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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평점 :
“우리는 모든 일에 싫증을 내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일에는 그렇지 않다” 표제작 <혐오의 즐거움에 대하여>를 압축한 문장이다. 해즐릿은 친밀한 존재에서조차 미운 점을 발견해내고야 마는 인간 본성의 눅눅함을 들춘다. 관용이 아닌 혐오의 방향으로 인간 본성의 관성이 작용하는 예를 그는 조밀하게 나열한다. 거미를 혐오하는 일에서부터 종교 재판, 세습 왕권을 지지하는 열정까지 혐오는 촘촘하고 힘이 세고, 뒤틀린다. 소수자를 차별하고, 부당한 권력에 암약하며 악취를 찾아 코를 킁킁대며 제 살갗을 비비는 영국의 정치계, 언론계와 대중의 모습은 해즐릿의 눈을 비껴가지 못한다.
그러니 해즐릿의 냉소는 절망한 자의 냉소이다. 무언가를 봐버린 이의 냉소, 목격자의 냉소, 증인의 냉소. 그러나 잊지 않기로 결심한 이의 냉소이다. 활력 과잉의 시대에, 과거는 과거일 뿐인 현재와 미래만 존재하는 시대에 역사와 과오, 실패를 되새김질하고, 곱씹는 사람은 자주, 여러 곳에서 불편한 존재가 된다. 급진주의자 해즐릿은 영국의 불편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멈칫하거나 주춤하지 않는다. 해즐릿의 비평과 펜은 직진한다.
혐오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걸 해즐릿은 간파한다. 혐오의 시작점과 목적지가 얼마나 복잡한지, 혐오의 에너지가 어떻게 개인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개인으로 반사되고 증폭되는지, 혐오의 결이 얼마나 겹겹이 세세한지 이 에세이는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에 의해 정치화된 혐오에 용기를 내어 반기를 든 이들이, 소수자로서 혐오의 대상이 된 이들이 결국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혐오하기에 이르게 되는지를 해즐릿은 자신을 사례로 쓴다. 동지들의 배신들 속에, 끝까지 신념을 지킨 이가 보수파들의 중상모략에 의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누구와 나누기 어려운 절망의 표정이며, 자조의 고백이다.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에는 철학자 해즐릿의 인생관이 녹아있다. “삶에 집착하는 것은 사회가 고도로 문명화되고 부자연스러워진 결과다” 상업적이고 대중화된 문화에 포획된 근현대인들은 자잘한 오락에 길들여져 안전하게 축소된 삶에 만족한다. “따분하고 생기도 매력도 없는 삶의 임대 기간을 갱신하는 것” “정물화 같은 삶”은 자본주의가 깔아놓은 회로대로 움직이는 현대적 삶의 일면들이다. 삶이 지루할수록 감당해야할 죽음의 두려움이 커지는 아이러니를 해즐릿은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삶과 죽음에 관한 해즐릿의 시선은 서늘하다. 냉정한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상과 자기애는 근현대인의 불치병(치료 가능성을 나는 믿고 싶다)에 가깝다. 자타의 자존감이 자타의 비평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기괴하기 그지없다. 해즐릿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을 빨아드리는 과도한 자기애의 속성 때문에 우리 눈에는 세상을 다 합친 것보다 우리 자신이 무한히 더 중요해 보인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갈인가! “새로 정복할 대상을 찾는 하찮고 건방진 자아가 우연히 평범한 경쟁자”를 만나서 일련의 감정적 요동을 거쳐 질투심에 허우적거리는 과정을 해즐릿은 특유의 해학으로 풀어놓는다. “우리는 한 사람이 동시에 둘인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타인의 악덕과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자잘하고 집요한 인간 근성을 해즐릿은 헤집는다. 정말 웃기고, 진실을 누설하고, 계속 웃기며 진실을 쏘아댄다. 궁금하시면 <질투에 관하여> 편을 읽으시면 된다.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는 인간성의 만화경, 한 장으로 조망해보는 인간 존재의 모자이크이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인간 안에 내재하는 변덕, 비겁함, 위선, 비열함, 냉담함, 아집, 고지식, 허영, 심술, 오만 등등.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의 항목은 계속 나열된다. ‘나! 이런 사람 알아’로 호기롭게 시작한 해즐릿과의 인성 탐방은 ‘혹시, 이거 나?’로 수렴된다. 그만큼 해즐릿이 펼쳐 보이는 인간 군상들의 스펙트럼이 넓고 촘촘하다는 이야기이다.
“현대 정치인들 중 가장 훌륭하지 않은 인물이 이튼스쿨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해즐릿의 에세이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의 문장이다. 동공이 커진다. 생채기를 건드린다. 우리는 24시간 저 문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뉴스들을 접하고 있다. 현실과 사물의 이치에 무지한, 그 무지함에 대해 역시 무지한 똑똑한 바보들이 현상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세계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해즐릿은 똑똑히 보았다. 해즐릿이 보았던 것을 우리 또한 보고 있다.
앞선 다섯 편의 에세이가 인간 본성에 관한 에세이로서 해즐릿의 언론인, 비평가로서의 통찰을 보여 준다면 마지막 <맨주먹 권투>는 재담가 해즐릿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유쾌한 에세이는 해즐릿 문장의 예리함과 깊이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들어낸다. 세상사에 관한 분방한 호기심, 지칠 줄 모르는 관찰, 그리고 집중력 있는 경청과 집요한 기록의 욕구, 이야기를 즐기는 천성. 이것들이 해즐릿 글의 원천이다. 호방한 너스레와 바늘 같은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이 에세이는 해즐릿이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 그 만큼 인간사에 애정이 깊었던 사람임을 짐작케 한다.
“잊히지 않도록 이 이야기를 쓴다.” 그렇게 쓰인 <맨주먹 권투>는 아름다운 단편 소설 한 편을 읽은 듯 여운을 남긴다. 세기의 권투 시합에 대해 본인 말마따나 그는 “청산유수로 생생하게 설명”해 준다. 그가 묘사하는 장면들은 꿈결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안개비 속을 달리는 우편마차, 은빛 달과 밤의 푸른 빛, 여인숙에서의 밤샘 수다, 언덕 위의 링, “카스피 해의 두 무리 구름처럼”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고고하고 영웅적인” 두 명의 맨주먹 권투 선수. 이야기는 또 얼마나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지. 해즐릿은 비평가, 언론인 이전에 어쩔 수 없는, 타고 난 작가이다. 아무리 선선한 냉정의 안개로 몸을 감춰도 발산되는 작가의 따스함이 이 에세이에 퍼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