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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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해즐릿의 국내 최초 에세이 번역인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의 발간 축사를 맡은 이는 버지니아 울프이다. 그렇다. 당신과 내가 경애해 마지않는, 그 버지니아 울프다. 20페이지에 달하는, 오직 윌리엄 해즐릿을 위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는 해즐릿이란 작가의 베일을 섬세하게 걷어 올린다. 처음 이 책을 받은 날 밤, 울프의 이 에세이를 먼저 읽었는데, 그 희열감이란. 에세이 한 편으로 독자를 달뜨게 하는 작가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버지니아 울프는 윌리엄 해즐릿 사후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이 에세이를 썼다고 한다. 이 한 편의 에세이를 위해 그는 해즐릿의 방대한 전작을 8개월에 걸쳐 읽었다고 한다. (울프의 일기에도 이 에세이를 쓰는 그의 마음 씀이 기록되어 있다.) 1930년의 일이다. 울프가 전하는 1830년 타계한 해즐릿의 삶과 작품들을 2024년 독자인 내가 읽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200여 년의 시차를 가뿐히 뛰어 올라 (그녀의 올랜도처럼) 해즐릿의 시대와 해즐릿이라는 사람과, 그의 문장들을 생생하게 현대의 시점으로 풀어 놓는다.

 

한 편의 에세이 안에서 세 시대를 사는 개인들이 만나 대화를 하는 셈이다. 울프는 주선자인 셈인데, 만찬 테이블 위에 만남에 장애가 될 철지난 접시들을 걷어내고, 모두(당대와 후대의 독자들)의 미각을 만족시킬 신선한 요리들을 마련해 놓는다. 보수파와 보수 언론에 의해 계획적으로 암매장된 해즐릿의 사상 세계가 사후 백년간 잊혀 졌다가 울프의 이 에세이로 조명 받아 해즐릿이 현대에는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안착했으니 울프는 놀랍도록 탁월한 안목을 가진 주선자인 셈이다.

 

 

회화와 지적인 탐구 면에서 두루 욕망과 재능을 가졌던 해즐릿은 두 갈래의 길을 오가며 애를 썼다. 결국 그가 택한 길은 사상가의 길. 그러나 해즐릿은 글속에 화가의 자취를 남긴다. 자유롭게 사유를 구상하고, 문장들을 색감으로 물들인다. “(상략) 그는 섬세한 분석의 펜을 내려놓고 물감을 가득 묻힌 붓으로 한두 구절에 눈부시고 아름다운 색을 입힌다.”라고 울프는 남겼다, 해즐릿의 문장들은 암송하고 싶도록 자주 눈부시다.

 

우리를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은 매우 놀랍다울프에게 동의한다. 해즐릿의 에세이들을 읽고 있으면 2세기 전에 쓰여 진 글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살아서 쾌활하게 약진중이다. 해즐릿의 사유와 문장이 시간에 변색되거나 마모되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과 사회의 심연에 대한 그의 사유가 근원적, 본질적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사의 이치를 납득하고 싶었던 해즐릿의 욕망과 열정을 울프는 알아본다. “그는 신랄하고 탐색적이고 예리하다.” 인간 심성과 현상들은 해즐릿의 펜촉으로 해체되고, 해부되고, 가차 없이 해독된다. 울프는 해즐릿의 글쓰기를 맷돌에 머리를 가는 것에 비유한다. 맷돌에 갈린 섬세한 사유의 알곡들은 사고의 기압과 직관의 번득임과 통찰의 순간으로 책 전반에서 빛난다.

 

유머와 위트는 생동감 넘치는 해즐릿 문장의 중심이다. 무겁고 어두운 주제라도 그는 상쾌하게 운을 띄운다. 그리곤 심각함이라는 제스처를 비웃기라도 하듯, 산보하듯 유쾌하고 가벼이 사유를 확장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통찰의 화살을 문장 밖으로 명중시킨다. 유유자적하다 힘 안들이고 허를 찌르는 그는 명사수이다.

 

이 에세이가 해즐릿에 대한 찬사로만 써졌을 거라 짐작하면 안된다. 울프는 100년 전 타계한 작가라고 봐주지 않는다. 해즐릿과 똑같이 신랄하고 가차 없다. 그런 면에서도 두 사람은 닮았다. 한없이 예민하고 명민한 사유와 부드럽고 아름다운 문장들.

 

 

해즐릿은 시인처럼 강렬하게 세상을 느꼈다.” 울프의 통찰처럼, 해즐릿의 평이한 문장에서조차 미세한 격정이 전류처럼 감지된다. 종교와 봉건의 잔재로 중세의 그림자가 여전히 암울하게 드리웠던 19세기 초 영국에서 타협 없는 급진적 개혁을 부르짖다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혔던 그의 개인사를 생각할 때, 그의 에세이들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울프의 말대로 심히 독선적이지만 인류의 권리와 자유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한 인물을 이 에세이집에서 만나게 된다.

 

울프는 쓴다. “친구들은 정부에 투항했으나 해즐릿은 평생 소수파로 남아서 자유와 동포애와 혁명의 신조를 옹호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독선이 필요했다가면 없이 가면무도회에 뛰어든 사람의 눈에 가면들의 왈츠는 얼마나 곤욕스러운 것인가. 해즐릿의 독설과 냉소는 어쩌면 그에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1세기, 지금도 요원한 인류의 권리와 자유의 보편적 보장을 19세기 초에 굽히지 않고 급진적으로 외쳤던 그가 받았을 몰이해와 박해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유머와 재치에 자주 웃게 되지만, 그만큼 글의 뒷맛이 쓰고, 자주 쓸쓸해지는 이유다.

 

그의 에세이들은 단연 해즐릿 자신이다과연 그렇다. 해즐릿은 시종일관 통렬하고, 유쾌하고, 아름답다 (울프가 인용한 그의 글들도 정말 아름답다. 이 사람 뭐지, 할 정도.) 짧은 그의 삶 후반부는 신산했다. 넘치는 재능과 열정에도 가면 없이, 살갗 없이 절벽 앞에 홀로 선 사람. 뒷모습이 쓸쓸하게 각인된 이는 내 마음속에 집을 짓는다. 해즐릿은 그렇게 나의 벗이 된다.

 

해즐릿에 관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를 읽고, 울프에게 다시 빠졌다. 해즐릿의 에세이들을 읽기 전 첫 장에 실린 울프의 에세이를 읽었을 때는 해즐릿의 글에 대한 기대와 울프의 문장들을 만난 반가움에 희열감을 느꼈다면 해즐릿의 에세이들을 읽고 난 후 다시 읽으니 다른 종류의 감동이 새겨진다. ‘그렇지, 맞아, 그래!’의 연속. 이 에세이를 위해 해즐릿을 읽고 또 읽었을 울프의 모습이 그려진다.

 

천재의 눈에만 보이는 천재의 명암이 있기라도 하듯이, 울프는 어쩌면 이렇게 해즐릿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리도 세심한 이해를 담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사랑의 행위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특전을 누리는 것이다. 즉 해즐릿이 되는 것이다

 

해즐릿의 비평 작업에 대한 울프의 문장이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 똑같은 문장을 울프에게도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이며, 즉 울프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의 행위로서 비평을 한 작가들이며, 어쩔 수 없이 자기만이 쓸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글을 쓴, 자신의 글에 자신의 인장을 남긴, 누구나 누릴 수 없는 재능을 가졌던 이들이다. 문학과 삶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통 받은 이들이다.

 

 

이 책에 실린 해즐릿에 관한 울프의 에세이를 여러 번 읽을수록 애틋하고 아름답다. 애잔함은 해즐릿이 살아낸 삶의 모습들이 남긴 상념 때문이고, 아름답다함은 실제로 만난 적 없는 해즐릿과 울프가 오로지 글로만 나눈 견고한 우정이 남긴 여운이다. 이렇게 깊이 있게 해즐릿의 글들을 읽고, 비평하고, 그의 삶을 사려 있게 이해한 후대의 작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해즐릿에 관한 울프의 에세이는 여러 면에서 신중하고 따스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오랜 독자들은 어서 이 책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를 읽으시오. 이 가을, 울프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윌리엄 해즐릿까지도.


제 서재에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관해 첫번째로 쓴  또 한편의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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