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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평점 :
얼얼하다. 지난해 12월 3일 이후 정확히 매일, 강타하는 뉴스들에 정신이 얼얼하다. 현대 민주 공화정의 최소한의 합의와 최후의 마지노선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참히 무너지고 있다. 이 현장들을 실시간 생중계로 장장 50여일을, 미래마저 불확실한 상태에서 지켜보고 있다. 분노와 냉정, 절망과 낙관으로 생채기 난 정신이 혼미하다.
난타당한 정신은 냉소와 환멸로 쉬이 기운다. 하지만 냉소와 환멸은 사치다. 우리에겐 퇴로가 없다. 지치지 않고, 인내하고, 계속 말하고 계속 경청해야 한다. 전면적인 전선이 드러났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전사가 되어야 한다.
예정된 듯 이런 우리에게 너무나 간곡한 전언이 도착했다. 편지 봉투에는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라는 묵직한 연대의 선언이 쓰여 있다. 발신인은 전사이자 시인, 흑인 퀴어 지식인 활동가 오드리 로드다. “내 침묵은 나를 지켜 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침묵도 당신을 지켜 주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강렬한 성찰의 언어로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에 맞서 급진적 사회 운동의 통찰과 전략을 갱신했던 전사, 오드리 로드다.
“전 지구적 페미니즘의 진정한 본질은 서로 간의 연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해제에서 옮긴이는 로드가 이미 1980년대에 미국에 만연했던 각종 혐오 정치가 초국가적으로 연결된 문제임을 인식하고, 이에 대처할 실천들을 해온 점에 주목한다. 옮긴이의 말대로 2020년대에 우리가 치르고 있는 이 전쟁들, 여성혐오, 노동혐오, 장애인 혐오, 동성애 혐오, 빈곤 혐오, 디지털 성범죄, 난민 혐오 등은 국경을 넘어 전선이 구축되었다. 그 핵심에는 극우 파시즘이 있다. 지금, 우리가 겪는 내란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극우 파시즘의 발화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로드는 혐오 정치의 전 지구적 연결에 맞서기 위해 흑인 페미니즘의 지평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했다. “로드는 미국의 흑인과 퀴어 시민은 세계 시민 사회에 책임이 있음을 역설했다.” 우리에게 너무도 절실한 성찰이다. 국경을 초월한 혐오 정치와 극우 파시즘에 저항해 싸우기 위해서 나를 포함한 시민 사회도 로드가 강조했던 사회 운동의 전지구적 지평 즉, 관점, 활동, 지식 생산이 모두 연결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어떻게 서로를 구할 것인가? 어떻게 지치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들 속을 헤매다 이 책의 옮긴이 해제를 읽었다. 해제가 조감해준 로드의 사유를 읽고, 이럴 때일수록 길고 깊은 호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복구와 재건은 생각보다 더 더디고 지리멸렬 할지도 모른다.
“로드가 이 글에서 제시한 퀴어 비전은 우리가 노력하거나 기대한 만큼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인식한 채 꾸준히 계속 시도함으로써 미래를 만들어가는 정치다.” 목소리 내기, 경청하기, 조급해하지 않기, 혐오에 맞서다 혐오에 물들지 않기, 일상을 가꾸기. 내가 다짐할 수 있는 일이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자미>에서 이미 경험했듯 로드의 문장들에는 열정이라는 말에도 차마 담길 수 없는 힘이 넘실거린다. 그야말로 힘. 언제든 기꺼이 다시 일어나는 힘, 꿈틀거리는 생명의 힘, 유혹하고 잉태하고 살리는 성애의 힘. 나는 그 힘들의 수혈이 필요하다. 이 책이 절실한 이유다.
“이 여정을 통해 나는 내가 이전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어 내 능력을 향상시키는 열매를 얻었다.” 로드의 말처럼, 우리도 이 여정을 함께 걷는 중에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열매들을 얻으리라 믿는다. 아, 이미 여의도에서,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광화문에서 얻었고, 또 매주 얻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