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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 - 망해가는 세계에서 더 나은 삶을 지어내기 위하여
양미 지음 / 동녘 / 2024년 9월
평점 :
수년 동안 나는 일주일을 시골과 도시에서 나누어 보내는 생활을 했었다. 익숙한 장소였고, 도시보다 친숙한 이들이 더 많은 곳이었다.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귀촌의 의지를 가지고 있던 나는 그 몇 년 동안 내 바람의 막연함과 무모함을 체감할 수 있었다. 심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곳이었기에, 나는 그 장소에서 내가 느낀 고립감을 설명할 거리를 가지지 못했다. 이 책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를 읽고 나는 시골 체류 동안 내가 느낀 답답함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이 책을 읽고서야 막연했던 고립감의 이유를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살펴볼 있었다.
저자 양미는 시골살이의 어려움의 이유와 그 해법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그건 바로 ‘삶의 가능성’과 ‘기본권 보장’이다. 시골에서의 ‘삶’의 지속성, 그리고 그 ‘삶’을 가능하게 할 기본권을 보장해 줄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확고한 의지, 그리고 ‘삶’에 초점이 맞춰진 일관성 있고, 지속적인 정책과 지원. 이 두 가지는 저자 양미가 제안하는 시골살이의 전제 조건이다. 저자는 기본권 중에서도 기본, 최후 방어선이라 할 연결권과 주거권, 경제권, 참정권, 청구권의 측면에서 경험한 시골살이의 현실을 기록한다.
이 책의 장점은 현재 촌락 시민들의 기본권 침해 문제를 현장의 경험과 더불어 가장 최근의 통계들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가 체감하는 현실과 통계는 맞물려 시골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나를 포함한 도시민들은 시골에서 경험한 ‘불편’을 불평한다. 간혹 어떤 이들은 시골 생활의 불편 이유를 시골 거주 시민들의 낮은 사회문화적 의식, 게으름, 정치의식의 부재에서 찾기까지 한다. 하지만 저자 양미는 보여준다. 그들이 느끼는 시골의 비합리성, 불편함, 전근대성, 정체됨의 근본적인 원인이 정치의 실종, 민주주의의 부재에 있음을 말이다. (나는 주민이란 말은 현실에서 정치적 참여 주체라는 느낌이 작아 지역민들의 정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민이라고 쓰기로 했다.)
시골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각종 통계, 현재 시행중인 지방 정책과 각종 사업, 저자가 접한 행정 관료들의 모습을 보면,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는 촌락에 사람이 ‘산다.’는 사실, 그곳에 ‘삶이 있다’는 사실, 그곳에 이주해 삶을 일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시골에서의 삶은 연결이 끊겨 ‘고립’으로 이어지고, ‘경제권’이 보장되지 않아 ‘생존권’은 불안하고, 빈집은 많으나 이주할 수 있는 집의 조건은 열악해 ‘주거권’보장마저 불안정하다. 그리고 이 기본권들의 보장을 보장할 지방 행정 실무자들은 또 다른 의미의 정치로 지방 행정의 참정권과 청구권의 보장마저 막고 있다. (내가 봐온 바로도 시골 정치 현장은 지연, 학연, 혈연으로 어지럽게 얽혀있다.)이런 현실에서 그곳에서 삶을 일구고 살아온 시민들뿐만이 아니라, 귀촌인, 귀농인의 삶은 어떻게 지속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삶의 문제는 곧 정치다. 정치가 삶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 정책과 행정의 효과가 발휘된다. 그러니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곧 정치의 실종이고, 정책과 행정의 무능이다.” 175p 저자의 이 말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했던 생각 또한 이것이다. 정치가 없는 곳에 삶은 없다.
이 사회에서 경제권, 이동권, 주거권에 대해 말하면 그것들은 개인의 문제로 여겨진다. 각자도생인 것이다. 정규직, 자차(자기 소유 자동차), 자가(자기 소유 집)는 대한민국 어디서든 시민의 명패이자, 시민권과 기본권을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기본권 보장을 위해서도 자격이 필요한 현실을 보게 된다. 시골에서는 기본권 보장의 허들이 더욱 높다. 저자가 주목한 기본권의 렌즈로 살펴보니 시골이야말로 각자도생의 최전선이다. 저자의 시선이 가서 닿는 각자도생의 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위에 언급한 자격을 갖추지 못해 더 열악한 존재들이 보인다. 노인들,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와 농민들, 여성들, 청년들, 그리고 활동가들.
나는 여러 분야의 활동가들이 대한민국을 그나마 이 정도로 유지시킨다고 생각해왔다. 나를 부끄럽게 하는 존재들이 많지만, 그 중 단연 최고는 활동가분들이다. 저자는 시골에서 노동 중인 활동가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노동의 위계 속에 갇혀버리는 ‘사회적 기여 노동들’. 저자는 기여가 어떻게 정치가 될 수 있을지 묻는다. 활동가들의 현장 조사와 대안 제시, 실천은 어떻게 지역 행정과 만나고,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을까. 현장의 필요와 행정은 계속 헛바퀴가 돈다. 활동가들의 노동 역시 시골에서는 더욱 그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조사와 대안은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치와 행정은 국민보다 자기 조직의 수장이 가진 의견에 따라 움직이는 데 익숙하다. 시골에서 군수는 제왕적 권력을 행사한다. 군수의 말 한마디에 이전에는 ‘절대 불가’였던 것이 ‘꼭 해야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나는 선거철마다 국민의 권력을 ‘위임’할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견을 듣고 ‘반영’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믿는다.” 193p
저자는 저자가 거주중인 지역의 현실을 깊이 이해해고자, 지역 문제가 목격되면 지자체에 정보공개청구를 한다. 어떤 정보는 공개되고, 어떤 정보는 성의 없이 작성되고, 어떤 정보는 누락된다. 그렇게 공개된 지역 정책들과, 그 정책들을 꼼꼼하게 분석한 저자의 글들을 읽다보면 심란해짐은 어쩔 수 없다.
이 책의 최고 미덕은 현재 촌락이 안고 있는 문제를 저자가 직접 겪고, 취재하고, 부딪혀 세부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대안까지 제시한다는 점이다. 섬이 된 마을과 마을을 다시 연결하고, 버스운전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는, 무엇보다 시골 시민들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의 미래를 저자는 제시한다. 또한 시골 빈집들을 적절하게 이주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대안들, 시골의 삶에 맞춘 다양한 경제 활동의 기회 마련 등, 저자는 실행 가능한 정책들을 고민한다.
“일자리가 불안정해도, 고용이 안 되고, 집과 차가 없어도 삶이 불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시골 청년들의 이야기는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골살이의 밑그림이다.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든 삶이 불안하면 안 된다. 지방 소멸? 청년들이 무엇이든 시작할 있는 기반을, 그들이 그곳에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정적인 여건을 만들지 않는다면 지방의 미래는 밝지 않다.
지역 문제를 지역불균형발전의 프레임으로 보면, 모든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수렴되고, 그 해법 또한 경제적 지원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시골살이의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삶이다. 삶은 연결되어야 하며, 삶은 돌봄이 필요하며, 돌봄에는 장소가 필요하며, 경제권은 삶의 존엄을 위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지원금과 보조금을 아래로 주는 것으로, 위로부터 받아쓰는 것으로 지방 자치가, 시골살이가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새삼 삶이 어떤 것들로 구성되며, 어떤 변화들을 거치게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삶다운 삶이다. 그것이 전부다. 저자의 말대로 “정치가 삶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 시민 각자의 시골살이의 전망도 달라진다.
눈에 편한 초록빛 종이와 글자색에, 무엇보다 큼직한 폰트에 나는 이 책을 눈 편하게, 빨리 읽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불편하게, 생각지 못한 이유로 더 빨리 읽게 되었다. 이유는 한 가지다. 내 무지다. 시골에서 10대 말까지 보내고, 가족의 근거지가 여전히 시골인 나는 시골과 시골살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시골을 ‘알고 있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일깨웠다.
몸이 그곳을 떠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거기에 머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여전히 그 장소에 ‘속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익숙함과 친숙함 때문에 나는 그곳을 바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다. 아이러니다. 나는 동시대 주류 편향의 사회과학이, 동시대 문학이 시골을 소외시킨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내 무지를 알고 난 후, 시골을 소외시킨 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시골버스운전노동자들의 불친절에 관한 몇몇 기억이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시골 버스 운영 시스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고,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부끄러웠다. 많은 다른 부분에서도, 부끄러웠다. 이 책은 이렇게 나를 각성시켰다.
귀촌은 삶의 목적, 방식, 태도와 직결되는 선택이다. 그것도 수도권만 존재하는 현 한국사회의 정치경제 지형 속에서 더욱 그렇다. 그것도 자본주의 키드, 즉, 자본주의가 키우고, 보살핀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힙 함과 누추함, 소외와 낭만, 혐오와 선망, 폄하와 과시. 인정 넘침과 몰상식, 대형 카페와 대규모 축사, 풍요로운 초록 들판과 가난, 고급 자동차와 경운기. 외부인의 일방적인 시선과 단속적인 출입으로 시골은 복잡다단한 이미지와 이야기로 누더기 상태다.
시골에서 작은 책방을 꿈꾸든, 앙증맞은 카페를 그리든, 소박한 자영농을 희망하든, 대규모 농장을 계획하든, 한가한 한량을 열망하든 그 현실은 ‘정치적’일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얼마나 절실한 마음으로 하지만 냉정하게 쓰려고 했는지 행간마다 느껴진다. 그리고 그가 차마 못 다한 이야기까지도. 현장을 모르는, 머릿속의 이야기( 책상 위의 이념과 이론)를 쓰는 것과, 현장에서 골치 아픈 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회피하려고만 드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쓰는 이야기는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 차이를 알게 해준다. 저자의 절실함, 절박함이 전해진다.
“우리는 왜 멀리 있는 소위 ‘중앙 정치’에는 관심도 많고 참여도 하면서, 가까이 있는 지자체에서 뭘 하고 있는지, 그들이 움직이면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 225p 저자의 의문처럼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현장을 아는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 이 책에는 계속 이어진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시작은 집과 마을이라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촘촘한 민주주의는 배제되는 존재가 없도록 모든 것을 고려하는 시스템이기도 하고, 그렇게 되고자 하는 지향이기도 하다” 227p 민주주의에 관한 저자의 신념은 구체적이다. 현실 정치는 퇴행에 퇴행으로 거듭 퇴행 중이다. 저자의 신념은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집요하게 붙잡고 절대 놓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다.
귀농과 귀촌, 시골로의 이주를 꿈꾸는, 계획하는 이들에게 필독서가 생겼다. 시골살이의 지극한 현실, 통계와 공개된 행정 정보로 분석된 현실의 원인들, 실현 가능한 대안의 실마리들이 이 책에 촘촘하게 엮여 있다. 중앙과 지방의 정치인에게는 더욱 필독서이다.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당신들이 망각한, 이 사회의 거대한 사각지대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정치꾼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을 일구는 살림꾼이 되고자 한다면 민의와 참여, 반영으로 움직이는 민주주의의 생생한 아이디어를 이 책에서 얻게 될 것이다. 시민들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