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키스의 말 - 2024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배수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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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들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p22)

 

그 여자는 가장 나중에 태어난 아이, 사무원, 우체부, 부처꽃, 새 사육사, 미니멀리즘 음악가, 지팡이를 든 산책자, 풍경, 겨울바람, 사라진 늙은 여자, 의미 없는 말, 신 없는 여자, 바우키스, 그리고 보리수다.

그리고 검표원, 커다란 검은 개, 회색말, 검은 외투의 주인, 나뭇잎 모양의 눈꺼풀을 가진 아이, 자연사박물관의 경비원, 음악가, 예술 애호가, 풍경, 얼음 방울 안개, 필레몬, 그리고 보리수는 그다.

 

<><모형 비행기 수집가>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모든 것이 아니다. 나선형 계단에서 울리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언제부턴가 그 소리는 계단을 오르는 소리인지, 내려가는 소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무한한 빛으로 만들어진 뫼비우스 띠의 빛 먼지들이다.

 

오직 바람이 말하게 하라”(p19)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은 방금 누군가가 빛으로 사라진 검은 산비탈 위 언덕에 나를 홀로 세워둔다. 아니, 우리는 처음부터 거기 그렇게 서 있었으며, 언제까지 거기 그렇게 서 있을 거라고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 언덕 위에서 내가 알던 것들이 미친 듯이 죽어가고(p43)” 있는 것을 '듣는다'. “마치 축제를 벌이듯이, 바람도 없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떨어지는 낙엽처럼.”(p43) 하지만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묻지 않는다.

 

<><모형 비행기 수집가>는 작별을 영원히 마중하는 이들이다. 작별은 시작된 적이 없기 때문에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어긋난 채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진다. 언제나 듣기 원하는 것은 돌과 나무의 내부로부터”(p43) 울려오는 최소의 음악”(p43)이다. 그것은 유일한 위로의 음악이다.  

 

예를 들자면 권력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중심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방식으로 하나의 혁명이, 하나의 예술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p36)

 

언제부턴가 길을 잃기 위해 배수아를 펼쳤다. 그의 문장 속에서 길들은 사라진다. 길들이 지워진 곳에 우묵한 정원이나, 검은 숲이 펼쳐진다. 깊은 나무 그늘 속에 수많은 눈들이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 낯선 장소들과 낯선 시선들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깊은 안도의 날숨을 뱉게 한다. 이번 <바우스키의 말>을 읽으며 알았다. 길은 없다. 길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무수히 중첩되는 빛의 산란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어지러운 산란 속에 희미하게 떠도는 어휘들의 명멸.

 

나는 난간 위로 허리를 깊이 숙인 자세로 나선형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p35)



붉은 가을, 대지 위에서 썩어가는 낙엽을 본다. “이제 그녀는 영원히 이 자리에 머물 것이다. 손바닥에 피어나는 초록빛 이끼” (p53) 우리는 하나의 어휘가 해방된 자리에서 오직 바람이 전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강물 안에서 우리는 수면 위로 허리를 깊이 숙인 보리수를 바라본다. 우리는 심연이다. 심연을 가볍게 스치며 웃는, 혹은 연민하는 바우키스의 숨결을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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