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키스의 말 - 2024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배수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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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들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p22)

 

그 여자는 가장 나중에 태어난 아이, 사무원, 우체부, 부처꽃, 새 사육사, 미니멀리즘 음악가, 지팡이를 든 산책자, 풍경, 겨울바람, 사라진 늙은 여자, 의미 없는 말, 신 없는 여자, 바우키스, 그리고 보리수다.

그리고 검표원, 커다란 검은 개, 회색말, 검은 외투의 주인, 나뭇잎 모양의 눈꺼풀을 가진 아이, 자연사박물관의 경비원, 음악가, 예술 애호가, 풍경, 얼음 방울 안개, 필레몬, 그리고 보리수는 그다.

 

<><모형 비행기 수집가>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모든 것이 아니다. 나선형 계단에서 울리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언제부턴가 그 소리는 계단을 오르는 소리인지, 내려가는 소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무한한 빛으로 만들어진 뫼비우스 띠의 빛 먼지들이다.

 

오직 바람이 말하게 하라”(p19)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은 방금 누군가가 빛으로 사라진 검은 산비탈 위 언덕에 나를 홀로 세워둔다. 아니, 우리는 처음부터 거기 그렇게 서 있었으며, 언제까지 거기 그렇게 서 있을 거라고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 언덕 위에서 내가 알던 것들이 미친 듯이 죽어가고(p43)” 있는 것을 '듣는다'. “마치 축제를 벌이듯이, 바람도 없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떨어지는 낙엽처럼.”(p43) 하지만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묻지 않는다.

 

<><모형 비행기 수집가>는 작별을 영원히 마중하는 이들이다. 작별은 시작된 적이 없기 때문에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어긋난 채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진다. 언제나 듣기 원하는 것은 돌과 나무의 내부로부터”(p43) 울려오는 최소의 음악”(p43)이다. 그것은 유일한 위로의 음악이다.  

 

예를 들자면 권력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중심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방식으로 하나의 혁명이, 하나의 예술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p36)

 

언제부턴가 길을 잃기 위해 배수아를 펼쳤다. 그의 문장 속에서 길들은 사라진다. 길들이 지워진 곳에 우묵한 정원이나, 검은 숲이 펼쳐진다. 깊은 나무 그늘 속에 수많은 눈들이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 낯선 장소들과 낯선 시선들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깊은 안도의 날숨을 뱉게 한다. 이번 <바우스키의 말>을 읽으며 알았다. 길은 없다. 길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무수히 중첩되는 빛의 산란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어지러운 산란 속에 희미하게 떠도는 어휘들의 명멸.

 

나는 난간 위로 허리를 깊이 숙인 자세로 나선형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p35)



붉은 가을, 대지 위에서 썩어가는 낙엽을 본다. “이제 그녀는 영원히 이 자리에 머물 것이다. 손바닥에 피어나는 초록빛 이끼” (p53) 우리는 하나의 어휘가 해방된 자리에서 오직 바람이 전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강물 안에서 우리는 수면 위로 허리를 깊이 숙인 보리수를 바라본다. 우리는 심연이다. 심연을 가볍게 스치며 웃는, 혹은 연민하는 바우키스의 숨결을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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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 - 망해가는 세계에서 더 나은 삶을 지어내기 위하여
양미 지음 / 동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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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동안 나는 일주일을 시골과 도시에서 나누어 보내는 생활을 했었다. 익숙한 장소였고, 도시보다 친숙한 이들이 더 많은 곳이었다.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귀촌의 의지를 가지고 있던 나는 그 몇 년 동안 내 바람의 막연함과 무모함을 체감할 수 있었다. 심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곳이었기에, 나는 그 장소에서 내가 느낀 고립감을 설명할 거리를 가지지 못했다. 이 책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를 읽고 나는 시골 체류 동안 내가 느낀 답답함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이 책을 읽고서야 막연했던 고립감의 이유를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살펴볼 있었다.

 

저자 양미는 시골살이의 어려움의 이유와 그 해법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그건 바로 삶의 가능성기본권 보장이다. 시골에서의 의 지속성, 그리고 그 을 가능하게 할 기본권을 보장해 줄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확고한 의지, 그리고 에 초점이 맞춰진 일관성 있고, 지속적인 정책과 지원. 이 두 가지는 저자 양미가 제안하는 시골살이의 전제 조건이다. 저자는 기본권 중에서도 기본, 최후 방어선이라 할 연결권과 주거권, 경제권, 참정권, 청구권의 측면에서 경험한 시골살이의 현실을 기록한다.

 

 

이 책의 장점은 현재 촌락 시민들의 기본권 침해 문제를 현장의 경험과 더불어 가장 최근의 통계들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가 체감하는 현실과 통계는 맞물려 시골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나를 포함한 도시민들은 시골에서 경험한 불편을 불평한다. 간혹 어떤 이들은 시골 생활의 불편 이유를 시골 거주 시민들의 낮은 사회문화적 의식, 게으름, 정치의식의 부재에서 찾기까지 한다. 하지만 저자 양미는 보여준다. 그들이 느끼는 시골의 비합리성, 불편함, 전근대성, 정체됨의 근본적인 원인이 정치의 실종, 민주주의의 부재에 있음을 말이다. (나는 주민이란 말은 현실에서 정치적 참여 주체라는 느낌이 작아 지역민들의 정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민이라고 쓰기로 했다.)

 

시골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각종 통계, 현재 시행중인 지방 정책과 각종 사업, 저자가 접한 행정 관료들의 모습을 보면,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는 촌락에 사람이 산다.’는 사실, 그곳에 삶이 있다는 사실, 그곳에 이주해 삶을 일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시골에서의 삶은 연결이 끊겨 고립으로 이어지고, ‘경제권이 보장되지 않아 생존권은 불안하고, 빈집은 많으나 이주할 수 있는 집의 조건은 열악해 주거권보장마저 불안정하다. 그리고 이 기본권들의 보장을 보장할 지방 행정 실무자들은 또 다른 의미의 정치로 지방 행정의 참정권과 청구권의 보장마저 막고 있다. (내가 봐온 바로도 시골 정치 현장은 지연, 학연, 혈연으로 어지럽게 얽혀있다.)이런 현실에서 그곳에서 삶을 일구고 살아온 시민들뿐만이 아니라, 귀촌인, 귀농인의 삶은 어떻게 지속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삶의 문제는 곧 정치다. 정치가 삶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 정책과 행정의 효과가 발휘된다. 그러니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곧 정치의 실종이고, 정책과 행정의 무능이다.” 175p 저자의 이 말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했던 생각 또한 이것이다. 정치가 없는 곳에 삶은 없다.

 

이 사회에서 경제권, 이동권, 주거권에 대해 말하면 그것들은 개인의 문제로 여겨진다. 각자도생인 것이다. 정규직, 자차(자기 소유 자동차), 자가(자기 소유 집)는 대한민국 어디서든 시민의 명패이자, 시민권과 기본권을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기본권 보장을 위해서도 자격이 필요한 현실을 보게 된다. 시골에서는 기본권 보장의 허들이 더욱 높다. 저자가 주목한 기본권의 렌즈로 살펴보니 시골이야말로 각자도생의 최전선이다. 저자의 시선이 가서 닿는 각자도생의 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위에 언급한 자격을 갖추지 못해 더 열악한 존재들이 보인다. 노인들,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와 농민들, 여성들, 청년들, 그리고 활동가들.

 

나는 여러 분야의 활동가들이 대한민국을 그나마 이 정도로 유지시킨다고 생각해왔다. 나를 부끄럽게 하는 존재들이 많지만, 그 중 단연 최고는 활동가분들이다. 저자는 시골에서 노동 중인 활동가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노동의 위계 속에 갇혀버리는 사회적 기여 노동들’. 저자는 기여가 어떻게 정치가 될 수 있을지 묻는다. 활동가들의 현장 조사와 대안 제시, 실천은 어떻게 지역 행정과 만나고,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을까. 현장의 필요와 행정은 계속 헛바퀴가 돈다. 활동가들의 노동 역시 시골에서는 더욱 그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조사와 대안은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치와 행정은 국민보다 자기 조직의 수장이 가진 의견에 따라 움직이는 데 익숙하다. 시골에서 군수는 제왕적 권력을 행사한다. 군수의 말 한마디에 이전에는 절대 불가였던 것이 꼭 해야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나는 선거철마다 국민의 권력을 위임할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견을 듣고 반영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믿는다.” 193p

 

 

저자는 저자가 거주중인 지역의 현실을 깊이 이해해고자, 지역 문제가 목격되면 지자체에 정보공개청구를 한다. 어떤 정보는 공개되고, 어떤 정보는 성의 없이 작성되고, 어떤 정보는 누락된다. 그렇게 공개된 지역 정책들과, 그 정책들을 꼼꼼하게 분석한 저자의 글들을 읽다보면 심란해짐은 어쩔 수 없다.

 

 

이 책의 최고 미덕은 현재 촌락이 안고 있는 문제를 저자가 직접 겪고, 취재하고, 부딪혀 세부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대안까지 제시한다는 점이다. 섬이 된 마을과 마을을 다시 연결하고, 버스운전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는, 무엇보다 시골 시민들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의 미래를 저자는 제시한다. 또한 시골 빈집들을 적절하게 이주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대안들, 시골의 삶에 맞춘 다양한 경제 활동의 기회 마련 등, 저자는 실행 가능한 정책들을 고민한다.

 

 

일자리가 불안정해도, 고용이 안 되고, 집과 차가 없어도 삶이 불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시골 청년들의 이야기는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골살이의 밑그림이다.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든 삶이 불안하면 안 된다. 지방 소멸? 청년들이 무엇이든 시작할 있는 기반을, 그들이 그곳에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정적인 여건을 만들지 않는다면 지방의 미래는 밝지 않다.

 

지역 문제를 지역불균형발전의 프레임으로 보면, 모든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수렴되고, 그 해법 또한 경제적 지원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시골살이의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삶이다. 삶은 연결되어야 하며, 삶은 돌봄이 필요하며, 돌봄에는 장소가 필요하며, 경제권은 삶의 존엄을 위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지원금과 보조금을 아래로 주는 것으로, 위로부터 받아쓰는 것으로 지방 자치가, 시골살이가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새삼 삶이 어떤 것들로 구성되며, 어떤 변화들을 거치게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삶다운 삶이다. 그것이 전부다. 저자의 말대로 정치가 삶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시민 각자의 시골살이의 전망도 달라진다.

 

 

눈에 편한 초록빛 종이와 글자색에, 무엇보다 큼직한 폰트에 나는 이 책을 눈 편하게, 빨리 읽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불편하게, 생각지 못한 이유로 더 빨리 읽게 되었다. 이유는 한 가지다. 내 무지다. 시골에서 10대 말까지 보내고, 가족의 근거지가 여전히 시골인 나는 시골과 시골살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시골을 알고 있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일깨웠다.

 

몸이 그곳을 떠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거기에 머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여전히 그 장소에 속한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익숙함과 친숙함 때문에 나는 그곳을 바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다. 아이러니다. 나는 동시대 주류 편향의 사회과학이, 동시대 문학이 시골을 소외시킨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내 무지를 알고 난 후, 시골을 소외시킨 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시골버스운전노동자들의 불친절에 관한 몇몇 기억이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시골 버스 운영 시스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고,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부끄러웠다. 많은 다른 부분에서도, 부끄러웠다. 이 책은 이렇게 나를 각성시켰다.

 

 

귀촌은 삶의 목적, 방식, 태도와 직결되는 선택이다. 그것도 수도권만 존재하는 현 한국사회의 정치경제 지형 속에서 더욱 그렇다. 그것도 자본주의 키드, , 자본주의가 키우고, 보살핀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힙 함과 누추함, 소외와 낭만, 혐오와 선망, 폄하와 과시. 인정 넘침과 몰상식, 대형 카페와 대규모 축사, 풍요로운 초록 들판과 가난, 고급 자동차와 경운기. 외부인의 일방적인 시선과 단속적인 출입으로 시골은 복잡다단한 이미지와 이야기로 누더기 상태다.

 

시골에서 작은 책방을 꿈꾸든, 앙증맞은 카페를 그리든, 소박한 자영농을 희망하든, 대규모 농장을 계획하든, 한가한 한량을 열망하든 그 현실은 정치적일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얼마나 절실한 마음으로 하지만 냉정하게 쓰려고 했는지 행간마다 느껴진다. 그리고 그가 차마 못 다한 이야기까지도. 현장을 모르는, 머릿속의 이야기( 책상 위의 이념과 이론)를 쓰는 것과, 현장에서 골치 아픈 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회피하려고만 드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쓰는 이야기는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 차이를 알게 해준다. 저자의 절실함, 절박함이 전해진다.

 

우리는 왜 멀리 있는 소위 중앙 정치에는 관심도 많고 참여도 하면서, 가까이 있는 지자체에서 뭘 하고 있는지, 그들이 움직이면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 225p 저자의 의문처럼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현장을 아는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 이 책에는 계속 이어진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시작은 집과 마을이라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촘촘한 민주주의는 배제되는 존재가 없도록 모든 것을 고려하는 시스템이기도 하고, 그렇게 되고자 하는 지향이기도 하다” 227p 민주주의에 관한 저자의 신념은 구체적이다. 현실 정치는 퇴행에 퇴행으로 거듭 퇴행 중이다. 저자의 신념은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집요하게 붙잡고 절대 놓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다.

 

 

귀농과 귀촌, 시골로의 이주를 꿈꾸는, 계획하는 이들에게 필독서가 생겼다. 시골살이의 지극한 현실, 통계와 공개된 행정 정보로 분석된 현실의 원인들, 실현 가능한 대안의 실마리들이 이 책에 촘촘하게 엮여 있다. 중앙과 지방의 정치인에게는 더욱 필독서이다.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당신들이 망각한, 이 사회의 거대한 사각지대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정치꾼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을 일구는 살림꾼이 되고자 한다면 민의와 참여, 반영으로 움직이는 민주주의의 생생한 아이디어를 이 책에서 얻게 될 것이다. 시민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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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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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해즐릿의 국내 최초 에세이 번역인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의 발간 축사를 맡은 이는 버지니아 울프이다. 그렇다. 당신과 내가 경애해 마지않는, 그 버지니아 울프다. 20페이지에 달하는, 오직 윌리엄 해즐릿을 위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는 해즐릿이란 작가의 베일을 섬세하게 걷어 올린다. 처음 이 책을 받은 날 밤, 울프의 이 에세이를 먼저 읽었는데, 그 희열감이란. 에세이 한 편으로 독자를 달뜨게 하는 작가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버지니아 울프는 윌리엄 해즐릿 사후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이 에세이를 썼다고 한다. 이 한 편의 에세이를 위해 그는 해즐릿의 방대한 전작을 8개월에 걸쳐 읽었다고 한다. (울프의 일기에도 이 에세이를 쓰는 그의 마음 씀이 기록되어 있다.) 1930년의 일이다. 울프가 전하는 1830년 타계한 해즐릿의 삶과 작품들을 2024년 독자인 내가 읽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200여 년의 시차를 가뿐히 뛰어 올라 (그녀의 올랜도처럼) 해즐릿의 시대와 해즐릿이라는 사람과, 그의 문장들을 생생하게 현대의 시점으로 풀어 놓는다.

 

한 편의 에세이 안에서 세 시대를 사는 개인들이 만나 대화를 하는 셈이다. 울프는 주선자인 셈인데, 만찬 테이블 위에 만남에 장애가 될 철지난 접시들을 걷어내고, 모두(당대와 후대의 독자들)의 미각을 만족시킬 신선한 요리들을 마련해 놓는다. 보수파와 보수 언론에 의해 계획적으로 암매장된 해즐릿의 사상 세계가 사후 백년간 잊혀 졌다가 울프의 이 에세이로 조명 받아 해즐릿이 현대에는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안착했으니 울프는 놀랍도록 탁월한 안목을 가진 주선자인 셈이다.

 

 

회화와 지적인 탐구 면에서 두루 욕망과 재능을 가졌던 해즐릿은 두 갈래의 길을 오가며 애를 썼다. 결국 그가 택한 길은 사상가의 길. 그러나 해즐릿은 글속에 화가의 자취를 남긴다. 자유롭게 사유를 구상하고, 문장들을 색감으로 물들인다. “(상략) 그는 섬세한 분석의 펜을 내려놓고 물감을 가득 묻힌 붓으로 한두 구절에 눈부시고 아름다운 색을 입힌다.”라고 울프는 남겼다, 해즐릿의 문장들은 암송하고 싶도록 자주 눈부시다.

 

우리를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은 매우 놀랍다울프에게 동의한다. 해즐릿의 에세이들을 읽고 있으면 2세기 전에 쓰여 진 글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살아서 쾌활하게 약진중이다. 해즐릿의 사유와 문장이 시간에 변색되거나 마모되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과 사회의 심연에 대한 그의 사유가 근원적, 본질적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사의 이치를 납득하고 싶었던 해즐릿의 욕망과 열정을 울프는 알아본다. “그는 신랄하고 탐색적이고 예리하다.” 인간 심성과 현상들은 해즐릿의 펜촉으로 해체되고, 해부되고, 가차 없이 해독된다. 울프는 해즐릿의 글쓰기를 맷돌에 머리를 가는 것에 비유한다. 맷돌에 갈린 섬세한 사유의 알곡들은 사고의 기압과 직관의 번득임과 통찰의 순간으로 책 전반에서 빛난다.

 

유머와 위트는 생동감 넘치는 해즐릿 문장의 중심이다. 무겁고 어두운 주제라도 그는 상쾌하게 운을 띄운다. 그리곤 심각함이라는 제스처를 비웃기라도 하듯, 산보하듯 유쾌하고 가벼이 사유를 확장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통찰의 화살을 문장 밖으로 명중시킨다. 유유자적하다 힘 안들이고 허를 찌르는 그는 명사수이다.

 

이 에세이가 해즐릿에 대한 찬사로만 써졌을 거라 짐작하면 안된다. 울프는 100년 전 타계한 작가라고 봐주지 않는다. 해즐릿과 똑같이 신랄하고 가차 없다. 그런 면에서도 두 사람은 닮았다. 한없이 예민하고 명민한 사유와 부드럽고 아름다운 문장들.

 

 

해즐릿은 시인처럼 강렬하게 세상을 느꼈다.” 울프의 통찰처럼, 해즐릿의 평이한 문장에서조차 미세한 격정이 전류처럼 감지된다. 종교와 봉건의 잔재로 중세의 그림자가 여전히 암울하게 드리웠던 19세기 초 영국에서 타협 없는 급진적 개혁을 부르짖다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혔던 그의 개인사를 생각할 때, 그의 에세이들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울프의 말대로 심히 독선적이지만 인류의 권리와 자유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한 인물을 이 에세이집에서 만나게 된다.

 

울프는 쓴다. “친구들은 정부에 투항했으나 해즐릿은 평생 소수파로 남아서 자유와 동포애와 혁명의 신조를 옹호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독선이 필요했다가면 없이 가면무도회에 뛰어든 사람의 눈에 가면들의 왈츠는 얼마나 곤욕스러운 것인가. 해즐릿의 독설과 냉소는 어쩌면 그에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1세기, 지금도 요원한 인류의 권리와 자유의 보편적 보장을 19세기 초에 굽히지 않고 급진적으로 외쳤던 그가 받았을 몰이해와 박해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유머와 재치에 자주 웃게 되지만, 그만큼 글의 뒷맛이 쓰고, 자주 쓸쓸해지는 이유다.

 

그의 에세이들은 단연 해즐릿 자신이다과연 그렇다. 해즐릿은 시종일관 통렬하고, 유쾌하고, 아름답다 (울프가 인용한 그의 글들도 정말 아름답다. 이 사람 뭐지, 할 정도.) 짧은 그의 삶 후반부는 신산했다. 넘치는 재능과 열정에도 가면 없이, 살갗 없이 절벽 앞에 홀로 선 사람. 뒷모습이 쓸쓸하게 각인된 이는 내 마음속에 집을 짓는다. 해즐릿은 그렇게 나의 벗이 된다.

 

해즐릿에 관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를 읽고, 울프에게 다시 빠졌다. 해즐릿의 에세이들을 읽기 전 첫 장에 실린 울프의 에세이를 읽었을 때는 해즐릿의 글에 대한 기대와 울프의 문장들을 만난 반가움에 희열감을 느꼈다면 해즐릿의 에세이들을 읽고 난 후 다시 읽으니 다른 종류의 감동이 새겨진다. ‘그렇지, 맞아, 그래!’의 연속. 이 에세이를 위해 해즐릿을 읽고 또 읽었을 울프의 모습이 그려진다.

 

천재의 눈에만 보이는 천재의 명암이 있기라도 하듯이, 울프는 어쩌면 이렇게 해즐릿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리도 세심한 이해를 담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사랑의 행위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특전을 누리는 것이다. 즉 해즐릿이 되는 것이다

 

해즐릿의 비평 작업에 대한 울프의 문장이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 똑같은 문장을 울프에게도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이며, 즉 울프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의 행위로서 비평을 한 작가들이며, 어쩔 수 없이 자기만이 쓸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글을 쓴, 자신의 글에 자신의 인장을 남긴, 누구나 누릴 수 없는 재능을 가졌던 이들이다. 문학과 삶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통 받은 이들이다.

 

 

이 책에 실린 해즐릿에 관한 울프의 에세이를 여러 번 읽을수록 애틋하고 아름답다. 애잔함은 해즐릿이 살아낸 삶의 모습들이 남긴 상념 때문이고, 아름답다함은 실제로 만난 적 없는 해즐릿과 울프가 오로지 글로만 나눈 견고한 우정이 남긴 여운이다. 이렇게 깊이 있게 해즐릿의 글들을 읽고, 비평하고, 그의 삶을 사려 있게 이해한 후대의 작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해즐릿에 관한 울프의 에세이는 여러 면에서 신중하고 따스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오랜 독자들은 어서 이 책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를 읽으시오. 이 가을, 울프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윌리엄 해즐릿까지도.


제 서재에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관해 첫번째로 쓴  또 한편의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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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흥미를 갖고 자주 찾는 SNS는 귀촌인, 귀농인들의 계정들이다. 시골에서의 삶은 나의 동경이다. 동경이라 함은 나에게는 아직 현실화가 어렵다는 얘기다. 은퇴 이후 시골로 내려간 이들의 피드는 비교적 평화롭다. 사계절과 밤과 낮을 그들은 말 그대로 고요히 즐기는 듯하다. 반면 경제활동의 기반을 도시에서 시골로 옮긴 청년과 중년의 피드는 ‘즐김’은 순간으로 반짝인다. 이 젊은 계정들은 자주 휴면 상태로 들어가거나, 어쩌다 올라오는 환한 사진들 아래의 글에는 한숨과 넋두리들이 묻어난다. 요점은 이렇다. 아, 힘들다!!

귀촌을 꿈꾸지만, 그 바람의 이유만큼,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찾는 우유부단한 나는 신문 기사나 SNS를 통해 접하는 귀촌, 귀농의 조건과 현실을 수집한다. 막연한 정보는 쌓여가고, 현실의 결단은 그만큼 뒤로 밀려난다. 이런 내 눈을 사로잡은 세 마디,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 망상과 낭만, 허영과 과시의 기름기를 쫙 뺀, 내가 찾던 바로 그런 책!

‘너무나 정치적인’이라는 수사와 ‘시골살이’라는 현실의 조합은 ‘너무나 현실적인’인 각성을 담은 표제가 아닌가. 저자 양미가 시골살이를 결심하게 된 동기부터 ‘정치적’이다. 경제 전 분야에서, 복잡한 방식으로 위계화 된 노동으로 ‘이윤’을 쌓는 자본주의는 ‘착취’하지 않고서는 이윤을 창출할 수 없다. 양미의 시골살이는 이런 소망으로 시작된다. “나는 나를 포함해 누구도, 어떤 존재도 착취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너무나,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다. 나는 그에게 깊이 공감한다.

그렇다면 하필 왜? 시골일까. 불안정 노동으로 작동되는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는 저항으로서의 이주, ‘지방’을 내부 식민지로서의 삼는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이주. 그의 시골살이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부품이 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수도권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가 집중되는 시스템에 일조, 편승하지 않겠다는 실천이다.

저자의 정치적인 선언과 결심. 그 이후는 어떤 모습일까. 양미는 다수가 다소 낭만적인 선망과 경제문화적인 폄하의 뉘앙스를 섞어 말하는 ‘시골’로 이주한다. 이제부터는 시골살이의 정치를 몸으로 살고 체득할 차례다. 작가 이라영은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 제 삶을 적극적으로 실험해 이 체제를 교란하는 움직임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다”라며 이 책을 추천한다. 작가 한디디는 “이 책은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는 감각을 잃지 않은 사람, 좋은 삶을 상상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며 이 책을 권한다. 좋은 삶을 상상하는 사람과 연결되고자, 나는 양미의 시골살이의 현장, 삶의 저항적 실험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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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천재들의 자본주의 워크숍 - 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스는 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가
울리케 헤르만 지음, 박종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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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케 헤르만의 글쓰기가 빼어납니다. 세 명의 경제학자들의 통찰과 이론을 바탕으로 저자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날렵하게 드러냅니다. 저자는 오래 시간 경제 현장을 취재해온 언론인답게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와 변화상을 현실적으로 드러냅니다. 자본주의 입문, 재입문 도서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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