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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평점 :
“반팔 티셔츠와 목도리와 외투와 우산과 장화가 늘 곁에 있으니 인간은 날씨 인간이고, 그러니 날씨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다.”(7)
편한 옷과 모자와 장갑, 장화와 머플러, 그리고 우산과 초콜릿을 늘 곁에 챙기는 나 또한 날씨의 인간이고, 그러니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이 철학자의 말은 솔깃하다.
철학자 서동욱은 떠도는 구름으로부터 청명한 하늘을 펼쳐내는 니체의 글을 인용하며, “날씨는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날씨를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무능을 동서양의 고전들을 통해 일깨운다. 이 철학자의 결론은 뭘까? 인간은 날씨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날씨를 만드는 일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의지의 영역이다.
“내 마음은 어둠 속에서도 햇살처럼 커져야 하며, 가뭄 속에서도 그토록 좋아하는 빗소리가 울려 퍼지는 우산 아래의 원형 극장을 만들어야 한다.” (9) 어떻게? “진정 모든 변화는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철학자는 말한다. 책의 제목이 나온 사유의 시작이다. 생각은 날씨를 바꾼다. 철학은 세계를, 삶을 만든다, 바꾼다. 의지로서. 이 책은 사유가 사물과 현상을 다르게 해석하여, 종래와는 다른 사물과 현상으로 변이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철학은 날씨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그래도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문장에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이런 의문을 갖는 독자를 위해 철학자 서동욱은 에필로그에 작은 예시를 심어놓았다.
“차가운 조각상이 된 너의 손을 잡아 내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 중략 - 내 손 안에서 작은 지구가 조금씩 움직여 계절을 바꾸려 했고, 이내 봄과 초여름이 겨우 부화한 동물들처럼 조심조심 움직였다. 그렇게 나는 네 손을, 아니 지구 하나를 쥐고 있었고, 두 손이 잠시 피해 있던 외투 주머니 속에선 별자리들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모든 것이 무사할 것이라 말하듯 날씨가 바뀌었다.” 327
저자의 예시는 얼마나 따뜻한가. 하지만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라는 문장이 불러오는 첫 번째 이미지는 ‘기후 변화’이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철학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과학 만능주의, 자본주의는 정말 날씨, 아니 기후를 바꾸었다. 이 책의 제목은 낭만적인 은유가 아니라 현실의 가감 없는 묘사이다.
낙관의 가능성은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문장을 다시 믿는 것이다. 조물주처럼 기후까지 바꾸어 버린 인류의 오만함을 반성하는 철학만이 변해버린 기후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녹이는 그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철학, 욕망의 한계를 스스로 단속할 수 있는 철학이 날씨를, 기후를 바꿀 수 있다. 이번에도, 철학이 날씨를 바꿀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책,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철학이 세계와 인간을 재발견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의 ‘철학하기’는 철학자와 철학책, 그리고 신화, 역사, 문학, 영화, 그림, 음악, 여기에 장난감, 산책, 혼밥, 게임, 기억, 바다, 우울, 여행, 날씨들 사이를 느긋하게 거닌다. 철학자의 시선은 반복되는 현상과 익숙한 물질이 감추고 있는 기호들을 찾아내고, 파편으로 누설되는 진실에 의거해 세계를 낯설게 재배치한다.
그는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통해 해답을 이미 배양 중인 질문하기의 위력과 곤란함, ‘마의 산’과 ‘스타워즈’를 관통하는 반복의 창조성, 복수의 텍스트를 통해 선택 가능성을 부정하는 자기기만성에 대해 얘기한다. 철학과 소설, 음악에서 발견되는 자기직면의 탈출(권태와 우울)로서의 여행, 유럽인의 소유물에서 세계 시민의 장소로 거듭 나야하는 바다까지, 철학자의 시선은 열려있다. 관계에 관한 이 철학자의 문장에 공감한다. 서로 다른 채로, 하나 되지 않고, 함께 머물기는 불가능한 이야기일까.
“인간에 폭력은 언제 탄생하는가? 바로 전체라는 저 허구 속에 개별적인 한 삶을 억지로 집어넣으려 할 때 도래한다.” (80)
“남녀 관계에서 인간은 결코 상대방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줄곤 상대방을 위해 미소 짓지도 않는다. 각자는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더 많이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히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며, 전체 그림 같은 것은 결코 맞추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길은 무엇인가? 오로지 상대방의 고유성, 서로 다름, 하나의 전체로 합일하려 하지 않는 상대방의 필연적인 고입을 존중하는 길 밖에 없다” (81)
“들뢰즈는 자신의 모범으로 삼는 스피노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피노자는, 타인들이 그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82)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 앞의 한 사람을 순응시키려 하고, 자신의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모두와 다른 고유함’이라는 타인의 본성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시도는 결국 자초하고 만다. 타인은 그가 있는 바 그대로 내버려둘 수 밖에 없다. 각자의 본성에 따라 살도록 놔두기. 이것이 자유인의 공동체가 제일로 삼는 교육이다. (82)
자기 전에, 깨자마자 늘 날씨를 확인하는 나는 날씨의 인간이다. 마음의 빗장까지 삐걱거리게 하는 바람과 뾰로통한 하늘이 계속된다. 봄은 늘, 이런 식이지, 속으로 볼멘소리를 한다. 하지만 나름의 대처법을 써서 먹장 하늘에도, 공기를 찢는 바람 소리에도 기분을 내지 않는다.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철학자의 단언을 믿고, 또 목차를 편다. 오늘의 날씨를 바꿀 수 있는, 제목을 따라가 본다. ‘산책’, ‘염세주의’, ‘유머’, ‘느려질 권리’ 그리고 ‘나이 드는 인간을 위한 철학’,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느려질 권리’는 쿤데라의 <느림>을 길게 인용한다. 너무 좋아하는 소설이라 반가워 독서 노트를 찾아보니, 노트해 놓은 부분이 작가가 인용한 부분과 에누리 없이 겹친다. 글에 대한 인상도 길게 남겨 놓았다. 반갑군. 쿤데라. 그의 작품들이 지나간다. 마지막은 ‘무의미의 축제.’ 느림의 공식을 간파했던 쿤데라는 삶의 복잡함 속에서 은밀한 느림의 쾌락을 향유했을까. 그랬기를. 소중한 작가, 소중한 글들.
‘화양영화’에서 시작한 느림에 대한 철학자의 사유는 느려질 ‘정치적’ 권리로 맺어진다.
“결국 정치적 싸움이란 느려질 권리를 얻는 문제이다. 시간이 느려지지 않는다면, 삶은 그저 노동을 거쳐 사망으로 가는 쾌속 열차인 것이다.” 251
죽음을 둘러싼 여러 철학적 사유들을 경유하는 챕터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프로이드의 ‘죽음 충동’. 생명 이전의 상태로의 회귀 욕망으로서의 ‘죽음 충동(타나토스). 자주 에로스와 짝해서, 이해되며 넘어갔는데, 아래 인용된 문장을 읽으며, 새삼스레 설득되고, 그만큼 공감하고.
“모든 생명체의 목적은 죽음이다. (...) 무생물체였던 것 속에 생겨난 긴장은 긴장 그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첫 번째 본능, 즉 무생물 상태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생기게 된 것이다.”(314)<쾌락 원칙을 넘어서>, 프로이트, 열린 책들.
산책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이든, 언제나 흥미롭다. 철학자 서동욱의 산책에 대한 단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줄줄이 등장해 반갑다. 우선, 루소. 이 책에서 작가는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인용하는데, 얼마 전에 인상 깊게 읽었던 ‘에니 아르노의 말’에서 노년이 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 루소의 바로 이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 또한 제발트의 ‘전원에 머문 날들’ 속에 루소의 글을 읽고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매일 산책하며 보낸 여가 시간은 종종 유쾌한 명상으로 채워지곤 했는데, 그 기억을 잃어버려 몹시 안타깝다.” 175 (장자크 루소, 문경자 역,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문학동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산책을 빼놓고 어떻게 울프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런던 거리 헤매기’와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그녀는 산책을 통해 보게 되는 것, 생각하게 되는 것, 의미가 부여되는 것에 대해 써왔다. 철학자가 인용한 울프의 산책에 대한 문장은 이렇다.
“걸을 때는 이런 수만 가지 흥분이 지속되지만, 내일이면 오래되고 죽어버린 구절을 쓰기 위해 앉아 있어야 하죠. (중략) 나는 걸으면서 계획을 세우겠어요.”176 (케리 앤드류스, 박산호 역, ‘자기만의 산책’, 예문아카이브)
다음은 니체이다. 산책을 통해 사상을 얻어낸다는 니체의 생각에 동의하며 철학자 서동욱은 산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 이어간다. “책상과 의자와 서재가 없던 문명의 저 이른 시기부터 인간은 사유해 왔다. 그때의 생각이란 걷는 일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걷는다는 것은 생각함과 몸의 움직임이 일치하는 축복의 체험이다. 불길을 키우듯 산책이 생각의 숨구멍을 열어준다.” 177 걷기를 통해 엉켜있던 생각의 실마리가 풀린 경험을 해본 이들은 철학자의 이 문장에 공감하리라.
그리고 친애하는 로베르트 발저. 발저의 ‘산책자’를 읽으며 얼마나 달떴던가. 책장에 있는 그 책만 떠올려도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철학자는 산책에 대한 많은 것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며 다음의 문장을 ‘산책자’에서 인용한다.
“산책을 하다보면 수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데, 그것이 내게는 얼마나 아름답고 유용하고 쓸모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179
마지막은 프루스트다. 철학자는 산책이 한 인간의 삶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단언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 증거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실 두 개의 산책로에 관한 이야기다. - 중략 - 한 번의 오후에 다 가볼 수 없는 이 두 산책길은 평생 동안 소설의 주인공 마르셀의 탐구 대상이며 사색거리다.” 180
여러 작가들의 산책을 경유해 사색을 이어간 철학자의 산책론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산책에는 삶의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산책에는 단조로움과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달리 말하면 반복과 반복을 통해 얻는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늘 똑같은 길로 들어서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하루이다. 이것이 일상의 구조 자체라는 것 - 중략 - 산책이 그렇듯 반복이 새로움이 아니라면, 일상은 그저 형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