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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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얼하다. 지난해 12월 3일 이후 정확히 매일, 강타하는 뉴스들에 정신이 얼얼하다. 현대 민주 공화정의 최소한의 합의와 최후의 마지노선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참히 무너지고 있다. 이 현장들을 실시간 생중계로 장장 50여일을, 미래마저 불확실한 상태에서 지켜보고 있다. 분노와 냉정, 절망과 낙관으로 생채기 난 정신이 혼미하다.


난타당한 정신은 냉소와 환멸로 쉬이 기운다. 하지만 냉소와 환멸은 사치다. 우리에겐 퇴로가 없다. 지치지 않고, 인내하고, 계속 말하고 계속 경청해야 한다. 전면적인 전선이 드러났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전사가 되어야 한다.


예정된 듯 이런 우리에게 너무나 간곡한 전언이 도착했다. 편지 봉투에는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라는 묵직한 연대의 선언이 쓰여 있다. 발신인은 전사이자 시인, 흑인 퀴어 지식인 활동가 오드리 로드다. “내 침묵은 나를 지켜 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침묵도 당신을 지켜 주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강렬한 성찰의 언어로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에 맞서 급진적 사회 운동의 통찰과 전략을 갱신했던 전사, 오드리 로드다.


“전 지구적 페미니즘의 진정한 본질은 서로 간의 연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해제에서 옮긴이는 로드가 이미 1980년대에 미국에 만연했던 각종 혐오 정치가 초국가적으로 연결된 문제임을 인식하고, 이에 대처할 실천들을 해온 점에 주목한다. 옮긴이의 말대로 2020년대에 우리가 치르고 있는 이 전쟁들, 여성혐오, 노동혐오, 장애인 혐오, 동성애 혐오, 빈곤 혐오, 디지털 성범죄, 난민 혐오 등은 국경을 넘어 전선이 구축되었다. 그 핵심에는 극우 파시즘이 있다. 지금, 우리가 겪는 내란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극우 파시즘의 발화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로드는 혐오 정치의 전 지구적 연결에 맞서기 위해 흑인 페미니즘의 지평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했다. “로드는 미국의 흑인과 퀴어 시민은 세계 시민 사회에 책임이 있음을 역설했다.” 우리에게 너무도 절실한 성찰이다. 국경을 초월한 혐오 정치와 극우 파시즘에 저항해 싸우기 위해서 나를 포함한 시민 사회도 로드가 강조했던 사회 운동의 전지구적 지평 즉, 관점, 활동, 지식 생산이 모두 연결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어떻게 서로를 구할 것인가? 어떻게 지치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들 속을 헤매다 이 책의 옮긴이 해제를 읽었다. 해제가 조감해준 로드의 사유를 읽고, 이럴 때일수록 길고 깊은 호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복구와 재건은 생각보다 더 더디고 지리멸렬 할지도 모른다.


 “로드가 이 글에서 제시한 퀴어 비전은 우리가 노력하거나 기대한 만큼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인식한 채 꾸준히 계속 시도함으로써 미래를 만들어가는 정치다.” 목소리 내기, 경청하기, 조급해하지 않기, 혐오에 맞서다 혐오에 물들지 않기, 일상을 가꾸기. 내가 다짐할 수 있는 일이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자미>에서 이미 경험했듯 로드의 문장들에는 열정이라는 말에도 차마 담길 수 없는 힘이 넘실거린다. 그야말로 힘. 언제든 기꺼이 다시 일어나는 힘, 꿈틀거리는 생명의 힘, 유혹하고 잉태하고 살리는 성애의 힘. 나는 그 힘들의 수혈이 필요하다. 이 책이 절실한 이유다.


“이 여정을 통해 나는 내가 이전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어 내 능력을 향상시키는 열매를 얻었다.” 로드의 말처럼, 우리도 이 여정을 함께 걷는 중에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열매들을 얻으리라 믿는다. 아, 이미 여의도에서,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광화문에서 얻었고, 또 매주 얻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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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 - 여성의 몸, 자아, 욕망, 트라우마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현대의 페르세포네들을 위한 새로운 하이브리드 텍스트
멀리사 피보스 지음, 송섬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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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축적해 온 용기와 지성을 최대한 동원해 과거를 반추하여, 현재와 미래는 물론 과거마저 구원하는 저자의 치열함이 경이롭다. 좋은 작가는 이렇게 자신을 태워 어둠 속의 누군가를 밝혀주는 존재구나 새삼 느끼게 하는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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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 - 여성의 몸, 자아, 욕망, 트라우마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현대의 페르세포네들을 위한 새로운 하이브리드 텍스트
멀리사 피보스 지음, 송섬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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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역시 도덕적 의무로 만들되, 섹스에 담긴 쾌락은 범죄로 만들어라” p66

 

걸레, 암캐, 꽃뱀, 창녀, 잡년. 이 단어들을 처음 인지했을 때는 언제였을까, 이 단어들이 추적하는 레이다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마음 단속, 몸단속을 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사회가 허락하는 경계 안에서 옷을 고르고, 육체를 관리하고, 신체의 가동 범위를 좁히고, 언어를 선택하고, 가방 속 물건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소녀 시절부터이다.

 

내게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설명 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p51

 

취약함. 안타깝게도 나는 이 단어 외에 소녀 시절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하겠다. 몸의 성장과 더불어 강력한 외적 명령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아름답고 조신한 여성이라는 신화, 공사 공간을 막론하고 소녀를 죄어오는 성폭력의 가능성들, 공기처럼 만연한 미세한 성차별에 대한 선명한 자각. 이 억압의 부조리를 설명할 언어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소녀는 고통을 선택하는 게, 고통이 너를 선택하게 두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나는 이 문장 앞에 멈춰 섰다. 한때 나이기도 했던, 여전히 나이기도 한, 소녀들의 폭식과 절식, 침잠과 과잉행동, 편집증, 자해와 중독에 뒤엉킨 무수한 시간들.

 

그 애는 그저 자기가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살아남았던 거다” p57

 

이 문장들의 주인공 작가 멀리사 피보스는 십대의 그녀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던 세계와 그 혼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선택했던 자신을 만나기 위해 소녀 시절을 향해 항해를 떠난다. ? 그 고통의 일렁임이 아직도 세포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소녀를 어둠에 잠기게 했던 억압과 폭력이, 그 상흔이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근원을 찾아 떠난 피보스의 항해 기록이 이 책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에 펼쳐진다. “항해사이자 수평선인”(31)인 나는 몸의 언어로 물살을 헤치며 멀리 보이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현재라는 수평선으로 나아간다.

 

"사회가 너를 만든다. 그들은 이미 너를 잡년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p88

 

사회에는 낙인이라는 것이 있고 낙인은 혐오와 배제를 불어온다는 것을 소녀들은 몸의 변화와 함께 체득한다. 식별 가능한 젠더를 안주시킬 몸이 성장한다는 것은, 그 몸에 사회의 지문이 새겨진다는 걸 의미한다. 조각의 주체는 남성 중심 사회인지라 조각의 칼날은 소녀의 신체와 정신에 가부장적 질서를 날카롭게 새긴다. 소녀들의 육체와 정신은 깍이고, 조여지고, 조립된다. 소녀는 "거울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p69, 사회에 비춰진 나와 나의 경험, 욕망 사이에서 자기 소외가 시작된다.”p69

 

 

"망각은 과거를 지울 수 없다. 그저 다음 생까지 지고 갈 폐허를 숨길 뿐이다“p58

 

대대적인 사회문화적 수술대 위에서 소녀들은 두려움과 고통, 의문과 적응, 저항과 순응 사이에서 피 흘리고 분열한다. 소녀 시절이라는 내외과적 수술 기간 동안, 누군가는 순수한 소녀, 모범적인 소녀,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로 판명되고, 누군가는 암캐, 걸레, 꽃뱀, 잡년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 구분 사이에는 무수한 찢김과 출혈이 있고, 어느 소녀도 이 시험대 위에서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을 상처로 규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며, 그 경험이 남긴 결과를 검토하고 싶다.“ p250

 

그러나 동의한 적 없는 일방적인 숭배와 혐오의 그물 안에 포획되지 않으려 저항하며, 소녀들은 생존해왔고, 생환자로서 목소리를 내는 순간은 오고야 만다. 그러니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는 생존기이자 생환기이다. 피보스는 사회적 내러티브와 자신의 실존, 욕망 사이에서 분열되는 정동의 심연, 자신을 자기부정과 자기혐오의 늪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혼란의 진앙지, 그 어둠, 소녀 시절로 몸을 던져 헤엄쳐 들어갔다. 내 경험을 규정할 언어를 선택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여정이다.

 

돌아가자. 그 애가 아주 오래전에 남긴 자국들이 모두 보인다. 나는 물속으로 손을 뻗어 그 익숙한 형태를 어루만진다.” p375

 

소녀에서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한 작가는 소녀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둘 수 없다. 동시에 소녀가 절실히 필요하다. 생존과정에서 얻은 풍요로운 사유의 힘을 가지고 소녀를 찾아가는 작가는, 자연과 분리되기 이전의 충만한 활력으로 넘치는 소녀를 만난다. 현재의 나는 용기와 지혜라는 무기를 가지고 과거의 소녀를 구하고, 과거의 소녀는 자연의 권능과 혼돈의 힘으로 현재의 나를 구한다. 소녀였던 나와 성인이 된 나는 서로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줌으로써 계속 이어질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구원을 노래하는 서사시이다. 지금도 쓰여 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어서 쓰여 질 세대를 잇는 여성 연대의 서사시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고립되도록 길들인다. 사회 구조는 그 구조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재적이다.”p122

 

피보스는 이 책을 통해 회고록, 에세이, 인터뷰, 신화, 미디어 컨텐츠, 문학, 철학, 문화비평을 유기적으로 직조해 여성의 몸, 정체성, 욕망, 낙인과 폭력, 감정의 사회적 속성, 트라우마를 해부한다. 이 지난하고 복잡한 해부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여성의 경험과 고통을 재해석하기 위해서다. 강요된 역할과 수치심과 자기혐오는 내 몸 바깥의 표현”p150이기에 여성 경험의 사회문화적 토대를 드러내는 것은 필수적이다. 재해석된 여성의 경험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야기되는 여성의 삶을 스스로 재배치하고 재규정할 수 있는 언어와 힘을 얻는다.

 

우리 몸의 진실을 무시하면, 몸이 지닌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p301

 

이 책은 여성의 생애 과정을 관통하는 혼돈과 고통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그 작업이 이렇게 고통스럽지만 종래는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이 포기되지 않는 수행이 여성을 성찰과 해방의 장소로 인도한다는 희망을 증명한다. 이 책은 다시 쓰는 소녀 시대이며, 소녀였던 그들에게 언젠가, 언제나 다시 쓰기를 당부하는 연대의 손길이다.

 

PS. 피보스의 회고와 그가 수행한 정말 많은 여성들의 인터뷰들을 읽는 내내, 여성 대상 불법촬영, 스토킹, 딥페이크 범죄, 여성혐오가 스포츠처럼 행해지는 지금 우리의 현실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으로 자주 책을 덮고 눈을 감거나 누워야 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소녀 시대가 끝나지 않았으며,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폐허 속에 감추고 있음을 들여다봐야 했다.

 

 

(청소년용 성교육을 의미한다.^^)은 내 몸에 일어나고 있던 일이 세상에서의 내 가치를 변화시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p42 이 문장에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정말 그랬다. 여성으로서 몸의 변화, 임신 가능성을 알려주는 책이나 어른들은 있었지만, 어쩌면 이후 우리 삶을 더 쥐고 흔들 뿌리 깊은 젠더, 차별과 편견, 성폭력의 가능성들, 그것들에 대해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는지 얘기해주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내가 청소년 때 이 글을 읽었더라면 나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고 쓴 김멜라 작가의 추천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너무나 악하고 너무나 뻔뻔해서 기이하고, 고통스러운, 이 기괴한 세계를 살아가는 여성 시민들이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피보스에게 그랬듯이, 소녀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피보스와 소녀가 그랬듯이, 우리도 한때 우리 자신이었던 그 소녀들과 더 없이 매혹적인 연대를 이어가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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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노동 - 산업혁명부터 데이팅 앱까지, 데이트의 사회문화사 Philos Feminism 11
모이라 와이글 지음, 김현지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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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는 돌봄은 천연자원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결과로 여성의 노동은 계산에 반영되지 않는다.”p30

 

재생산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여성의 본성이라는 이와 같은 허구는, 여성에게 막대한 중압감을 안긴다. 그리고 많은 여성을 옥죈다.”p386

 

 

신랑(?) 밥은? 애들 요즘 시험기간 아니야? 요점은 너는 지금 네 몫의 노동을 하지 않고 밖에 나와 있다는 의미다. 남성들은 평생 들을 일 없는 질문들이다. 살림과 양육, 재생산 노동은 여성의 책임이다. 왜냐고? 정상적이고, 좋은 엄마라면 가족들을 사랑하니까.’ 정상성과 도덕, 애정의 진위까지. 삼중의 구속이 여성을 억누른다. 내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나쁜 배우자, 양육자인가. 자체 검열에 들어간다. 노동은 사회적 정상성의 기준, 그리고 감정의 정동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필로스 시리즈 신간 <사랑은 노동>사랑이라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해 보이는 감정과 사회경제적 동인으로 기획되고, 거래되는 노동이 만나는 접점들을 미국 현대사와 문화사를 통해 분석한다. 미국을 배경으로 연구가 진행됐지만, 한국의 현실도 여실하게 투영된다. 정치경제, 기술, 대중문화가 하나의 리듬으로 출렁이며 급변하는 세계이니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 지닌 현실감은 자연스럽다.

 

 

데이팅의 구조에 깊이 내재한 거래 논리는, 사랑을 남들과 경쟁해서 얻는 어떤 것으로 바라보도록 부추긴다.” p426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삶보다 더 나은 삶은 없다. - 중략 - 하지만 우리 문화는 노동과 사랑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노동도 사랑도 평가절하한다.” p17

 

하버드대 비교문학과 교수인 저자 모이라 와이글이 이 책을 쓴 동기가 읽히는 문장들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구조를 영속하기 위해 사랑과 노동을 왜곡시키고, 비틀고, 쥐어짠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결탁해 만들어내는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은 정상성이라는 명령어로 개인들을 특정 역할과 노동의 실천으로 몰아간다. 시즌별로 갱신되는 사랑의 이미지 속에서 실속을 차리는 것은 언제나 권리로 무장한 가부장들, 거대한 플랫폼들과 소비시장을 소유한 자본들이다.

 

"사랑을 수행하는 방식을 우리가 마음대로 이끌어 갈 자유가 있을 때, 노동은 골칫거리가 아니다." p428

 

모이라 와이글은 사랑과 노동의 가치를 되찾아 오기 위해 사랑의 역사, 데이트의 사회 문화사를 써내려간다. 산업 혁명기부터 데이팅 앱의 대중화까지 데이트의 변천사는 실로 역동적이다. 하지만 그 변화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지리멸렬할 정도로 일관되다. 그것은 젠더 이분법에 기초한 불평등과 차별이다. 차별과 폭력을 은폐하고, 유포하는 기술과 화법이 더욱 세련되어지고, 기만적으로 변해왔을 뿐이다.

 

 

욕망이 거래되는 장면을 포착한 속임수’, 가용자원으로서 취향을 분석한 애호’, 데이트의 대중화와 직결되는 공간으로서 ’, 욕망의 교환(훅업) 장소였던 학교’, 장기 투자로서 선호된 오래 사귀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포된 평등이 어떻게 여성에게 재갈이 됐는지 묻는 자유’, 비지니스가 된 데이트를 파헤치는 틈새 시장’, 데이트 쇼핑을 위해 소비자가 지켜야 할 소통 규약’, 임신과 출산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압력을 파고드는 계획’, 감정노동의 메뉴얼로 여성을 비인간화시키는 사회문화적 명령으로서 조언’. 모이라 와이글은 이렇게 열 개의 키워드로 데이트의 변천사 속에서 개인들이 수행한 역할, 노동을 분석한다.

 

 

이제 사람들은 연애의 비용-편익 분석을 수행하고 가벼운 성관계의 낮은 위험부담과 낮은 투자비용운운하며 스스로를 포지셔닝 해 낭만적 관계의 선택지를 최적화하려고 씨름한다.”p40

 

이 최적화 방법으로 와이글이 가져온 구체적 사례들에 끄덕이게 된다. 와이글은 상품과 서비스가 된 사랑과 노동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양태들을 분석한다. 영화, 음악, 드라마, 매거진 등 대중 문화는 자본화된 욕망을 반영한다. 저자의 분석은 탁월하다. 한 시절을 함께한 너무도 친숙한 영화, 팝송, 드라마들이 호명되고, 발가벗겨진다. 너무도 흥미롭다.

 

기후 위기, 심화되는 양극화, 구조적 장기 침체, 불안정한 노동, 사회적 불안. 와이글은 미국의 정치경제 현실의 렌즈로 욕망의 변천사를 들여다본다. 2016년 출간된 이 책에서 와이글이 묘사하는 당시 미국 노동자 계층의 현실(시간제 노동, 프리랜서, 긱 노동, 투잡과 쓰리잡)은 지금 우리 현실과 너무도 닮았다. 그런 현실에서 개인들이 사랑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또는 포기하는 모습도 또한 유사하다.

 

개인의 욕망 실현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다. 하지만 개인의 범주는 늘 문제적이다. 사회경제적 소수자들은 여전히 개인의 범주에서 자주 탈락된다. 와이글은 이렇게 기울어진 세계에서 소수자들이 어떻게 사랑이라는 노동을, 역할을 수행해왔는지도 또한 탐색한다.

 

젠더화 된 노동 분업은 여성을 정서적 과로 상태, 남성을 정서적 무능 상태로 만든다.”p146

여성은 사랑을 위해 성관계를, 남성은 성관계를 위해 사랑을 교환한다.”p410

 

이 책은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 정치경제적 구조에 의해 설계되고, 주입되는 경로를 잘 보여준다. 와이글은 감정이 자원화 되어 관리되고 거래되는 무수한 장면들에 주목한다. 이 장면들에서 여전히 여성들은 더 취약하고, 더 착취당하고, 더 기만당하고, 더 소진된다. (8장 자유, 9장 계획, 10장 조언은 한숨과 분노로 눈을 뗄 수 없다.)

 

노동의 사전적 의미는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이다. 사랑은 노동이다. 어떻게 이 문장을 부정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를 위해 밥을 짓는 것은 노동이다. 누군가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취향을 관리하고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도 노동이다. 환전 가능한 감정을 관리하는 것도 노동이다.

 

빛에 따라 다양하게 발색하는 매혹적인 핑크색 책 표지에 이끌린 나의 선택은 현명했다. 로맨틱한 핑크색을 정중앙에서 날렵하게 가르는 쟁기를 닮은 대문자 L의 존재를 인식하는데 시간이 걸린 나는 우둔했다. Love(사랑)Labor(노동)는 떼려야 땔 수 없다. 사랑이 곧 노동이며, 노동이 곧 사랑이다. L, 사랑은, 노동은 굳은 대지를 깨부순다. 악습을 깨부순다. 협소한 자아를 깨부순다. 우리는 이렇게 창조적인 사랑과 노동의 의미를 재인식할 수 있을까. 그 가치들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얼마 전 여성은 소유물이다이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중인 텍사스 주립대 남학생의 사진이 SNS에 공유됐다. 개인의 일탈이라기엔 최근 몇 년 국내외 분위기가 너무도 증후적이다. (여기에 쓰기도 어려운 최근 기사까지 생각하니 팔다리에 힘이 빠진다.) 사랑?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노동해야 할까.

 

정희진 선생은 이 책을 사랑에 대한 최고의 교과서라고 평했다. 좋은 교과서는 문장을 낭비하지 않는다. 모든 장에 대해 할 얘기가 쏟아져 나온다. 여성들에게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특히 후배나 딸에게는 이 책을 꼭 선물하라고 말하고 싶다. 여성들이 깨닫고, 재확인해야 할 여성들의 위치, 조건, 상황들을 이 책은 상세하게 탐구한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아니 절실한 분석과 통찰이이다.


(여성들이여, 더 정신 차리자. 제발 정신 똑바로 붙잡고 살자. 이 책에 관해, 와이글이 시작한 대화에 응답해, 하고 싶은 말은 넘치지만, 일단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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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노동 - 산업혁명부터 데이팅 앱까지, 데이트의 사회문화사 Philos Feminism 11
모이라 와이글 지음, 김현지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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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의 ‘정상성’이란 허울은 여성의 감정노동과 돌봄노동에 의해 작동되고 유지된다. 여성의 노동이 ‘사랑’이란 철갑의 외피를 쓰는 순간 노동으로서의 모든 쟁점과 논쟁들이 일순에 음소거 된다. 그 첫 번째 도미노 조각이 연애, 즉 사랑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수사 아래 숨겨진 교환과 거래의 원리는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자본의 기획 아래 더욱 치밀해지고 세련되어져 왔다. 유혹, 데이트, 결혼. 이 간단해 보이는 삼단 계단 사이마다 무수한 정치적 기제와 변인들이 존재해왔다. 지금도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현상의 이면에는 복잡한 사회경제적 맥락들이 작용 중이다.

가부장제를 움직이는 사랑이라는 진실, 혹은 환영, 혹은 분열이 어떻게 자본주의와 철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이 책을 통해 공부해 볼 계획이다. 아르테 출판사의 필로스 페미니즘 시리즈 전편 ‘자본의 성별’을 통해 여성의 물적 토대의 취약성을 여실히 확인했다. 이 책은 그 취약성의 근본적인 바탕, 가부장제 사회의 두터운 베일 ,사랑의 민낯과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몹시 기대된다.

(이 필로스 시리즈 중 하나인 다크룸은 내 2024년 올해의 책 중에 하나다. 정말 수전 팔루디 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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