아무튼 나는 하루키의 필력이 더 건재하리라 예상이 들곤 하지만, 문득 어느 맥에 이르러서 그가 소설 집필을 멈출 지 가늠할 수도 없어진다. 끝까지 이어지면 좋겠는데... 왜 인지 그의 소설을 그저 읽는 것만으로 아직은 나의 늙은 청춘이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나인 와타나베의 말투는 건조하고, 열려있다. 건조하면서도 열려있는 그의 말투... 그것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모두들 말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가 생각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 어느때이고 책을 펼칠 준비가 되어있는 남자다. 딱히 할일도 없고 건조한 세상이니 말이다. 그것도 나오코의 요양원에 <마의 산>을 들어갈 정도로 철저한? 준비성도 있고 말이다. 그건 물론 책이 그저 거기 있어서 였겠지만 독일어 시험을 코 앞에 두고 와타나베는 전혀 소설 읽기도 멈추지 않는다.
책 겉표지에서 느껴지는 녹색과 붉은 색에서 나는 미도리와 나오코를 느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와타나베를... 미도리는 욕망에 정직하고, 활력이 넘치고, 생동감에 차있는 반면 나오코는 스스로에 대해 알지 못하고, 번민하고, 헤메고, 아프다. 생경한 두 여자 사이의 와타나베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주의다. 결국엔 그의 마음은 미도리를 선택하지만 아마 나오코가 그렇게 되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둘 다 선택하거나, 아니면 둘 다 포기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와타나베는 말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이 바로 진실이라고, 이것을 그는 기즈키가 죽었을 때 익혔다고 말이다. 아마 그의 섹스는 그런 허무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한다. 허무에서 하는 섹스, 서로의 끝없는 확인, 사실은 나가사와를 따라서 처음 보는 여자들과 몸을 나누지만 그는 안다. 소모적이고 지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나가사와가 대단하게 생각된다. 나가사와는 가능성을 그냥 놔둘 수 없다고 한다. 변명아닌 변명을 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를 결국 불행하게 하고 만다.
이 소설 말미에 와타나베는 스스로 길을 못 찾는다. 어디에 있는 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곧 눈을 비비고 제자리에 돌아올 것을 안다. 왜냐면 그는 청춘이니까 말이다. 방황하는 청춘은 그 자체로 길을 이미 아는 법이다. 청춘의 허무, 죽음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하루 하루 위태롭게 견디는 삶... 우리는 모두 그 삶을 살아오고 있다. 삶이라는 폭풍우 속에 고요한 중심... 그곳에 죽음이 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 인간은 죽음으로 모두 달려가는 것이다. 그 속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하나 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작별을 고하고, 몸은 늙어간다.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언제까지 읽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다른 걱정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결국 어찌 됐든 살아간다. 그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