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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향기 - 진실한 존재의 철학적 탐구 ㅣ 실존의 분위기와 철학 : 시즌 1
한충수 지음 / 이학사 / 2024년 7월
평점 :
<실존의 향기> 첫 번째 에피소드는 ‘실존의 의미’를 탐구한다. “실존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삶이 전체의 중심이 된다.” 한충수 저자는 실존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 정의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의 실존 정의를 저자가 한국어로 여러 숙고와 단계를 거쳐 번역한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실존의 기분’은 실존의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개념들인 ‘기분’,‘책임’의 관계성을 통해 삶의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의미를 구별한다. 본래적인 삶이란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이고 비본래적인 삶은 기분을 끊임없이 전환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삶이다.
세 번째, 네 번째 에피소드는 비본래적 실존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비본래적 실존의 특징은 ‘잡담’과 ‘호기심’으로 요약된다. ‘잡담’과 ‘호기심’에 관한 하이데거의 탐색을 검토한 후 저자는 말한다. “잡담과 호기심은 모두 뿌리 뽑힌 삶의 태도입니다. 더 나아가 잡담과 호기심은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P70) 잡담과 호기심은 비본래적 실존이 “스스로 ‘진정으로 생생한 삶을 산다는 착각에’ 빠져 있게 한다는 것이다. (P71)
향기를 잃은 비본래적 실존의 증상이 잡담과 호기심이라면 그 처방은 실존의 결단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문장들을 경유해 실존의 결단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결단성을 지닌 사람은 그동안 스스로가 본래적으로 살아오지 않았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이를 온몸으로 실천하며, 자신의 실존에 무늬를 남기는 것입니다.” (P82)
본래적 실존이 되기 위한 실존적 결단으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하이데거는 예술, 정치, 종교, 철학을 제시한다. 한충수 저자는 그 중 예술을 통해 실존을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술은 주체에게 “열림”이라는 경험을 선사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결-단성(탈-출함)은 어떤 주체가 결심한 행동이 아니라 사람이 존재자 속에 갇힌 상태로부터 (탈출해) 존재의 열림을 향해 열어젖혀지는 것을” 의미한다.
“부분을 넘어 전체로”로 열리는 결단의 순간을 예술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주체를 “세계 전체와 관계하는 자신의 본래적인 실존을 회복”시켜주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간의 전환을 가져온다. “열림”을 통해 “맺어진” 주체들의 존재 등급들은 서로를 격상시킨다. 그것은 매혹으로 서로 가까워짐을 의미한다.
이어서 저자는 실존을 갉아먹는 노동의 의미를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통해 살펴본다. 책의 후반을 본격적으로 여는 에피소드는 ‘실존의 인물’이다. 그들은 바로 샤르트르와 그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로캉탱’이다. 로캉탱은 샤르트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으로 그는 존재의 무의미성에 사로잡힌다. “핵심은 우연성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정의상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P117)
어찌해 볼 수 없어 보이는 무상함에 빠진 로캉탱을 움직인 것은 에델 워터스(Ethel Waters)의 <Some of These Days>이다. 한충수 저자는 음악이라는 예술이 주는 영감을 통해 허무에서 실존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하이데거의 앞선 철학 개념들, 즉 실존의 의미, 실존의 잡담과 호기심, 실전의 결단과 회복으로 재해석해낸다. “순수한 존재는 쓸데없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삶,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삶입니다. 그에 반해 단순한 삶은 어떤 의미도, 이유도, 근거도 없는 삶입니다.” (P122)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실존의 사랑’이다. 실다운 존재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불운과 불행마저 자기 삶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니체의 “운명애(amor fati)”를 영화 <컨택트>를 통해 읽어낸다. 키르케고르의 짧은 일기를 통해 저자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 사랑하는,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숙고한다. “삶을 앞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삶을 ‘아주 조건 없이’ 긍정합니다. - 중략 - 순방향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삶을 뒤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아름답고 유의미하기 때문입니다.” (P150) 역시 키르케고르의 문장을 통해 초월적 사랑을 이야기한 야스퍼스의 철학으로 ‘실존의 사랑’은 마무리된다. “여인은 나이가 들면서 더 아름다워집니다. 하지만 그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만 그 아름다움을 봅니다.” 잘 여문 존재의 사랑은 타자를 깊게 ‘바라보는’ 것이다. 타자의 발견이야말로 실존의 사랑이다.
마지막 장은 자연스럽게 실존의 책임이다. “우리는 사람이 스스로를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자기 한 사람만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책임지는 것을 뜻합니다.” 샤르트르의 문장이다. 저자는 코로나19와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 문장의 의미를 곱씹는다. 저자는 실존의 대전제인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의 문제를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사유할 단서들을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찾는다.
연일 폭염이다. 기후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실존의 향기’를 통해 저자와 함께 실존 철학의 제 문제들을 살펴봤다. 저자가 ‘실존의 책임’이란 주제로 이 책을 마무리 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다. 저자의 정의대로 잘 여문, 참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이 선행 되어야겠다. 샤르트르는 주체가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모든 사람’을 지목했지만, 우리는 이제 그 지목의 한계 또한 자각하게 됐다. 인간만을 위한 기술과 윤리의 결과를 타존재들의 비명 속에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인간이 “실한 존재”, “참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책임”에 방점에 찍혀야 하고, 그 책임의 대상은 인간을 넘어서야 한다. 저자가 ‘시대의 양심’에 빗대어 설명한 하이데거의 “타인의 양심”의 외연을 고민해봐야 할 때이다. 저자가 강조한 실존의 결단과 회복은 열림을 통한 외부 세계와 타자와의 연결로 이어진다. 실존의 본래적 삶은 타자들과의 촘촘한 연결을 통해 가능해지고 충만해진다.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이며, ‘왜’ 존재하며 ( or 존재해야하며),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내내 놓지 못하는 질문들이다. 실존 철학은 여러 실존 철학자들의 탁월한 통찰과 철학서, 문학 작품을 통해 이 질문들을 정교하게 다듬어 왔다. 이 책은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다양한 예술 작품과 저자의 체험을 넘나들며 사유한다. 저자가 “해결”과 “해소”를 구별한 이야기에서처럼, 우리는 인간 존재에 대한, 삶의 목적, 의미에 대한 기존의 “질문”들 자체를 재고 해봐야 한다. 이제는 그럴 때라고, 기온이, 체온이 말한다. 이 책은 그 의심의 단초를 열어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실존이란 현재 어떤 냄새를 내뿜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