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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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일에 싫증을 내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일에는 그렇지 않다표제작 <혐오의 즐거움에 대하여>를 압축한 문장이다. 해즐릿은 친밀한 존재에서조차 미운 점을 발견해내고야 마는 인간 본성의 눅눅함을 들춘다. 관용이 아닌 혐오의 방향으로 인간 본성의 관성이 작용하는 예를 그는 조밀하게 나열한다. 거미를 혐오하는 일에서부터 종교 재판, 세습 왕권을 지지하는 열정까지 혐오는 촘촘하고 힘이 세고, 뒤틀린다. 소수자를 차별하고, 부당한 권력에 암약하며 악취를 찾아 코를 킁킁대며 제 살갗을 비비는 영국의 정치계, 언론계와 대중의 모습은 해즐릿의 눈을 비껴가지 못한다.

 

 

 

그러니 해즐릿의 냉소는 절망한 자의 냉소이다. 무언가를 봐버린 이의 냉소, 목격자의 냉소, 증인의 냉소. 그러나 잊지 않기로 결심한 이의 냉소이다. 활력 과잉의 시대에, 과거는 과거일 뿐인 현재와 미래만 존재하는 시대에 역사와 과오, 실패를 되새김질하고, 곱씹는 사람은 자주, 여러 곳에서 불편한 존재가 된다. 급진주의자 해즐릿은 영국의 불편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멈칫하거나 주춤하지 않는다. 해즐릿의 비평과 펜은 직진한다.

 

 

혐오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걸 해즐릿은 간파한다. 혐오의 시작점과 목적지가 얼마나 복잡한지, 혐오의 에너지가 어떻게 개인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개인으로 반사되고 증폭되는지, 혐오의 결이 얼마나 겹겹이 세세한지 이 에세이는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에 의해 정치화된 혐오에 용기를 내어 반기를 든 이들이, 소수자로서 혐오의 대상이 된 이들이 결국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혐오하기에 이르게 되는지를 해즐릿은 자신을 사례로 쓴다. 동지들의 배신들 속에, 끝까지 신념을 지킨 이가 보수파들의 중상모략에 의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누구와 나누기 어려운 절망의 표정이며, 자조의 고백이다.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에는 철학자 해즐릿의 인생관이 녹아있다. “삶에 집착하는 것은 사회가 고도로 문명화되고 부자연스러워진 결과다상업적이고 대중화된 문화에 포획된 근현대인들은 자잘한 오락에 길들여져 안전하게 축소된 삶에 만족한다. “따분하고 생기도 매력도 없는 삶의 임대 기간을 갱신하는 것” “정물화 같은 삶은 자본주의가 깔아놓은 회로대로 움직이는 현대적 삶의 일면들이다. 삶이 지루할수록 감당해야할 죽음의 두려움이 커지는 아이러니를 해즐릿은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삶과 죽음에 관한 해즐릿의 시선은 서늘하다. 냉정한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상과 자기애는 근현대인의 불치병(치료 가능성을 나는 믿고 싶다)에 가깝다. 자타의 자존감이 자타의 비평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기괴하기 그지없다. 해즐릿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을 빨아드리는 과도한 자기애의 속성 때문에 우리 눈에는 세상을 다 합친 것보다 우리 자신이 무한히 더 중요해 보인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갈인가! “새로 정복할 대상을 찾는 하찮고 건방진 자아가 우연히 평범한 경쟁자를 만나서 일련의 감정적 요동을 거쳐 질투심에 허우적거리는 과정을 해즐릿은 특유의 해학으로 풀어놓는다. “우리는 한 사람이 동시에 둘인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타인의 악덕과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자잘하고 집요한 인간 근성을 해즐릿은 헤집는다. 정말 웃기고, 진실을 누설하고, 계속 웃기며 진실을 쏘아댄다. 궁금하시면 <질투에 관하여> 편을 읽으시면 된다.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는 인간성의 만화경, 한 장으로 조망해보는 인간 존재의 모자이크이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인간 안에 내재하는 변덕, 비겁함, 위선, 비열함, 냉담함, 아집, 고지식, 허영, 심술, 오만 등등.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의 항목은 계속 나열된다. ‘! 이런 사람 알아로 호기롭게 시작한 해즐릿과의 인성 탐방은 혹시, 이거 나?’로 수렴된다. 그만큼 해즐릿이 펼쳐 보이는 인간 군상들의 스펙트럼이 넓고 촘촘하다는 이야기이다.

 

현대 정치인들 중 가장 훌륭하지 않은 인물이 이튼스쿨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해즐릿의 에세이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의 문장이다. 동공이 커진다. 생채기를 건드린다. 우리는 24시간 저 문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뉴스들을 접하고 있다. 현실과 사물의 이치에 무지한, 그 무지함에 대해 역시 무지한 똑똑한 바보들이 현상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세계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해즐릿은 똑똑히 보았다. 해즐릿이 보았던 것을 우리 또한 보고 있다.

 

앞선 다섯 편의 에세이가 인간 본성에 관한 에세이로서 해즐릿의 언론인, 비평가로서의 통찰을 보여 준다면 마지막 <맨주먹 권투>는 재담가 해즐릿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유쾌한 에세이는 해즐릿 문장의 예리함과 깊이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들어낸다. 세상사에 관한 분방한 호기심, 지칠 줄 모르는 관찰, 그리고 집중력 있는 경청과 집요한 기록의 욕구, 이야기를 즐기는 천성. 이것들이 해즐릿 글의 원천이다. 호방한 너스레와 바늘 같은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이 에세이는 해즐릿이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 그 만큼 인간사에 애정이 깊었던 사람임을 짐작케 한다.

 

잊히지 않도록 이 이야기를 쓴다.” 그렇게 쓰인 <맨주먹 권투>는 아름다운 단편 소설 한 편을 읽은 듯 여운을 남긴다. 세기의 권투 시합에 대해 본인 말마따나 그는 청산유수로 생생하게 설명해 준다. 그가 묘사하는 장면들은 꿈결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안개비 속을 달리는 우편마차, 은빛 달과 밤의 푸른 빛, 여인숙에서의 밤샘 수다, 언덕 위의 링, “카스피 해의 두 무리 구름처럼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고고하고 영웅적인두 명의 맨주먹 권투 선수. 이야기는 또 얼마나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지. 해즐릿은 비평가, 언론인 이전에 어쩔 수 없는, 타고 난 작가이다. 아무리 선선한 냉정의 안개로 몸을 감춰도 발산되는 작가의 따스함이 이 에세이에 퍼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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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향기 - 진실한 존재의 철학적 탐구 실존의 분위기와 철학 : 시즌 1
한충수 지음 / 이학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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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향기> 첫 번째 에피소드는 실존의 의미를 탐구한다. “실존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삶이 전체의 중심이 된다.” 한충수 저자는 실존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 정의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의 실존 정의를 저자가 한국어로 여러 숙고와 단계를 거쳐 번역한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실존의 기분은 실존의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개념들인 기분’,‘책임의 관계성을 통해 삶의 본래성비본래성의 의미를 구별한다. 본래적인 삶이란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이고 비본래적인 삶은 기분을 끊임없이 전환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삶이다.

 

 

세 번째, 네 번째 에피소드는 비본래적 실존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비본래적 실존의 특징은 잡담호기심으로 요약된다. ‘잡담호기심에 관한 하이데거의 탐색을 검토한 후 저자는 말한다. “잡담과 호기심은 모두 뿌리 뽑힌 삶의 태도입니다. 더 나아가 잡담과 호기심은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P70) 잡담과 호기심은 비본래적 실존이 스스로 진정으로 생생한 삶을 산다는 착각에빠져 있게 한다는 것이다. (P71)

 

향기를 잃은 비본래적 실존의 증상이 잡담과 호기심이라면 그 처방은 실존의 결단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문장들을 경유해 실존의 결단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결단성을 지닌 사람은 그동안 스스로가 본래적으로 살아오지 않았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이를 온몸으로 실천하며, 자신의 실존에 무늬를 남기는 것입니다.” (P82)

 

본래적 실존이 되기 위한 실존적 결단으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하이데거는 예술, 정치, 종교, 철학을 제시한다. 한충수 저자는 그 중 예술을 통해 실존을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술은 주체에게 열림이라는 경험을 선사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단성(-출함)은 어떤 주체가 결심한 행동이 아니라 사람이 존재자 속에 갇힌 상태로부터 (탈출해) 존재의 열림을 향해 열어젖혀지는 것을의미한다.

 

 

부분을 넘어 전체로로 열리는 결단의 순간을 예술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주체를 세계 전체와 관계하는 자신의 본래적인 실존을 회복시켜주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간의 전환을 가져온다. “열림을 통해 맺어진주체들의 존재 등급들은 서로를 격상시킨다. 그것은 매혹으로 서로 가까워짐을 의미한다.

 

이어서 저자는 실존을 갉아먹는 노동의 의미를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통해 살펴본다. 책의 후반을 본격적으로 여는 에피소드는 실존의 인물이다. 그들은 바로 샤르트르와 그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로캉탱이다. 로캉탱은 샤르트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으로 그는 존재의 무의미성에 사로잡힌다. “핵심은 우연성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정의상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P117)

 

 

어찌해 볼 수 없어 보이는 무상함에 빠진 로캉탱을 움직인 것은 에델 워터스(Ethel Waters)<Some of These Days>이다. 한충수 저자는 음악이라는 예술이 주는 영감을 통해 허무에서 실존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하이데거의 앞선 철학 개념들, 즉 실존의 의미, 실존의 잡담과 호기심, 실전의 결단과 회복으로 재해석해낸다. “순수한 존재는 쓸데없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삶,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삶입니다. 그에 반해 단순한 삶은 어떤 의미도, 이유도, 근거도 없는 삶입니다.” (P122)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실존의 사랑이다. 실다운 존재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불운과 불행마저 자기 삶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니체의 운명애(amor fati)”를 영화 <컨택트>를 통해 읽어낸다. 키르케고르의 짧은 일기를 통해 저자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 사랑하는,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숙고한다. “삶을 앞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삶을 아주 조건 없이긍정합니다. - 중략 - 순방향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삶을 뒤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아름답고 유의미하기 때문입니다.” (P150) 역시 키르케고르의 문장을 통해 초월적 사랑을 이야기한 야스퍼스의 철학으로 실존의 사랑은 마무리된다. “여인은 나이가 들면서 더 아름다워집니다. 하지만 그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만 그 아름다움을 봅니다.” 잘 여문 존재의 사랑은 타자를 깊게 바라보는것이다. 타자의 발견이야말로 실존의 사랑이다.

 

마지막 장은 자연스럽게 실존의 책임이다. “우리는 사람이 스스로를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자기 한 사람만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책임지는 것을 뜻합니다.” 샤르트르의 문장이다. 저자는 코로나19와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 문장의 의미를 곱씹는다. 저자는 실존의 대전제인 자유선택’, 그리고 책임의 문제를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사유할 단서들을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찾는다.

 

 

연일 폭염이다. 기후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실존의 향기를 통해 저자와 함께 실존 철학의 제 문제들을 살펴봤다. 저자가 실존의 책임이란 주제로 이 책을 마무리 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다. 저자의 정의대로 잘 여문, 참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이 선행 되어야겠다. 샤르트르는 주체가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모든 사람을 지목했지만, 우리는 이제 그 지목의 한계 또한 자각하게 됐다. 인간만을 위한 기술과 윤리의 결과를 타존재들의 비명 속에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인간이 실한 존재”, “참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책임에 방점에 찍혀야 하고, 그 책임의 대상은 인간을 넘어서야 한다. 저자가 시대의 양심에 빗대어 설명한 하이데거의 타인의 양심의 외연을 고민해봐야 할 때이다. 저자가 강조한 실존의 결단과 회복은 열림을 통한 외부 세계와 타자와의 연결로 이어진다. 실존의 본래적 삶은 타자들과의 촘촘한 연결을 통해 가능해지고 충만해진다.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이며, ‘존재하며 ( or 존재해야하며), '어떻게존재해야 하는가. 내내 놓지 못하는 질문들이다. 실존 철학은 여러 실존 철학자들의 탁월한 통찰과 철학서, 문학 작품을 통해 이 질문들을 정교하게 다듬어 왔다. 이 책은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다양한 예술 작품과 저자의 체험을 넘나들며 사유한다. 저자가 해결해소를 구별한 이야기에서처럼, 우리는 인간 존재에 대한, 삶의 목적, 의미에 대한 기존의 질문들 자체를 재고 해봐야 한다. 이제는 그럴 때라고, 기온이, 체온이 말한다. 이 책은 그 의심의 단초를 열어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실존이란 현재 어떤 냄새를 내뿜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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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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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해즐릿.아티초크 출판사 덕분에 또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네요. 위에 인용된 본문들만 봐도 속이 쏴악 내려가는 것처럼 시원합니다. 인강성에 대한 관찰이 신랄하고 통렬합니다. 문장의 타협없음과 힘,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향해 정확히 명중하는 전달력도 대단합니다.작가도 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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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의 일기 : 영원한 여름편 - 일상을 관찰하며 단단한 삶을 꾸려가는 법 소로의 일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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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는 날씨의 친구다. 그는 365일 날씨의 안색, 소리, 감촉에 주의를 기울인다. 날씨가 뿌리고, 키우고, 거둬들이는 동식물에도 살뜰히 관심을 나눈다. 1855년 1월 26일 일기에는 각별하게도 1월의 날씨들이 날짜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하루도 같지 않은 빛의 색채, 바람의 방향, 그늘의 음영, 대기의 습도와 향기, 촉감으로 매일 매일 날씨의 안부를 묻는다. 소로는 날씨 그리고 날씨의 아이들과 진심어린 우정을 나눈다.

소로는 뛰어난 화가다. 그의 붓은 펜이다. 펜 끝으로 드로잉하고, 채색한다. 눈보라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말 한 쌍, 눈 속에서 몸 전체로 발자국을 남기며 지나가는 스컹크, 맑은 겨울날 희디흰 눈밭에 드리운 파란 그림자, 한 해의 첫 무지개, 해동기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새의 발자국들. 그의 펜은 그가 보고, 들은 것들의 생명을 고요히 안으로 품어 간직한다. 그리고 이렇게 나누어 준다.

소로는 사색가다. 물질적인 풍요가 가져가버린 축복과 가져온 재앙에 대해 그는 고민한다. 기쁨이 되어야 할 노동이 과도해지면서 사람들이 자극에 탐닉하는 것을 우려한다. 그는 “삶을 만들고 살찌우는 것은 혼자만의 자잘한 탐험”임을 잊지 않는다. “자기 천성에 따라 주어진 수백 가지 작은 일을 의도적으로 충실히” 할 때 삶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소로는 안다. 소로는 이 세계가 인간만이 아니라 거북알을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명상한다.

소로는 산문가다. 진솔함은 산문가의 중요한 덕목이다. 그는 ‘삶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글쓰기를 우려하고 ‘어떻게 삶을 실제적으로 영웅으로 살았는지’가 중요하다고 쓴다. 그런 이유로 위대한 시인들의 실제 삶을 그는 궁금해 한다. “강연자가 듣는 이의 반응에 맞춰 말을 한다면 그것은 곧 그들에게 알랑거리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당신인 것처럼 말해주길 바란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8) 삶과 글쓰기 사이의 평화는 소로가 가꿔가는 일상의 소임이었다.

소로는 삶의 장인이다. “나는 삶의 열매를 남김없이 따려고 가장 정직한 삶의 기술을 차례차례 실험해 보고 싶었고 또 실제로 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직한 삶의 기술이라 하더라도 절제하지 않는다면, 즉 필요한 양 이상으로 곡식을 거둬들이기 위해 땀을 흘린다면 아주 많은 양의 밀을 추수하더라도 적은 양의 왕겨를 추수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충만한 삶을 위해 멈추기의 지혜를 익히는 것, 이것이 삶의 기술임을 소로는 명심한다.

소로는 매일매일 해가 뜨고 지는 광경을 보는 것이 삶의 묘약이라고 말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비인간 존재들과 거대한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자명함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몰과 일출은 일깨운다. 햇살을, 대기를, 물을, 바람을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과 매순간 함께 호흡하고 나눈다. 이 진실을 기억하며 일분일초를 사는 것 이상의 삶의 축복이 있을까. 소로가 발견한 이 명약은 오만과 폭력성, 나약함, 자기연민이라는 인간종의 고질적인 질병에 특효이다.

이번에 출간된 소로의 일기는 ‘영원한 여름’이라는 소제목으로 묶였다. “한 겨울 등허리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발”은 소로에게 겨울 속 영원한 여름을 일깨우는 정령이다. 까마귀의 울음소리, 수탉의 홰치는 소리,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에서도 소로는 여름의 약동하는 생기를 감지한다. 소로는 봄 속의 가을, 여름 속의 겨울, 가을 속의 봄을, 각각의 사계절 속에 모든 사계절이 씨앗처럼 깊이 박혀 있음을 안다. 한 계절 속에 모든 계절이 고갱이로 살아 있듯, 우리의 현재 속에 우리의 모든 시간이 알알이 녹아 있음을 그는 안다. 아름다운 섭리이고, 아름다운 자각이다.

이 간명한 진리 속에 내 삶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단순한 삶이 필요하다고 소로의 일기는 말한다. 이 일기들은 소로가 매일의 삶 속에서 얼마나 세심하게 자연을 바라봤는지 전한다. 자연을 향한 깊은 응시가 그의 사유와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또한 이야기한다. 지구 안의 다른 존재들과 공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연스러운 삶을 일구기 위해서, 관성이 된 복잡한 사고 패턴과 습관을 간소하게 꾸려야 한다. 소로의 일기는 이 다짐을 마음에 새긴다. 이 책의 페이지마다 그 날의 산책로가 고요히 나를 기다린다. 그 길 위에는 “태고의 착실함”을 간직한 깃털의 새들과 “시큼하고 쌉싸래한” 야생 사과, 그리고 빛으로 가득한 잔잔한 호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찬찬히 눈에 담는 동행인, 소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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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204호 - 2024.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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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창작과 비평 여름 204호는 한국 시 특집이다오연경 평론가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약진 중인 젊은 여성 시인들을 소개한다. 노동 현실, 교차하는 정체성, 변태하고 확장하는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 저항과 투쟁의 동력인 유머. 오연경 평론가는 이 네 가지 이슈를 최세라, 주민현, 한여진, 임유영 시인들의 시에서 읽어낸다.


‘헤드셋의 검은 쿠션 사이에 끼어서 존재 할 때’로 시작하는 최세라의 ‘콜센터 유감:뮤트’는 상품과 정보의 교환이라는 공식만이 앙상하게 남은 소비 사회에서 감정 노동이라는 옵션을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하는 여성 비정규직 서비스 노동자의 현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주민현의 시 ‘에리카라는 이름의 나라’에서 오연경 평론가는 여러 정체성이 복합된 이국으로서의 여성 존재를 발견한다. ‘내가 포착한 에리카와 그 포착을 빠져나가는 에리카 사이’라는 구절은 폭력적인 외부 규정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여성의 자유가 느껴진다. 


‘나는 솥의 자랑일 것이다’로 호기롭게 마무리되는 한여진의 ‘솥’에서 오연경 평론가는 대문자 여성 너머, 무수한 여성들의 가능성이 펼쳐 보일 ‘폭과 깊이’를 가늠한다. 임유영의 시 ‘오믈렛’에 대해 오연경 평론가는 ‘몸속 깊은 곳에서 꺼낸 상처에 관한 농담‘이라고 말한다. ‘설탕을 잽싸게 뿌려 넣는 어떤 사람의 손’과 ‘묶인, 찔린, 찐긴. 손.’은 같은 손이다. 이 두 손의 이미지가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각성은 블랙 유머의 쓴 맛이다.


오연경 평론가는 리부트 이후 젊은 여성 시인들의 시에서 ‘파편화되거나 분절된 언어 또는 환상성의 언어’로 시도되는 독특한 모험들을 감지한다. 나는 이 모험들이 여성의 경험을 배신하고 기만하는 언어들을 폭로하고, 그것들의 저열한 민낯들을 광장에 매달 언어들을 수확해내리라 기대한다. 놀이이자 축제의 언어들, 처음부터 철지난 줄 몰랐던, 제 철이 없었던 언어들을 각성시켜 추방할 여성 시인들만의 만남은 언제나 신난다. 그런 면에서 오연경 평론가의 이번 글은 지면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슈의 발견과 시인들의 소개 면에서 모두 값지다. 젊은 여성 시인들의 시들이 여러 매체에서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메타 비평글인 되찾은 의 시간에서 송종원 평론가는 최근 한국시 비평이 시의 공공영역(커먼즈)을 적극적으로 독해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그는 요즘 비평담론은 작품의 진실에 접근하는 매개로서가 아니라 작품을 새롭게 소비하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이끄는 면이 있다고 최근 비평들을 진단한다. 그에게 소비로서의 시 비평은 사회적 맥락과 역사성을 소거한 해석들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독법의 대척점에 서는 비평으로서 시의 역사성 위에서 시 자체가 거대한 협동작업임을 이수명과 박노해의 시 겹쳐 읽기를 통해 보여준다.

시인들이 서로의 꿈과 기록으로 현실의 모습과 의미를 한층 선명하고 두텁게 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듯이 비평 역시 민주적 대화의 공간을 열어 협업해야 한다고 송종원 평론가는 단언한다. 비평의 협업은 축적된 작품들의 관계 맺음을 통해 시간을 품는 문학사를 쓰는 동시에 서로가 꾸었던 꿈을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실천적 장을 마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부여되었던 과도한 특권을 반성하는 것과 인간의 자리를 지워버리는 일은 당연히 다른데도 종종 혼동된다.’ 송종원 평론가는 시 비평이 기다리는인간의 자리를 상징했던 의 자리를 망각하지 말기를 주문한다. 시의 공공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설명할 책임이 여전히 비평가들에게 있음을 그는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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