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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너머 자유 - 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 ㅣ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평점 :
판결 너머 자유 / 김영란
극과 극, 강대 강, 안면몰수와 몰염치. 아침마다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파죽지세의 전장을 인터넷 작은 창으로 접한다. 우리 정치의 현장이다. 정치적 언어들은 자극성과 노골성을 매일 갱신한다. 정치 세력들이 쏟아내는 반지성적인 언어들은 시민들에게 다그친다. 당신은 어느 줄에 서겠습니까. 그럴수록 중간 지대는 좁아진다. 정치 세력의 언어는 시민의 일상에 침윤한다. 모 아니면 도, 제로섬 게임의 언설은 시민들의 사고와 언어까지 오염시켰다.
분열의 시대다. 김영란 선생이 최근 펴낸 이 책 ‘판결 너머 자유’의 프롤로그에 인용된 이청준의 ‘전짓불 앞의 공포’는 여전히 여기의 현실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국면들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판결 너머 자유’는 시민들의 공존과 상생을 위한 최소한의 합의를 찾을 수 있는 해법에 대한 고민으로 출발한다.
김영란 선생은 극단의 사회 분열을 막는 해법의 실마리를 롤스의 정의론에서 찾는다. 서로 다른 가치관, 신념체계, 정치관을 가졌더라도 바람직한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의견 일치의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롤수의 정의론은 시작된다. 이렇게 복잡하게 분화된 사회에서 시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합의 영역이 남아 있을까? 단순하지 않은 문제이기에 이런 질문은 당연하다. 롤스도 그 복잡성을 이미 깊이 파악했다. 그만큼 롤스의 정의론은 고도로 심화된 가정과 예측, 전제들을 통과한 정치 이론이다.
다양한 신념체계와 이해관계를 장착한 이슈들을 공공의 정의 실현을 위해 어느 선에서 어떻게 조정해야 할까. 롤스의 정의론에서 제시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에 이르게 위한 대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롤스가 그의 사유의 기본 전제들로 정의한 몇 가지의 개념들을 숙지해야 한다. 공적 이성, 포괄적 신념체계, 정치적 정의관, 원초적 계약, 무지의 베일, 중첩적 합의 등이 그것이다. 이 개념들은 개인이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어떤 사고 과정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지 자각하게 된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앞으로 시민 개인으로서 공적인 판단을 할 때 무엇을 염두해 두어야 하는지 길잡이가 되어 준다.
이 책 전체를 포괄하는 가치는 공적 이성과 중첩적 합의이다. 롤스에 의하면 공적 이성이란 “민주주의 한 시민으로서, 합당하게 받아들일 만한 혹은 이성적인 추론 과정을 의미한다.”(55) 중첩적 합의란 “기본적 가치관이나 세계관, 진리에 대한 신념 등이 다르더라도 바람직한 사회적 질서에 대하여 대체로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일단 그 중첩된 부분에 한해 성립시키는 합의를 말한다.(49)
김영란 선생은 우리나라 대법원 전원일치 판례들을 위에서 언급한 롤스의 핵심적 전략들로 분석한다. 이 작업은 공적 이성의 표본으로서 우리 대법원의 현주소와 역할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공적 이성을 대표하는 대법원 판사들은 대립한 신념이 첨예하게 경합하는 사건에서 법의 적용을 두고 다양한 입장을 가진다. 각각의 판결에 따라 판사들은 수동적인 현행 법의 적용자로 머무는가 하면, 바람직한 사회상을 위해 능동적으로 법을 해석하고, 법을 발견해낸다.
공적 이성의 얼굴로서 우리 대법원이 현재 어떤 모색들을 하고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각각의 판례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우리 사회가 실로 복잡한 가치와 이해가 경합하는 사회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준다. 그런 만큼 판결에 의해 사회적 쟁점들을 가시화하고, 그 쟁점들에 대한 숙의를 통해 헌법과 정의라는 가치를 갱신시키는 대법원 역할의 막중함을 생각하게 한다.
나와 가치관이 대척점에 있는 정치적 이슈를 접했을 때, 그 이슈가 사회가 분열로 치달을 때, 시민 개개인은 최소한의 합의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을까. 또 그 최소한의 합의를 평가할 어떤 준거 기준을 가지고 있을까?
롤스의 정의론에서 제시된 개념들,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를 위해 이 책에서 소개한 그의 정치 판단 과정은 대법원 판사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민들 먼저 공공의 분열을 최소화하기 위해, 합의의 기준들을 가져야 한다. 공적 이성과 중첩적 합의는 시민들의 정치 판단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정치적 이슈의 판단에 앞서 고려해야 할 기준들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총선이 다가온다. 어떤 후보가 분열을 방편으로 표를 얻고, 권력을 쟁취하여, 사회를 더 큰 혼란으로 이끌지, 또 다른 어떤 후보가 사회의 공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정의의 개념을 공공의 관점에서 확대시킬지 유권자들은 눈을 밝혀 분별해내야 한다. 이 책에서 소개된 롤스의 정의론과 대법원 판단 과정이 보여준 정치적 사고는 후보를 선택하는데 유용한 정치적 판단의 도구가 된다. 총선 전 필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