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지적이고 싶은 사람을 위한 명문장 필사책
박경만 지음 / 책글터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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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말보다 조용한 문장이 마음을 더 단단하게 붙잡을 때가 있다. 말이 많아질수록 생각이 흐려질 때, 종종 펜을 꺼내 글을 따라 쓴다. 타인의 언어를 빌려 나를 정리해보는 시간이다.
『인생에서 지적이고 싶은 사람을 위한 명문장 필사책』은 바로 그런 시간을 위한 책이었다.

박경만 작가의 이 책은, 단순히 ‘좋은 글귀’를 모아놓은 책이 아니다. 하루 한 장, 짧지만 밀도 높은 문장을 따라 쓰며, 그 여운에 잠시 머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적이고 싶은 사람을 위한’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표현이지만, 실은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감도는 그보다 훨씬 깊고 조용하다.

책을 펼치면 고전 문학, 철학, 예술,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엄선한 300여 개의 명문장이 등장한다. “당신이 등을 돌리지 않는 한 운명은 당신이 꿈꾸는 그대로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같은 익숙한 문장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구절들이다. 바로 그렇기에, 다시 써볼 때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해설은 한 줄 문장을 내 삶에 연결해보는 다리를 놓아준다. 그 다리를 건너며 독자는 점차 ‘내 문장’을 가진 사람이 된다.

✔️

“사랑도 미움도 없이 왜 내 마음에 고통이 가득할까? 그는 내 마음 속에서 언제나 울고 있네.”
흔들리는 날, 이 문장을 써 내려가며, 글이 아니라 나를 다독이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 책은 ‘명문장 필사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연습’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좋은 점은, 그날의 마음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성찰, 인간관계, 슬픔, 회복, 기쁨 등 다양한 주제가 골고루 담겨 있어서, 오늘 하루 내 안에서 가장 크게 울리는 문장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책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건넨다. 오늘 당신에게 필요한 문장이 무엇인지, 조용히 묻는 방식으로.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문장의 출처나 배경 설명이 조금만 더 깊이 있었더라면, 문장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빈 공간은 독자 자신의 사유로 채워야 할 몫일지도 모르겠다. 설명되지 않은 문장은 오히려 더 많은 여운을 남기기도 하니까.

✔️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필사가 아니라, 내가 오늘 어떤 마음인지 알아보기 위한 작은 의식처럼. 하루의 끝에서 나를 정리하는 도구로, 이 책은 참 좋은 동반자가 된다.

지적인 사람이 된다는 건, 거창한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문장을 깊이 있게 곱씹고 자신의 말로 전환해내는 감각을 갖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감각을 조금씩 키우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작고 단단한 시작이 되어줄 것이다.

* 이 리뷰는 리뷰의숲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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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의 사라진 작품들 - 팔리거나 도난당하거나 파괴된 그래피티 51
윌 엘즈워스-존스 지음, 서경주 옮김 / 미술문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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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도서제공

🫟 사라진 벽, 사라진 기억

예술은 언제 사라지는가? 혹은, 지워지는가?
한 번의 스프레이, 한 점의 붓질로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남기는 작가, 뱅크시.
그러나 우리가 본 것은 단지 ‘살아남은 일부’일지도 모른다.
뱅크시의 유실된 작품들은 그가 남긴, 그리고 잃어버린 작품들의 궤적을 따라간다.



✔️ 기억되지 못한 예술, 혹은 지워진 저항

윌 엘즈워스-존스가 쓴 이 책은 뱅크시의 대표작이나 유명세를 부각하는 작품집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작품 51점을 통해 ‘예술이 사라지는 방식’에 집중한다.
도난당하거나, 철거되거나, 무심코 지워진 벽화들.
그 하나하나에 담긴 시대의 얼굴과 거리의 목소리가 이 책에서 되살아난다.

그래피티는 원래가 ‘영구적이지 않은’ 예술이다.
그러나 뱅크시의 작업은 그 불안정함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사라짐 자체를 예술 행위로 전환시켜 왔다.
‘유실된 작품들’은 이 지점에서 예술과 기록, 저항과 상품화, 기억과 망각 사이의 미묘한 균열을 포착한다.



✔️ 미술관 밖에서, 보존되지 못한 목소리들

책은 작품 하나하나의 위치, 생성과 파괴의 과정, 그리고 그에 얽힌 사회적 맥락을 꼼꼼히 정리한다.
도판과 함께 실린 뱅크시 특유의 아이러니한 유머,
지역 커뮤니티의 반응, 미디어와 아트 마켓의 개입까지—
모든 요소가 뱅크시라는 현상을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그림을 보존하려는 이들과 지우려는 이들,
예술을 소유하려는 시장과 공유하려는 거리의 사람들.
사라진 벽은 더이상 단순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사회적 기억의 파편이자, 동시대 도시의 정치적 풍경으로 변모한다.



✔️ 아카이브가 된 거리, 거리로 나간 아카이브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지워진 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뱅크시의 예술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아카이브적 실천에 가깝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예술을 ‘보존’할지 결정하는가?
기록되지 않은 저항은 결국 사라지는가?

예술과 기록학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뱅크시의 유실된 작품들은 하나의 참조점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단지 그래피티를 모은 예술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라진 것들에 대한 가장 예술적인 기록이다.



💭

“그림은 사라졌지만, 의미는 남는다. 혹은, 의미도 함께 지워졌는가.”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사라지는 예술은 과연 끝난 것일까?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저항은 실패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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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행복 -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걷다 열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모명숙 옮김 / 열림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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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도서제공

삶과 글 사이,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연결

햇살 아래 피어난 초록 식물처럼, 이 책은 조용히 피어나는 사유의 정원이다. 『모두의 행복』은 단순히 울프의 글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 속에서 ‘정원’이라는 공간을 빌어 인간 내면의 평온, 여성적 시간, 그리고 글쓰기의 윤리를 다시 길어 올린다.

책은 울프의 여러 산문과 일기, 편지에서 ‘정원’에 관한 언급들을 뽑아 재구성한다. 그녀의 덜 알려진 텍스트들이 어루만져지듯 등장한다. 이 선택은 꽤 세심하고도 사려 깊다. 정원이란 본디 시간을 들여 가꾸는 곳이며, 버지니아 울프에게 있어 그것은 여성의 삶과 글쓰기의 은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울프는 종종 자신의 글을 ‘씨앗’으로, 생각을 ‘흙’으로 표현했다. 그런 그녀의 언어를 따라 이 책은 자연과 내면, 세계와 고요를 하나의 선형으로 꿰어낸다. 눈에 띄는 점은, 그녀의 글을 단순히 ‘자연예찬’으로 소비하지 않고, 정원이라는 공간에 깃든 정치적·성적 함의를 함께 짚어낸다는 점이다. 울프에게 정원은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라, 여성들이 사회적·문화적 침묵을 돌파하며 사유를 확장하는 장소였다.

“그녀의 언어는 자라나는 식물 같다. 땅을 딛고 있지만, 늘 빛을 향해 고개를 든다.”

책의 디자인 또한 이 메시지를 섬세하게 반영한다. 표지에 그려진 뜨거운 태양과 튼튼한 잎사귀들은 울프의 문장이 가진 생명력과 그 고요한 폭발력을 상징한다. 독일어 부제 Eines jeden Glück, 즉 “모든 이의 행복”은 울프가 바라본 글쓰기의 궁극적 목적—‘개인의 사유가 타인의 안식을 낳을 수 있음을 믿는 것’—과 닿아 있다.

에세이의 결마다 실린 짧은 울프의 인용들은 마치 하나의 씨앗처럼 자리잡는다. ‘무언가를 가꾸는 일은 세계에 대해 쓰는 일과 같다’는 문장은 특히 인상 깊다. 울프의 문장을 따라 걷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자기 안의 정원을 발견하게 된다. 수풀로 뒤엉킨 감정들, 메마른 땅처럼 갈라진 기억들, 그리고 여전히 무성한 가능성들까지.

『모두의 행복』은 버지니아 울프를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재회이고, 처음 그녀를 만나는 이들에게는 사유의 첫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책장을 넘길수록 우리는 ‘모든 이의 행복’이란 사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한 줄의 문장, 한 송이 꽃, 그리고 한 사람의 사유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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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와 왕국 알베르 카뮈 전집 개정판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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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도서제공 #서포터즈

알베르 카뮈라는 이름은 내게 늘 『이방인』의 뫼르소로 기억된다. 그는 불합리한 세계 속에서 무감각한 태도를 견지하는 인간의 형상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공허와 정직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적지와 왕국(L’Exil et le Royaume)』은 그 뫼르소의 그림자를 끌어안으면서도, 보다 넓고도 다양한 인간 군상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 작품집은 여섯 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경계’라는 감각 속에서 부유하는 존재들을 다룬다.

낯선 땅, 낯선 인간

『적지와 왕국』의 인물들은 이름보다 상황이 먼저 다가온다. 이들은 누군가의 타지에서,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조차 낯선 자신 속에서 고독을 경험한다. 특히 「간부」에서는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통치 하에서 교사로 일하는 프랑스인의 내면적 갈등이 중심에 놓인다. 아랍인 아이를 가르치며 느끼는 죄책감과 무력감, 그리고 사회적 위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순간들은, 식민 지배와 도덕의 문제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카뮈는 정치적 선언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는 늘 그렇듯 인간의 윤리, 책임, 그리고 침묵 속의 진실을 탐색한다. 가령 「배교자 혹은 혼미해진 정신」에서 기독교 선교사였던 인물이 사막 한복판에서 자신이 믿어온 가치들을 의심하는 장면은, 종교와 신념, 인간 존재의 균열을 정교하게 직조한다. 믿음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신은 침묵하는가, 혹은 인간이 침묵하도록 만든 존재는 누구인가.

‘유배’와 ‘왕국’ 사이의 역설

이 책의 제목은 한 편의 단편 제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여섯 편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주제다. 유배는 곧 소외이고, 왕국은 자아의 완전한 회복 혹은 이상적 공동체를 암시한다. 그러나 카뮈에게 이 둘은 결코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유배의 한복판에서 순간적으로 왕국이 떠오르고, 왕국이라 여긴 곳이 곧 유배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 역설은 「말 없는 사람들」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노동자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행동보다 침묵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감정의 진동은, 오히려 더 깊고 강하게 독자의 감각을 두드린다.

또한 「요나 혹은 작업 중인 예술가」는 한 화가의 고독한 창작과 그 실패의 반복을 따라간다. 요나는 바다에 삼켜졌던 성경 속 인물이기도 하지만, 카뮈는 이 이름을 빌려 ‘그릴 수 없는 것’과 ‘그릴 수밖에 없는 것’ 사이에서 방황하는 예술가의 내면을 그린다. 붓을 들고도 끝내 완성하지 못하는 그림 앞에서 요나는 자기 구원과 세상의 의미를 질문받는다.

해설의 친절함, 독자의 축복

『적지와 왕국』의 한국어 번역판(김화영 옮김, 책세상)은 작품 뒤에 실린 해설이 탁월하다. 특히 카뮈의 생애와 철학, 그리고 이 작품집이 발표된 1957년의 역사적 맥락(같은 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을 고려하면, 해설은 단지 배경 지식이 아니라 작품 감상의 두 번째 층위를 제공해준다. 불어 원제의 뉘앙스, 지리적 맥락, 인물의 심리 분석까지 섬세하게 짚어주는 해설 덕분에, 프랑스 식민주의나 실존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도 무리 없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다.

『이방인』 이후의 카뮈, 혹은 다른 ‘이방인’들

『이방인』이 한 인물의 파국적인 정직함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부조리를 들여다봤다면, 『적지와 왕국』은 다양한 인물의 일상과 혼란을 통해 인간 사이의 ‘거리’를 성찰한다. 여기에 실린 모든 인물들은 일종의 ‘이방인’이다. 타인의 사회, 타인의 언어, 타인의 기대 속에 놓여 있으며, 그 속에서 침묵하거나 저항하며, 때로는 물러선다.

그렇기에 이 책은 지금-여기,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감각, 말해지지 않은 침묵, 이해받지 못할 때의 고독. 카뮈는 여전히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그가 그리는 ‘왕국’이란, 결국 각자의 ‘적지’ 안에서 조금씩 발견되는 연대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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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예술가들 - 창작은 삶의 격랑에 맞서는 가장 우아한 방법이다
마이클 페피엇 지음, 정미나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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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도서제공

‘예술가’라는 말은 자주 신화화된다. 우리는 그들을 신비화하거나 위인화하며, 천재성이나 광기 같은 극단적인 요소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은 훨씬 더 유기적이고, 균열과 반복, 모순과 유예로 구성되어 있다. 마이클 페피엇의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원제: Artists’ Lives)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예술가의 신화를 걷어내는 동시에, 그들이 예술 안에서 어떻게 자신을 구축하고 분해했는지를 세심하게 추적한 기록이다.

페피엇은 단순한 전기 작가가 아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유럽 현대미술의 현장을 통과하며, 직접 보고 듣고 질문하고 메모한 이력은 하나의 사료이자, 비평이다. 특히 프랜시스 베이컨과의 오랜 우정을 바탕으로 한 깊이 있는 관찰은, 기존 베이컨 평전에서 포착하지 못한 미세한 흔들림까지 담고 있다. 베이컨의 자기 파괴적 습관이나, 반복되는 이미지의 강박적 재현이 단순히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어떻게 회화적 언어로 번역되었는지를 페피엇은 삶과 작품을 가로지르며 풀어낸다.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은 27인의 예술가를 다룬다. 구성은 단상과 회고, 인터뷰가 혼합된 복합적 서술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각 예술가에 대해 일정한 분석 틀을 고집하지 않고, 그 인물에게 맞는 형식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자코메티 장에서는 조형의 실패와 반복에 대한 성찰이 두드러지고, 앙리 미쇼 편에서는 언어 실험과 환각의 체험이 중심이 된다. 그만큼 페피엇은 자신이 다루는 대상에 따라 언어의 톤과 밀도를 조율할 줄 아는, 유연한 기술자다.

텍스트에서 가장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거리의 감각’이다. 페피엇은 언제나 예술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너무 가까워지지도, 너무 멀어지지도 않는 그 거리감 덕분에 그는 예술가를 단순한 인물로 환원시키지 않으며, 동시에 그들의 인간적 조건을 놓치지도 않는다. 그는 고흐를 단순히 불행한 천재로 보지 않고, 감각의 예민함과 그것이 그린 선의 밀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베이컨의 회화 속 폭력성 역시 사적인 파괴 충동 이상의 구조적 탐색으로 읽어낸다.

이 책은 또 다른 차원에서 하나의 ‘아카이브’로 읽힌다. 회고록이면서도 구술사적 성격을 띠며, 개인적 기억과 미술사적 맥락이 교차한다. 페피엇이 인터뷰한 장면들, 스튜디오에 앉아 있던 온도와 대화의 리듬까지도 독자에게는 하나의 사료로 작용한다.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예술이 태어나는 환경의 감각들—빛, 침묵, 냄새, 말의 박자 같은 것들—이 이 책에서는 살아 숨 쉰다.

페피엇이 다룬 예술가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낸 사람들”이다.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예술로 옮기는 방식으로 존재를 지속해온 이들이다. 예술은 그들에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종종 실패이며, 때로는 그 실패를 견디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페피엇은 이들의 곁에서 그 과정을 함께 목격한, 드물게 절제된 시선의 기록자였다.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은 예술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예술가로 존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각기 다른 층위에서 작용하는 책이다. 그것은 예술가를 ‘기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들이 어떻게 흔들렸고, 주저했고, 그러나 끝내 붓을 들었는지를 말한다. 한 사람이 평생을 걸쳐 예술가를 관찰하고, 묻고, 기록한 이 서사는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잊고 있는 예술가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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