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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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해즐릿의 국내 최초 에세이 번역인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의 발간 축사를 맡은 이는 버지니아 울프이다. 그렇다. 당신과 내가 경애해 마지않는, 그 버지니아 울프다. 20페이지에 달하는, 오직 윌리엄 해즐릿을 위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는 해즐릿이란 작가의 베일을 섬세하게 걷어 올린다. 처음 이 책을 받은 날 밤, 울프의 이 에세이를 먼저 읽었는데, 그 희열감이란. 에세이 한 편으로 독자를 달뜨게 하는 작가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버지니아 울프는 윌리엄 해즐릿 사후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이 에세이를 썼다고 한다. 이 한 편의 에세이를 위해 그는 해즐릿의 방대한 전작을 8개월에 걸쳐 읽었다고 한다. (울프의 일기에도 이 에세이를 쓰는 그의 마음 씀이 기록되어 있다.) 1930년의 일이다. 울프가 전하는 1830년 타계한 해즐릿의 삶과 작품들을 2024년 독자인 내가 읽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200여 년의 시차를 가뿐히 뛰어 올라 (그녀의 올랜도처럼) 해즐릿의 시대와 해즐릿이라는 사람과, 그의 문장들을 생생하게 현대의 시점으로 풀어 놓는다.

 

한 편의 에세이 안에서 세 시대를 사는 개인들이 만나 대화를 하는 셈이다. 울프는 주선자인 셈인데, 만찬 테이블 위에 만남에 장애가 될 철지난 접시들을 걷어내고, 모두(당대와 후대의 독자들)의 미각을 만족시킬 신선한 요리들을 마련해 놓는다. 보수파와 보수 언론에 의해 계획적으로 암매장된 해즐릿의 사상 세계가 사후 백년간 잊혀 졌다가 울프의 이 에세이로 조명 받아 해즐릿이 현대에는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안착했으니 울프는 놀랍도록 탁월한 안목을 가진 주선자인 셈이다.

 

 

회화와 지적인 탐구 면에서 두루 욕망과 재능을 가졌던 해즐릿은 두 갈래의 길을 오가며 애를 썼다. 결국 그가 택한 길은 사상가의 길. 그러나 해즐릿은 글속에 화가의 자취를 남긴다. 자유롭게 사유를 구상하고, 문장들을 색감으로 물들인다. “(상략) 그는 섬세한 분석의 펜을 내려놓고 물감을 가득 묻힌 붓으로 한두 구절에 눈부시고 아름다운 색을 입힌다.”라고 울프는 남겼다, 해즐릿의 문장들은 암송하고 싶도록 자주 눈부시다.

 

우리를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은 매우 놀랍다울프에게 동의한다. 해즐릿의 에세이들을 읽고 있으면 2세기 전에 쓰여 진 글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살아서 쾌활하게 약진중이다. 해즐릿의 사유와 문장이 시간에 변색되거나 마모되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과 사회의 심연에 대한 그의 사유가 근원적, 본질적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사의 이치를 납득하고 싶었던 해즐릿의 욕망과 열정을 울프는 알아본다. “그는 신랄하고 탐색적이고 예리하다.” 인간 심성과 현상들은 해즐릿의 펜촉으로 해체되고, 해부되고, 가차 없이 해독된다. 울프는 해즐릿의 글쓰기를 맷돌에 머리를 가는 것에 비유한다. 맷돌에 갈린 섬세한 사유의 알곡들은 사고의 기압과 직관의 번득임과 통찰의 순간으로 책 전반에서 빛난다.

 

유머와 위트는 생동감 넘치는 해즐릿 문장의 중심이다. 무겁고 어두운 주제라도 그는 상쾌하게 운을 띄운다. 그리곤 심각함이라는 제스처를 비웃기라도 하듯, 산보하듯 유쾌하고 가벼이 사유를 확장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통찰의 화살을 문장 밖으로 명중시킨다. 유유자적하다 힘 안들이고 허를 찌르는 그는 명사수이다.

 

이 에세이가 해즐릿에 대한 찬사로만 써졌을 거라 짐작하면 안된다. 울프는 100년 전 타계한 작가라고 봐주지 않는다. 해즐릿과 똑같이 신랄하고 가차 없다. 그런 면에서도 두 사람은 닮았다. 한없이 예민하고 명민한 사유와 부드럽고 아름다운 문장들.

 

 

해즐릿은 시인처럼 강렬하게 세상을 느꼈다.” 울프의 통찰처럼, 해즐릿의 평이한 문장에서조차 미세한 격정이 전류처럼 감지된다. 종교와 봉건의 잔재로 중세의 그림자가 여전히 암울하게 드리웠던 19세기 초 영국에서 타협 없는 급진적 개혁을 부르짖다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혔던 그의 개인사를 생각할 때, 그의 에세이들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울프의 말대로 심히 독선적이지만 인류의 권리와 자유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한 인물을 이 에세이집에서 만나게 된다.

 

울프는 쓴다. “친구들은 정부에 투항했으나 해즐릿은 평생 소수파로 남아서 자유와 동포애와 혁명의 신조를 옹호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독선이 필요했다가면 없이 가면무도회에 뛰어든 사람의 눈에 가면들의 왈츠는 얼마나 곤욕스러운 것인가. 해즐릿의 독설과 냉소는 어쩌면 그에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1세기, 지금도 요원한 인류의 권리와 자유의 보편적 보장을 19세기 초에 굽히지 않고 급진적으로 외쳤던 그가 받았을 몰이해와 박해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유머와 재치에 자주 웃게 되지만, 그만큼 글의 뒷맛이 쓰고, 자주 쓸쓸해지는 이유다.

 

그의 에세이들은 단연 해즐릿 자신이다과연 그렇다. 해즐릿은 시종일관 통렬하고, 유쾌하고, 아름답다 (울프가 인용한 그의 글들도 정말 아름답다. 이 사람 뭐지, 할 정도.) 짧은 그의 삶 후반부는 신산했다. 넘치는 재능과 열정에도 가면 없이, 살갗 없이 절벽 앞에 홀로 선 사람. 뒷모습이 쓸쓸하게 각인된 이는 내 마음속에 집을 짓는다. 해즐릿은 그렇게 나의 벗이 된다.

 

해즐릿에 관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를 읽고, 울프에게 다시 빠졌다. 해즐릿의 에세이들을 읽기 전 첫 장에 실린 울프의 에세이를 읽었을 때는 해즐릿의 글에 대한 기대와 울프의 문장들을 만난 반가움에 희열감을 느꼈다면 해즐릿의 에세이들을 읽고 난 후 다시 읽으니 다른 종류의 감동이 새겨진다. ‘그렇지, 맞아, 그래!’의 연속. 이 에세이를 위해 해즐릿을 읽고 또 읽었을 울프의 모습이 그려진다.

 

천재의 눈에만 보이는 천재의 명암이 있기라도 하듯이, 울프는 어쩌면 이렇게 해즐릿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리도 세심한 이해를 담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사랑의 행위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특전을 누리는 것이다. 즉 해즐릿이 되는 것이다

 

해즐릿의 비평 작업에 대한 울프의 문장이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 똑같은 문장을 울프에게도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이며, 즉 울프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의 행위로서 비평을 한 작가들이며, 어쩔 수 없이 자기만이 쓸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글을 쓴, 자신의 글에 자신의 인장을 남긴, 누구나 누릴 수 없는 재능을 가졌던 이들이다. 문학과 삶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통 받은 이들이다.

 

 

이 책에 실린 해즐릿에 관한 울프의 에세이를 여러 번 읽을수록 애틋하고 아름답다. 애잔함은 해즐릿이 살아낸 삶의 모습들이 남긴 상념 때문이고, 아름답다함은 실제로 만난 적 없는 해즐릿과 울프가 오로지 글로만 나눈 견고한 우정이 남긴 여운이다. 이렇게 깊이 있게 해즐릿의 글들을 읽고, 비평하고, 그의 삶을 사려 있게 이해한 후대의 작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해즐릿에 관한 울프의 에세이는 여러 면에서 신중하고 따스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오랜 독자들은 어서 이 책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를 읽으시오. 이 가을, 울프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윌리엄 해즐릿까지도.


제 서재에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관해 첫번째로 쓴  또 한편의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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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 - 망해가는 세계에서 더 나은 삶을 지어내기 위하여
양미 지음 / 동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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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흥미를 갖고 자주 찾는 SNS는 귀촌인, 귀농인들의 계정들이다. 시골에서의 삶은 나의 동경이다. 동경이라 함은 나에게는 아직 현실화가 어렵다는 얘기다. 은퇴 이후 시골로 내려간 이들의 피드는 비교적 평화롭다. 사계절과 밤과 낮을 그들은 말 그대로 고요히 즐기는 듯하다. 반면 경제활동의 기반을 도시에서 시골로 옮긴 청년과 중년의 피드는 ‘즐김’은 순간으로 반짝인다. 이 젊은 계정들은 자주 휴면 상태로 들어가거나, 어쩌다 올라오는 환한 사진들 아래의 글에는 한숨과 넋두리들이 묻어난다. 요점은 이렇다. 아, 힘들다!!

귀촌을 꿈꾸지만, 그 바람의 이유만큼,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찾는 우유부단한 나는 신문 기사나 SNS를 통해 접하는 귀촌, 귀농의 조건과 현실을 수집한다. 막연한 정보는 쌓여가고, 현실의 결단은 그만큼 뒤로 밀려난다. 이런 내 눈을 사로잡은 세 마디,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 망상과 낭만, 허영과 과시의 기름기를 쫙 뺀, 내가 찾던 바로 그런 책!

‘너무나 정치적인’이라는 수사와 ‘시골살이’라는 현실의 조합은 ‘너무나 현실적인’인 각성을 담은 표제가 아닌가. 저자 양미가 시골살이를 결심하게 된 동기부터 ‘정치적’이다. 경제 전 분야에서, 복잡한 방식으로 위계화 된 노동으로 ‘이윤’을 쌓는 자본주의는 ‘착취’하지 않고서는 이윤을 창출할 수 없다. 양미의 시골살이는 이런 소망으로 시작된다. “나는 나를 포함해 누구도, 어떤 존재도 착취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너무나,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다. 나는 그에게 깊이 공감한다.

그렇다면 하필 왜? 시골일까. 불안정 노동으로 작동되는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는 저항으로서의 이주, ‘지방’을 내부 식민지로서의 삼는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이주. 그의 시골살이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부품이 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수도권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가 집중되는 시스템에 일조, 편승하지 않겠다는 실천이다.

저자의 정치적인 선언과 결심. 그 이후는 어떤 모습일까. 양미는 다수가 다소 낭만적인 선망과 경제문화적인 폄하의 뉘앙스를 섞어 말하는 ‘시골’로 이주한다. 이제부터는 시골살이의 정치를 몸으로 살고 체득할 차례다. 작가 이라영은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 제 삶을 적극적으로 실험해 이 체제를 교란하는 움직임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다”라며 이 책을 추천한다. 작가 한디디는 “이 책은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는 감각을 잃지 않은 사람, 좋은 삶을 상상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며 이 책을 권한다. 좋은 삶을 상상하는 사람과 연결되고자, 나는 양미의 시골살이의 현장, 삶의 저항적 실험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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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천재들의 자본주의 워크숍 - 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스는 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가
울리케 헤르만 지음, 박종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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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케 헤르만의 글쓰기가 빼어납니다. 세 명의 경제학자들의 통찰과 이론을 바탕으로 저자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날렵하게 드러냅니다. 저자는 오래 시간 경제 현장을 취재해온 언론인답게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와 변화상을 현실적으로 드러냅니다. 자본주의 입문, 재입문 도서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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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천재들의 자본주의 워크숍 - 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스는 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가
울리케 헤르만 지음, 박종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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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의 경제학, 워크숍, 두 단어에 나는 기가 죽는다. 그럼에도, 수 십 년 동안 세상사에 대한 내 분노의 강력한 알리바이였던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단어를, 언제부턴가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사용하는 나를 발견했기에, 그것들의 정의와, 관련 개념들과 파생된 의미들이 점점 흐릿해져가는 혐의를 지울 수 없기에, 나는 이 책을 감사히, 성실히 읽기로 결심했다.

 

숫자와 셈에 약한(정도가 아닌, 무능에 가까운) 나는 약간의 고난을 각오하고, 매일 읽을 페이지수를 겸허한 마음으로 (되도록 얇게) 분배했다. 그리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책장을 넘기자마자 저자 울리케 헤르만은 나를 애덤 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로 훌쩍 데려간다. 그것도 은근슬쩍 힘 안들이고. 뒷부분이 궁금해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나는 그날의 할당된 페이지를 훌쩍 넘어 책의 1/3을 훌쩍 넘겨 읽고 있다.

 

혼자 있을 때는 혼잣말을 했고, 남들과 함께 있을 때는 멍해 보였다는 증언이 밝히는 애덤 스미스의 성정(나는 이런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이런 인용이 넘친다, 이 책에는), 근대 이전의 경제학은 윤리학에 속했다는 사실(얼마나 바람직한가!), 유산 목록으로 확인되는 18세기 상류층의 생활상(버드나무 의자, 파란색 캐노피가 달린 침대, 나는 이런 디테일이 좋다) 스스로를 철학자로 여긴 애덤 스미스 (그는 지금까지 얼마나 오해받고 있는가), 18세기 영국 대학에 존재했던 기체 역학수업(기 수업이라고!), 명문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당시의 형편없던 강의 수준( 그 수준을 비꼬는 애덤 스미스의 편지를 꼭 읽어봐야 한다), 데이비드 흄과의 우정 어린 교류(그럼에도 여전히 스미스는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제임스 와트에게 작업장을 만들어준 일화, 자신의 연구에 관한 스미스의 결벽증적 태도 (이 결벽증을 증언하는 문장들은 정말 재미있다), 그의 대표작 도덕감정론이 안겨준 그랜드 투워의 기회 (이런, 영화 같은 일이) 등등, 몹시 흥미진진하다.

 

타인에게 감정이입하는 능력, 즉 공감을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 파악한 애덤 스미스의 사유는 특히 놀랍다. 레슬리 제이미슨의 공감 연습에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중 일부가 인용되어, 내가 아는 경제학자 그 애덤 스미스가 도덕 감정에 대한 글도 썼나, 하며 의아해했는데, 이 책을 통해 애덤 스미스가 경제학자 이전에 인간의 본성과 현실에 대해 매우 깊은 사유를 쌓아갔던 철학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의 출발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걸출한 경제학자들의 일대기만을 다룬 책인가? 그렇지 않다. 일대기는 시작이다. 이 책은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스의 경제학을 다룬다. 작가 울리케 헤르만은 이 천재들의 경제학이 어떻게 당대 현실에서 싹 트고, 만개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살아낸 시대상을, 그리고 그들의 중요한 일대기를 펼쳐 보인다. 작가는 그들의 경제학이 현실과 유리된 연구실의 계산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엄정한 관찰과 분석에서 나온 것임을 증명한다.

 

애덤 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의 시대상과 그의 성장사는 자연스럽게 그의 주요 경제 이론으로 이어진다. 중상주의의 모순, 부의 원천, 경제 활동의 기본 원칙, 거시 경제학, 자유 무역 등 애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이 설명된다. 저자 울리케 헤르만은 탁월한 작가이다. 논점을 잇고, 펼치고, 여물게 하는 저자의 글솜씨가 빼어나다. 언론인답게 요점을 드러내는 문장은 선명하고 날렵하다. 애덤 스미스의 독특한 성정에 자주 웃게 되지만, 책 전반에 포진된 작가의 톡 쏘는 듯한 날카로운 위트와 유머에 더 웃게 된다. 고난을 각오했건만, 재미있어서, 책을 놓지 못한다. 묵직해지기 쉬운 경제 이론을 이리도 경쾌하게, 날카롭게 풀어 낼 수 있다니, 글을 구성하고 이끌어가는 작가의 스타일과 속도가 탁월하다. 저절로 페이지가 넘어간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으로 들어갈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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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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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일에 싫증을 내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일에는 그렇지 않다표제작 <혐오의 즐거움에 대하여>를 압축한 문장이다. 해즐릿은 친밀한 존재에서조차 미운 점을 발견해내고야 마는 인간 본성의 눅눅함을 들춘다. 관용이 아닌 혐오의 방향으로 인간 본성의 관성이 작용하는 예를 그는 조밀하게 나열한다. 거미를 혐오하는 일에서부터 종교 재판, 세습 왕권을 지지하는 열정까지 혐오는 촘촘하고 힘이 세고, 뒤틀린다. 소수자를 차별하고, 부당한 권력에 암약하며 악취를 찾아 코를 킁킁대며 제 살갗을 비비는 영국의 정치계, 언론계와 대중의 모습은 해즐릿의 눈을 비껴가지 못한다.

 

 

 

그러니 해즐릿의 냉소는 절망한 자의 냉소이다. 무언가를 봐버린 이의 냉소, 목격자의 냉소, 증인의 냉소. 그러나 잊지 않기로 결심한 이의 냉소이다. 활력 과잉의 시대에, 과거는 과거일 뿐인 현재와 미래만 존재하는 시대에 역사와 과오, 실패를 되새김질하고, 곱씹는 사람은 자주, 여러 곳에서 불편한 존재가 된다. 급진주의자 해즐릿은 영국의 불편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멈칫하거나 주춤하지 않는다. 해즐릿의 비평과 펜은 직진한다.

 

 

혐오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걸 해즐릿은 간파한다. 혐오의 시작점과 목적지가 얼마나 복잡한지, 혐오의 에너지가 어떻게 개인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개인으로 반사되고 증폭되는지, 혐오의 결이 얼마나 겹겹이 세세한지 이 에세이는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에 의해 정치화된 혐오에 용기를 내어 반기를 든 이들이, 소수자로서 혐오의 대상이 된 이들이 결국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혐오하기에 이르게 되는지를 해즐릿은 자신을 사례로 쓴다. 동지들의 배신들 속에, 끝까지 신념을 지킨 이가 보수파들의 중상모략에 의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누구와 나누기 어려운 절망의 표정이며, 자조의 고백이다.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에는 철학자 해즐릿의 인생관이 녹아있다. “삶에 집착하는 것은 사회가 고도로 문명화되고 부자연스러워진 결과다상업적이고 대중화된 문화에 포획된 근현대인들은 자잘한 오락에 길들여져 안전하게 축소된 삶에 만족한다. “따분하고 생기도 매력도 없는 삶의 임대 기간을 갱신하는 것” “정물화 같은 삶은 자본주의가 깔아놓은 회로대로 움직이는 현대적 삶의 일면들이다. 삶이 지루할수록 감당해야할 죽음의 두려움이 커지는 아이러니를 해즐릿은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삶과 죽음에 관한 해즐릿의 시선은 서늘하다. 냉정한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상과 자기애는 근현대인의 불치병(치료 가능성을 나는 믿고 싶다)에 가깝다. 자타의 자존감이 자타의 비평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기괴하기 그지없다. 해즐릿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을 빨아드리는 과도한 자기애의 속성 때문에 우리 눈에는 세상을 다 합친 것보다 우리 자신이 무한히 더 중요해 보인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갈인가! “새로 정복할 대상을 찾는 하찮고 건방진 자아가 우연히 평범한 경쟁자를 만나서 일련의 감정적 요동을 거쳐 질투심에 허우적거리는 과정을 해즐릿은 특유의 해학으로 풀어놓는다. “우리는 한 사람이 동시에 둘인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타인의 악덕과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자잘하고 집요한 인간 근성을 해즐릿은 헤집는다. 정말 웃기고, 진실을 누설하고, 계속 웃기며 진실을 쏘아댄다. 궁금하시면 <질투에 관하여> 편을 읽으시면 된다.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는 인간성의 만화경, 한 장으로 조망해보는 인간 존재의 모자이크이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인간 안에 내재하는 변덕, 비겁함, 위선, 비열함, 냉담함, 아집, 고지식, 허영, 심술, 오만 등등.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의 항목은 계속 나열된다. ‘! 이런 사람 알아로 호기롭게 시작한 해즐릿과의 인성 탐방은 혹시, 이거 나?’로 수렴된다. 그만큼 해즐릿이 펼쳐 보이는 인간 군상들의 스펙트럼이 넓고 촘촘하다는 이야기이다.

 

현대 정치인들 중 가장 훌륭하지 않은 인물이 이튼스쿨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해즐릿의 에세이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의 문장이다. 동공이 커진다. 생채기를 건드린다. 우리는 24시간 저 문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뉴스들을 접하고 있다. 현실과 사물의 이치에 무지한, 그 무지함에 대해 역시 무지한 똑똑한 바보들이 현상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세계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해즐릿은 똑똑히 보았다. 해즐릿이 보았던 것을 우리 또한 보고 있다.

 

앞선 다섯 편의 에세이가 인간 본성에 관한 에세이로서 해즐릿의 언론인, 비평가로서의 통찰을 보여 준다면 마지막 <맨주먹 권투>는 재담가 해즐릿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유쾌한 에세이는 해즐릿 문장의 예리함과 깊이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들어낸다. 세상사에 관한 분방한 호기심, 지칠 줄 모르는 관찰, 그리고 집중력 있는 경청과 집요한 기록의 욕구, 이야기를 즐기는 천성. 이것들이 해즐릿 글의 원천이다. 호방한 너스레와 바늘 같은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이 에세이는 해즐릿이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 그 만큼 인간사에 애정이 깊었던 사람임을 짐작케 한다.

 

잊히지 않도록 이 이야기를 쓴다.” 그렇게 쓰인 <맨주먹 권투>는 아름다운 단편 소설 한 편을 읽은 듯 여운을 남긴다. 세기의 권투 시합에 대해 본인 말마따나 그는 청산유수로 생생하게 설명해 준다. 그가 묘사하는 장면들은 꿈결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안개비 속을 달리는 우편마차, 은빛 달과 밤의 푸른 빛, 여인숙에서의 밤샘 수다, 언덕 위의 링, “카스피 해의 두 무리 구름처럼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고고하고 영웅적인두 명의 맨주먹 권투 선수. 이야기는 또 얼마나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지. 해즐릿은 비평가, 언론인 이전에 어쩔 수 없는, 타고 난 작가이다. 아무리 선선한 냉정의 안개로 몸을 감춰도 발산되는 작가의 따스함이 이 에세이에 퍼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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