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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 - 고전 속 퀴어 로맨스
숀 휴잇 지음, 루크 에드워드 홀 그림, 김하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2월
평점 :
고대라는 시간대는 묘한 향수를 불러온다. 고도로 치밀하게 뒤얽힌 정치경제 시스템에 깎이고 갈리기 전 인간 본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오래된 거울.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튕겨져 나오기 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깊은 우물. 현대가 앓는 정신적 질곡의 적지 않은 부분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를 간직한 무의식의 시원.
퀴어는 또 어떤가. 퀴어는 젠더의 경계를 묻고, 경계를 지우고, 그것을 넘고 교란시키는 물음이자 실천이다. 그런 만큼 퀴어는 관습적 젠더 규정이나 규범으로부터 달아나며 정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재정의 해볼 것을 재차 요구한다. 퀴어는 인간 안에 있는 성적 지향의 다채로운 틈을 벌려 활짝 개화시킨다.
아일랜드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 숀 휴잇은 고대와 퀴어라는 이 매혹적인 세계를 로맨스라는 주제로 엮어 하나의 작품집을 완성했다. 이 책 <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가 그 결과물이다. 고대와 퀴어와 로맨스라니.
기다리던 그 책이 아닌가. 여러 장르의 예술을 통해 산발적으로, 늘 아쉽게 접했던 고대 퀴어 로맨스를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나다니. 반가울 수밖에.
“모든 퀴어에게는 동일한 과거가 있고, 모두가 그 과거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 숀 휴잇의 문장이다. 울림이 크다. 작가는 고대 세계의 퀴어 이야기를 읽고 세계 속에 자신의 자리와 소속감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생득권을 확인한 순간이었고, 계시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첨언한다. 그런 만큼 작가는 고대의 이야기가 온전히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길 원했다. 그래서 숀은 결심한다. “고대인의 눈부신 퀴어 에너지를 이미지와 이야기에 담아” 독자들에게 건네겠다고.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숀의 바람처럼 모든 이야기는 그림과 함께 완성됐다. 영국의 주목받는 현대 화가 루크 에드워드 홀은 각각의 이야기에서 받은 영감을 붓 끝에 옮겨 책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선명한 핑크 배경에 초록색 화관을 쓰고, 정면을 응시하는 청년을 그린 표지를 보라. 청춘과 사랑이 달콤하게 밀려온다. 화가의 드로잉은 자유 분방하고 색채는 순수하다. 모던하고 경쾌한 루크의 그림은 퀴어 로맨스에 부당하게 드리운 무겁고 어두운 구름들을 말끔히 걷어낸다. 고전과 현대 예술의 발칙한 만남이 창조해낸 이렇게 퀴어한 책이라니. 독자는 두 배로 즐겁다.
책은 선별된 고전에 대한 정보, 문학적 비평, 작가의 감상, 작품의 역사적, 현재적 가치를 작가의 안목으로 살펴보고, 작품의 원전을 읽도록 구성됐다. 이 책을 안심하고 즐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작가의 균형 잡힌 관점 덕분이다. 이 고전들이 자기 존재의 기원을 일깨웠다고 고백했다고, 숀이 지난 시대를 무조건 찬미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고대 지중해 세계를 낭만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는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신분제, 젠더 불평등, 여성 혐오, 이 외에도 “현대의 진보적 사고”에 동화되지 않는 자유의 장애물들을 작가는 비평가로서 놓치지 않는다.
“고대 세계는 완벽한 거울도 아니고 단순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거울도 아니다.” 작가는 관점을 분명히 한다. 고전을 해석하고 그 영광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재창조할 책임은 후대 독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상화된 사회의 불완전함과 다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열렬한 노래를 한껏 즐기라고 독자에게 권한다. 이처럼 작가는 현대인의 비평적 거리도, 풍요로운 감상 권리도 놓치지 않는다.
숀 선장이 운항하는 황금배를 타고 고대로의 물결을 따라가 보니, 일단, 풍광이 너무 아름답다. 고대 작가들의 문장들은 어쩌면 이리도 풍요롭고 다채로운지. 작가들의 시적인 묘사에 루크의 그림까지 더해지니, 책 안에 고대 지중해의 자연이 환한 빛처럼 펼쳐진다. 쏟아지는 햇빛, 무성한 수풀, 주렁주렁한 과일, 철썩이는 파도, 은은한 달, 호박색 밀밭. 여기에 더해지는 또 하나의 자연, 언제 어디에서든 감지되는 인간들의 성적인 기류. 대기 속을 윙윙대며 교차하는 퀴어한 전파들.
본격적으로 이 책에 담긴 인간의 이야기는 지중해의 풍광처럼 더없이 풍요롭다. 초원 목동의 순수한 짝사랑에서부터 네로의 광기어린 폐륜까지. 운문과 산문을 넘나들며 다종한 이야기가 전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달콤함에 노곤하다, 쓸쓸함에 뒤척이고, 쾌락에 달아올랐다, 능청스러움에 킥킥대고, 분노로 타오르다, 적나라함에 움찔하고, 잔인함에 몸서리치다, 운명에 넘어진다. 그야말로 희로애락, 오욕칠정, 그 사이사이의 감정들까지 인간 감정의 마디마디를 살뜰하게 추체험한다. 새삼 이래서 고전이구나, 감탄하게 된다.
유구한 사랑의 기원을 밝힌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퀴어한 매력을 이미 알아봤던 키케로의 연설, 사포의 로맨틱한 시들, 헤라클레스의 숱한 사랑과 복수, 라틴어 금석문에 적힌 비가들, 남성 창부의 신세한탄, 티불루스의 고대판 연애 매뉴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들,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향연 속 사랑에 관한 담론, 젠더를 희롱하는 시인들의 시... 신전과 거리, 천상과 지하, 성과 속을 분주히 오가는 이 책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숀은 고대 지중해 세계가 기록한 퀴어와 관련된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들을 검열 없이 풍요롭게 이 책에 담았다. 덕분에 독자는 정말 다채로운 이야기의 축제에 참여하게 된다. 그 중 최고의 아름다움은 단연 시와 신화 속에서 불꽃처럼 터져 나오는 에로스의 향연이다. 섹스와 젠더를 뛰어넘어 주고받는 정신과 육체의 교감은 더없이 시적인 언어들로 화려하게 만개한다. 이에 못지않게 퀴어의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쓰여진 산문들은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한다. 고대인들의 능수능란하고 능청스러운 입담과 필력에 허를 찔린다. 그들은 살아있다. 고대인들의 풍자와 해학을 현대들이 따라갈 수 있을까. 굉장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뭔가 가슴 한구석에서 해동의 샘물이 퐁퐁하고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숀의 비평은 해박함과 균형감, 유머와 재치, 유려한 문장으로 빛을 발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다른 대륙들의 고대 퀴어 이야기들도 궁금해진다. 이 책이 뽑아 올린 퀴어 서사의 황금줄이 이렇게 나를 더 넓은 고대 퀴어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 퀴어 우주의 무한한 별자리 안에 큐빅처럼 박힌 책. 인간이라는 우주에 찬란하게 빛나는 퀴어의 웃음과 눈물이 책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우리는 언제 우리 눈에 드리운 안개를 걷고 이 광활한 우주 속 별들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을까.
초콜릿과 어울리는 로맨틱한 선물로도 제격인 이 사랑스러운 책은 지금 여기에 던지는 질문 또한 넓고도 깊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범화된다. 이는 정체성의 서열화로 이어지고 이성애 밖의 성적 지향과 성애의 실천은 극단적으로는 질병화, 범죄화 되기까지 한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는 누구의 사랑을 상상하는가? 누구에게 욕망을 부여하는가?” 상상과 욕망의 영역마저 관습과 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다.
이 고전이 증명하듯 법과 제도는 당대 인식의 산물이다. 질문을 바꿔보자. ‘이성애가 사회의 규범이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퀴어에 대한 혐오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누구인가?’ 숀은 이 책으로 “퀴어함의 원형 신화와 다시 연결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힌다. 우리는 섹스와 젠더, 섹슈얼리티의 이분법 세계를 탈출해야 한다. 그 열린 문으로 항해하는 황금배를 타시라. 이 책에 승선해 보시라. “뻔뻔할 만큼 당당하게” 풍성하고 다채로운 삶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살아있다. 누구보다 선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