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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와 왕국 ㅣ 알베르 카뮈 전집 개정판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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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라는 이름은 내게 늘 『이방인』의 뫼르소로 기억된다. 그는 불합리한 세계 속에서 무감각한 태도를 견지하는 인간의 형상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공허와 정직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적지와 왕국(L’Exil et le Royaume)』은 그 뫼르소의 그림자를 끌어안으면서도, 보다 넓고도 다양한 인간 군상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 작품집은 여섯 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경계’라는 감각 속에서 부유하는 존재들을 다룬다.
낯선 땅, 낯선 인간
『적지와 왕국』의 인물들은 이름보다 상황이 먼저 다가온다. 이들은 누군가의 타지에서,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조차 낯선 자신 속에서 고독을 경험한다. 특히 「간부」에서는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통치 하에서 교사로 일하는 프랑스인의 내면적 갈등이 중심에 놓인다. 아랍인 아이를 가르치며 느끼는 죄책감과 무력감, 그리고 사회적 위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순간들은, 식민 지배와 도덕의 문제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카뮈는 정치적 선언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는 늘 그렇듯 인간의 윤리, 책임, 그리고 침묵 속의 진실을 탐색한다. 가령 「배교자 혹은 혼미해진 정신」에서 기독교 선교사였던 인물이 사막 한복판에서 자신이 믿어온 가치들을 의심하는 장면은, 종교와 신념, 인간 존재의 균열을 정교하게 직조한다. 믿음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신은 침묵하는가, 혹은 인간이 침묵하도록 만든 존재는 누구인가.
‘유배’와 ‘왕국’ 사이의 역설
이 책의 제목은 한 편의 단편 제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여섯 편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주제다. 유배는 곧 소외이고, 왕국은 자아의 완전한 회복 혹은 이상적 공동체를 암시한다. 그러나 카뮈에게 이 둘은 결코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유배의 한복판에서 순간적으로 왕국이 떠오르고, 왕국이라 여긴 곳이 곧 유배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 역설은 「말 없는 사람들」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노동자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행동보다 침묵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감정의 진동은, 오히려 더 깊고 강하게 독자의 감각을 두드린다.
또한 「요나 혹은 작업 중인 예술가」는 한 화가의 고독한 창작과 그 실패의 반복을 따라간다. 요나는 바다에 삼켜졌던 성경 속 인물이기도 하지만, 카뮈는 이 이름을 빌려 ‘그릴 수 없는 것’과 ‘그릴 수밖에 없는 것’ 사이에서 방황하는 예술가의 내면을 그린다. 붓을 들고도 끝내 완성하지 못하는 그림 앞에서 요나는 자기 구원과 세상의 의미를 질문받는다.
해설의 친절함, 독자의 축복
『적지와 왕국』의 한국어 번역판(김화영 옮김, 책세상)은 작품 뒤에 실린 해설이 탁월하다. 특히 카뮈의 생애와 철학, 그리고 이 작품집이 발표된 1957년의 역사적 맥락(같은 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을 고려하면, 해설은 단지 배경 지식이 아니라 작품 감상의 두 번째 층위를 제공해준다. 불어 원제의 뉘앙스, 지리적 맥락, 인물의 심리 분석까지 섬세하게 짚어주는 해설 덕분에, 프랑스 식민주의나 실존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도 무리 없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다.
『이방인』 이후의 카뮈, 혹은 다른 ‘이방인’들
『이방인』이 한 인물의 파국적인 정직함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부조리를 들여다봤다면, 『적지와 왕국』은 다양한 인물의 일상과 혼란을 통해 인간 사이의 ‘거리’를 성찰한다. 여기에 실린 모든 인물들은 일종의 ‘이방인’이다. 타인의 사회, 타인의 언어, 타인의 기대 속에 놓여 있으며, 그 속에서 침묵하거나 저항하며, 때로는 물러선다.
그렇기에 이 책은 지금-여기,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감각, 말해지지 않은 침묵, 이해받지 못할 때의 고독. 카뮈는 여전히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그가 그리는 ‘왕국’이란, 결국 각자의 ‘적지’ 안에서 조금씩 발견되는 연대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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