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203호 - 2024.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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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2024년 봄 203호는 ‘세계서사,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화두로 시작된다. 기후 변화, 전쟁들, 양극화, 우익화와 반지성주의가 휩쓸고 있는 세계사의 위기 속에서 한국은 현재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특집으로 구성된 ‘세계서사, 어떻게 쓸 것인가’는 서동진 교수, 박노자 교수, 이일영 교수, 이혜정 교수가 글을 보탰다.

서동진 교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개인의 경험과 자본주의의 총체성을 연결하는 대안적 상징 서사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의 글로벌 담론의 변화 과정을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별할 수 있도록 서구 중심주의와 주체적 담론의 저항적 움직임으로 큰 맥을 잡아 살펴본다. 이일영 교수는 우리 경제의 현 상황을 세계 경제라는 복잡한 맥락 안에서 분석, 예측하는 ‘한반도 경제’라는 총체적 인식의 틀로 현재의 한국 경제를 읽어낸다. 끝으로 이혜정 교수는 “패권 불가능/부재의 궐위 시대”를 맞아 여러 위기들이 착종되어 나타나는 국제 정세의 지형을 미국의 정세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창비 2024년 봄호에서 눈에 띄는 소설은 전춘화의 ‘여기는 서울’이다. 작가 전춘화는 87년생으로 길림성 화룡시 출신으로 2023년 소설집 ‘야버즈’로 국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에 실린 단편은 20대 조선족 여성이 서울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다. 화자는 제도권 교육의 경험 차이, 역사에 대한 상이한 이해와 해석, 자본주의의 적나라함을 경험하면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아를 이해해 보고 싶은 갈증”과 “사춘기 때보다 더 결렬한 혼란”을 겪는다. 우리 사회의 뚜렷한 구성원이지만 그 내밀한 이야기를 듣기 어려운 주체의 목소리이다.

‘이토록 문제적인 인간’이란 타이틀로 황정아 문학 평론가는 켄 리우의 포스트 휴먼 소설들을 들여다본다. 켄 리우의 소설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포스트 휴먼 되기의 기만성과 폭력성에 대해 질문한다. 그의 소설 속에서 “알고리즘으로 환원되지 않는 단독성의 성취”라는 과제를 황정아 문학 평론가는 발견한다. 단독성의 성취는 “가상화 되지 않은 물질 세계”를 돌보는 일로 이어짐을 평론가는 강조한다. 포스트 휴먼 소설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물음으로써, 인간 ‘되기’에 대한 질문에 답하도록 한다.

작가 조명 코너에서는 작년 ‘니들의 시간’을 출간한 김해자 시인의 육성을 듣는다. 화석처럼 굳지 않기 웃는 ‘생존형 웃음’들을 알아보는 시인에게 ‘희망’이란 발굴해내려 노력해야 하는 투쟁이다. 시인은 비극과 참극 속에 울고 있는 사람에게 ‘내 탓이 아니다’라고 말해 줄 있는 반대의 거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구부려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중) 382 시의 귀는 심장 가까이 있어야만 한다는 시인의 목소리는 백로 그림자, 코딱지풀 같이 고요하고 낮은 곳을 향한다.

4.16재단 상임이사 백래군 선생은 4.16운동 10년을 되돌아본다. 10년은 네 시기로 나뉜다. 모든 시민이 참담함과 애도 속에 참사에 주목했던 참사 직후 시기인 첫 번째 기간, 두 번째 시기는 “시민의 힘으로 부정한 권력을 끌어내린 승리의 시간이다.” 세 번째는 진상 규명에 소극적이었던 문재인 정부, 마지막은 윤석렬 정부다. “기소된 관련자들은 무죄로 석방되거나 대통령 사면으로 풀려났다. 생명안전공원 건립은 지연되고 있고, 4.16 재단에 대한 예산 지원은 삭감되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회적 참사인 10.29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사회적 참사를 해결하는 정부의 태도는 더욱 퇴행했다.

박래군 선생은 4.16운동이 이전의 사회적 참사 이후의 운동들과 구별되는 사회적 운동의 이정표로서 갖는 의미들을 발견한다. 먼저, 유가족들이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 이 운동의 우선순위가 보상이 아닌, 진상 규명-책임자 처벌이었다는 것, 또한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워 수많은 기록물들을 축적했다는 점, 더 나아가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은 다른 재난 참사 피해자들과 모여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구성했다는 점 등이 이를 증명한다. 끝으로 기후 위기와 결합된 재난들이 예정된 시대에 생명 존중과 안전 사회를 공공의 의제로 만들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후진적인 정치, “재난 참사를 지우려고만 하는 국가와는 결별”해야만 한다고 박래군 선생은 말한다. 희생자들에게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줄 책임이 시민들에게 있다.

“장터가 아름다워서인지 여느 장과는 다르게 대맹장은 왠지 고즈넉하다. 흔한 호객 소리, 흥정하는 소리, 엿장수의 트로트 메들리.... 같은 소리가 없다. 조용히 팔고 조용히 산다. 다만 장터의 하늘을 뒤덮은 고목 나무 속에서 새가 울고 매미가 울고 가을에 낙엽이 우수수 쏟아지면 어물 장수는 낙엽이 묻은 생선을 팔고, 옷장수는 낙엽이 내려앉은 옷을 팔고 채소장수는 낙엽과 함께 채소를 판다.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엄나무, 말채나무, 벚나무 이파리들이 1648년의 이파리가, 1717의 이파리가, 1854년의 이파리가 2024년의 생선과 함께, 옷과 함께, 채소와 함께 장바구니에 담겨 온다” 404

이번 203호에 실린 공선옥 작가의 산문 ‘담양산보’의 일부분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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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너머 자유 - 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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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너머 자유 / 김영란

극과 극, 강대 강, 안면몰수와 몰염치. 아침마다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파죽지세의 전장을 인터넷 작은 창으로 접한다. 우리 정치의 현장이다. 정치적 언어들은 자극성과 노골성을 매일 갱신한다. 정치 세력들이 쏟아내는 반지성적인 언어들은 시민들에게 다그친다. 당신은 어느 줄에 서겠습니까. 그럴수록 중간 지대는 좁아진다. 정치 세력의 언어는 시민의 일상에 침윤한다. 모 아니면 도, 제로섬 게임의 언설은 시민들의 사고와 언어까지 오염시켰다.

분열의 시대다. 김영란 선생이 최근 펴낸 이 책 ‘판결 너머 자유’의 프롤로그에 인용된 이청준의 ‘전짓불 앞의 공포’는 여전히 여기의 현실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국면들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판결 너머 자유’는 시민들의 공존과 상생을 위한 최소한의 합의를 찾을 수 있는 해법에 대한 고민으로 출발한다.

김영란 선생은 극단의 사회 분열을 막는 해법의 실마리를 롤스의 정의론에서 찾는다. 서로 다른 가치관, 신념체계, 정치관을 가졌더라도 바람직한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의견 일치의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롤수의 정의론은 시작된다. 이렇게 복잡하게 분화된 사회에서 시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합의 영역이 남아 있을까? 단순하지 않은 문제이기에 이런 질문은 당연하다. 롤스도 그 복잡성을 이미 깊이 파악했다. 그만큼 롤스의 정의론은 고도로 심화된 가정과 예측, 전제들을 통과한 정치 이론이다.

다양한 신념체계와 이해관계를 장착한 이슈들을 공공의 정의 실현을 위해 어느 선에서 어떻게 조정해야 할까. 롤스의 정의론에서 제시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에 이르게 위한 대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롤스가 그의 사유의 기본 전제들로 정의한 몇 가지의 개념들을 숙지해야 한다. 공적 이성, 포괄적 신념체계, 정치적 정의관, 원초적 계약, 무지의 베일, 중첩적 합의 등이 그것이다. 이 개념들은 개인이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어떤 사고 과정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지 자각하게 된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앞으로 시민 개인으로서 공적인 판단을 할 때 무엇을 염두해 두어야 하는지 길잡이가 되어 준다.

이 책 전체를 포괄하는 가치는 공적 이성과 중첩적 합의이다. 롤스에 의하면 공적 이성이란 “민주주의 한 시민으로서, 합당하게 받아들일 만한 혹은 이성적인 추론 과정을 의미한다.”(55) 중첩적 합의란 “기본적 가치관이나 세계관, 진리에 대한 신념 등이 다르더라도 바람직한 사회적 질서에 대하여 대체로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일단 그 중첩된 부분에 한해 성립시키는 합의를 말한다.(49)

김영란 선생은 우리나라 대법원 전원일치 판례들을 위에서 언급한 롤스의 핵심적 전략들로 분석한다. 이 작업은 공적 이성의 표본으로서 우리 대법원의 현주소와 역할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공적 이성을 대표하는 대법원 판사들은 대립한 신념이 첨예하게 경합하는 사건에서 법의 적용을 두고 다양한 입장을 가진다. 각각의 판결에 따라 판사들은 수동적인 현행 법의 적용자로 머무는가 하면, 바람직한 사회상을 위해 능동적으로 법을 해석하고, 법을 발견해낸다.

공적 이성의 얼굴로서 우리 대법원이 현재 어떤 모색들을 하고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각각의 판례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우리 사회가 실로 복잡한 가치와 이해가 경합하는 사회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준다. 그런 만큼 판결에 의해 사회적 쟁점들을 가시화하고, 그 쟁점들에 대한 숙의를 통해 헌법과 정의라는 가치를 갱신시키는 대법원 역할의 막중함을 생각하게 한다.

나와 가치관이 대척점에 있는 정치적 이슈를 접했을 때, 그 이슈가 사회가 분열로 치달을 때, 시민 개개인은 최소한의 합의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을까. 또 그 최소한의 합의를 평가할 어떤 준거 기준을 가지고 있을까?

롤스의 정의론에서 제시된 개념들,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를 위해 이 책에서 소개한 그의 정치 판단 과정은 대법원 판사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민들 먼저 공공의 분열을 최소화하기 위해, 합의의 기준들을 가져야 한다. 공적 이성과 중첩적 합의는 시민들의 정치 판단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정치적 이슈의 판단에 앞서 고려해야 할 기준들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총선이 다가온다. 어떤 후보가 분열을 방편으로 표를 얻고, 권력을 쟁취하여, 사회를 더 큰 혼란으로 이끌지, 또 다른 어떤 후보가 사회의 공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정의의 개념을 공공의 관점에서 확대시킬지 유권자들은 눈을 밝혀 분별해내야 한다. 이 책에서 소개된 롤스의 정의론과 대법원 판단 과정이 보여준 정치적 사고는 후보를 선택하는데 유용한 정치적 판단의 도구가 된다. 총선 전 필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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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성별 - 가족은 어떻게 불평등을 재생산하는가 Philos Feminism 7
셀린 베시에르.시빌 골라크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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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필독서. 여성의 빈곤화가 어떻게 가족 내에서부터 시작되어 심화되는지 방대한 통계와 분석으로 보여준다. 여남 간 부의 불평등의 조건에 대해 여성들은 얼마나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을까? 자본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고, 가족 내에서 자본의 성별화는 시작되고 착실하게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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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성별 - 가족은 어떻게 불평등을 재생산하는가 Philos Feminism 7
셀린 베시에르.시빌 골라크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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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내 불평등은 가족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거의 도전받지 않으며 이를 뒤집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 27

 

들어가는 말부터 흥미롭다. 대륙 간, 국가 간, 계급 간, 인종 간 경제 구조에 대한 연구는 익숙한 데, 정작 가족 내 경제구조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각 장의 메인 타이틀은 물론, 각 장을 이루는 작은 타이틀만 읽어봐도 정신이 확 든다. 박완서 선생이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라고 일갈한 것이 1989.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란 신화는 이런 구체적인 연구와 통계로 해체된다. 결혼을 한 후 한쪽 눈을 감으라. 이런 아름다운 격언의 출처는 어디였더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여성들은 읽어봐야 할 것 같다.

 

21세기 계급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의 노동시간의 합계일까? 임금일까? 학력자본일까? 저자들은 21세기 계급 형성의 중심에 가족 재생산 전략이 있음에 주목한다. 위에 인용한 문장처럼 가족 관계와 성별 불평등이 현대의 사회 계층을 이해하는 키워드라는 것이다.

 

경제 자본의 성별은 단호하게 남성이라 말할 수 있다” 306

 

자본의 성별은 남성이다라고 저자들은 단언한다. 그리고 자본의 성별 불평등의 출발점은 가족 내라고 진단한다. 가족 내에서 이미 여남의 자본 불평등이 일어나는 중요한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가족 안에서 형성되는 일과 보상에 대한 여남의 상이한 가치관, 가족법, 재산법에 대한 지식과 접근성의 차이 , 소유 자산을 처분 할 권리에 있어서의 여남 불평등, 계층과 성별에 따라 법률 전문가들이 보이는 차별적인 사무처리 과정 등이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더 세부적인 조건들이 가족 내 여성들의 경제적 입지를 악화시킨다. 특히 사법의 개입이 불평등을 해결해주기보다 여남 간 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비가시화하는 것은 문제적이다.

 

이 책은 가정 내 여성의 경제적 입지를 확인시켜주는 세세하고 방대한 통계와 분석들로 가득하다. 뒤로 갈수록 예상하지 못했던 분야의 통계와 연구 분석들에 더욱 놀라게 된다. 여성들의 가족 내에 경제적 지위를 확인시켜 주는 다양한 조건들이 촘촘하게 제시된다.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여남의 경제적 불평등을 결정짓는 요인들에 이렇게 무지할 수 있었다니, 무지에 놀라며 읽게 된다. (뒤로 갈수록 더 놀라게 된다.) 가족의 부의 분배 관한 내 무지가 내 개인적 무지인지, 여성 일반의 무지인지도 궁금해진다. 가족 내 남성들은 가족 내 여성들보다 가족 자산에 대해 훨씬 많은 관심과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것도 어린 시절부터. 여성들은 왜 가족의 자산에 관해 남성들보다 무지하도록 길들여져 왔을까.

 

출신 지역, 학력, 결혼 유무, 가업, 직업, 남편의 직업과 수입 등등. 이런 조건들이 여성들 전 생애사에 화학 작용을 일으켜 어떻게 가정 내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서게 되는지 자료들은 잘 보여준다. 프랑스의 현실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책은 프랑스의 가족 내 자산 분배를 놓고 논지를 전개한다. 따라서 제시된 수많은 통계 자료와 연구 자료들은 프랑스 가족을 대상으로 나온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국내 현실과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는다. 집안 내 아내와 딸들의 위치, 그들의 모호한 정서적 의무! 법률 전문가들의 성차별적인 일처리! 이 책의 저자들과 같이 열정을 가진 연구자들이 국내가족 내 부의 분배 현황을 연구한다면 어떤 결과물들이 나올까, 궁금하다.

 

가족 내 부의 불평등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들은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많았다. 불평등을 야기하는 합법적, 비합법적 방법들의 정교함과 은폐술의 역사는 길다. 여성들이 체감하는 불평등과 차별이 공기와 같아서, 일상적으로 어느 정도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정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친밀함으로 덮여있는 불평등에는 여성들이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 이 책 속의 많은 여성들처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때에, 재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을까.

 

가족의 내력, 정서, 그리고 가족 내 여성의 위치 때문에 여성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가족 내 부의 불평등 현실을 이 책은 조목조목 드러낸다. 여성들은 가족 내에서 여러 면에서 복합적인 취약성을 가진다. 때문에 그들 삶의 가장 결정적인 조건, 자본의 현황, 움직임, 미래 변화 예측에 정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최소한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일단, 여성들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즉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알려준다. 가족 내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고, 분배되는지, 그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이 각각 어떤 권리를 차별적으로 갖게 되는지 알려준다.

 

저자들은 성별 질서를 뒤집지 않고서는 계급 사회를 폐지할 수 없다고 말하다. 이유는 분명하다. 가족 내 여남 간 부의 불평등한 재생산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부가 보존되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남성은 부유하게, 여성은 빈곤하게 되는 현실 가족 내 부의 재생산이 계급을 재생산하는 큰 요인이라는 말이다. 가부장제와 계급 재생산이 연동되어 계승된다는 사실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저자들의 결론처럼 계급 재생산의 사다리를 걷어차기 위해서, 무엇보다 여성들의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가족 내 자본의 불평등을 우선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경제적 불평등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소득 뿐 아니라 자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21


최근 통계 자료에 의하면 프랑스 내에서 여남 간 부의 격차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 격차는 19989%였다가 201516%로 늘어났다. 22



우리의 연구는 교차적인 관점에서, 복수의 지배관계를 위계화하지 않음으로써 살펴보고자 한다. 26

가족 내 경제구조를 탐구하면서, 우리는 다양한 불평등의 역동이 분리 불가능한 구체적 장소를 연구한다.26

 

 

노동 시장에서의 불평등이 가정 내 불평등과 교차되면 부부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결과는 낳는다. 남성과 결혼한 여성의 수입은 평균적으로 배우자보다 42% 낮다. - 중략 - 여성과 남성이 혼자 사는 경우에는 성별에 따른 수입 격차가 9%에 불과하다.” 94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80세 이상 여성 중 62%가 혼자 살고 있는 데 반해 비슷한 연령대 남성 중 혼자인 사람은 27%에 불과하다. 2015자산조사 데이터에 따르면, 여성의 사별 경험과 주책 소유 간의 상관관계는 부(-)의 상관 관계를 나타낸다. 반면, 남성의 사별 경험과 주택 소유 간 상관 관계는 드러나지 않았다.” 103

 

현재 80세 이상으로 양로원에서 거주하는 인구의 80%가 여성이다”. 일반 주택에서 생활하는 노인 중 70%가 자가 주택 소유자인 반면, 양로원에 사는 인구 가운데 자가 주택 소유자는 3분의 1미만이었다. - 중략 - 사별한 여성들이 재산을 포기하는 상황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103

 

 

법의 정신에 어긋나는 자산 조정에 참여하는 변호사와 공증인은 자본, 특히 생산 자본의 남성 대표성에 기초해 있다.” 187

 


재산 분할 시 보상의 금액과 지급 시기를 결정하는 건 남성 쪽이다. 시간과 돈은 남성의 편이다” 261


 

자녀를 매일 돌봄으로써 양육과 교육에 주된 기여를 하는 것도 여성이지만, 양육비와 수당을 청구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여성이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자신의 재정 상황 및 결혼 여부를 증명해야 하는 것도 바로 여성이다” 297

 

 


여성이 남성보다 우수한 문화적, 교육적 자원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성과 남성은 동일한 방식으로 그 자본을 활용하는가? 따라서 경제자본과 교육자본을 연결하여 가족 재생산 전략과, 그것이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궤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305

 


경제 자본의 축적과 가족 재생산 전략에서 성별 역할이 평생에 걸쳐 적용된다.”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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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 키르케고르 아포리즘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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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해방으로 비상하는 절망의 변증법

보편적(?) 인간, 보편적(?) 이성이라는 서양 철학의 거대 담론에서

키르케고르는 개인을 구출해냈다.

(그의 삶과 철학은 실존주의의 시작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세상에서도 결단코 자기 자신을

갖고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1)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관찰하면

얼마나 불행해지는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잘못된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얼마나 더 불행해 지는지 ”(27)

‘생’이라는 거대한 미지를 안고 세계에 던져진 존재들은

역사와 시대를 앓느라, 주어진 시스템을 살아내느라

자신이 어떤 정신적 위기 속에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삶의 조류에 휩쓸린다.

키르케고르가 목격한 19세기 유럽은 21세기 세계를 잉태하고 있다.

그의 시선에 담긴 2세기 전 개개인의 실존은

현대인의 내면 풍경, 그 밑그림이다.

우울, 불안, 절망

이 정신적 상태들은 현대의 의술로

치료 받아야만 할 병리적 상태인가?

이 부정적 혐의가 덧씌워진 감정의 정동들은

키르케고르에게 개인의 실존을 이해하는 관문이며

다른 차원의 삶(진리 안의 삶, 윤리적 삶)으로 비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에게 우울과 불안은

현실의 실존 상태를 진단하게 하는 징후이며,

실존을 심원한 심연으로 밀어붙이는 힘이다.

“불안은 정신적인 힘이고,

이런 힘을 가진 육체는 스스로 인간의 심장을

향해 굴을 뚫고 들어간다.” (61)

기꺼이 절망을 선택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개인은

실존의 막다른 경계에 단독자로 서게 된다.

실상의 허무, 그 바닥까지 내려간 개인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지경 속에서

마침내 자신을 경악 속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79)

그에게 남겨진 것은 실존 그 자체이며,

실존적 선택뿐이다.

퇴로가 없는 면벽의 선택만 그 앞에 놓여진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망실된 자기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다.

"선택을 통해 인격은 자신이 선택한 것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반대로 선택을 하지 않을 경우, 인격은 하염없이 쇠약해질 뿐이다.” (101)

동시에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실존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타협이 불가능한 절망 속에 행해진 선택은

자기 자신과 단독자로 직면할 수 있는 해방된 고독이자

자유로 도약하는 탈출구다.

“이 말(이것이냐, 저것이냐)은

나에게 항상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 중략 -

이 말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대립을 움직일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대립은 오로지 자유를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자유를 위해서 싸운다.” (97)

이러한 분투 속에 그는 결국

실존에 가장 절실한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되어

단독자로서 신과 대면하는 것이다.

절망, 선택, 구원.

구원의 트라이앵글.

절망의 변증법을 지나 구원에 이른 것이다.

구원은 단독자로서 신과 독대하는 것이다.

무신론자 현대인들에게는 단독자로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더욱 고독하고, 혹독한 자기 책임이 따를 것이다.

“절망이라는 질병은 완전히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그런 질병에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다면,

이는 가장 심각한 불행이다” (81)

“누군가 진정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절망부터 해야 한다. 이는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

품고 있는 확신이다” (121)

공동체 안의 여러 사회적 지위와 역할로 호명되는

개인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나’는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어떤 공동체적인 기획이나 목표, 열정 없이

‘윤리적’ 단독자로서, 나는 나를 직면할 수 있을까.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는

타자와 내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키르케고르가 되찾아야 할 ‘나’라고 부르는

실존은 욕망으로 추동되는 자기애, 자존감, 나르시시즘과는 결이 다르다.

그가 자발적 절망을 관통해서 만나야 한다고 역설하는

자신은 윤리적 존재로서의 나이다.

내가 선택한 자유의 다른 말은 책임을 지는 나이다.

제도권 종교 시스템을 매개하지 않고

신을 단독자로서 독대하는 나는

무한한 신의 은총을 향유하는 만큼

신의 말씀을 구현하는 단독자로서

무한한 책임 또한 감내해 한다.

절망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거듭나라는

그의 잠언들이 육중한 무게의 자기발견 요구이다.

키르케고르의 신의 자리에 괄호를 쳐본다.

괄호 안에 무엇을, 누구를 넣을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신념, 가치, 사물, 이상향, 인물, 신일수도 있다.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

키르케고르는 허무와 공허 속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보다 높은 정신, 윤리적 가치 속으로 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높은 가치를 향해 자아를 던졌을 때,

응답으로서 되돌려 받는 자유롭고 해방적인 자아.

절망의 변증법가 다다른 종착지는 자기 욕망에 포박당한 자아를 비우고

인간의 욕망에서 해방된 심원한 가치에 복종하는

한없이 충만한 자유로운 자아다.

절망과, 절망의 변증법을 역설하는

키르케고르의 잠언들은 묻는다.

“절망의 변증법”을 통과해

당신은 “무엇” 과 단독자로 직면할 것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구원으로 가는 절대적 조건으로서 절망을 설파하는

키르케고르의 잠언집 제목이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다.

잔인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한 제목이 아닌가.

키르케고르가 지금, 여기의 세계를 목격했다면

그의 사유는 어떤 언어를 선택했을까.

물론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유럽도

종교적 독단과 전쟁으로 괴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긍정’과 ‘낙관’이, ‘구원’과 ‘희망’이

시장에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로

사고 팔리는 세계는 아니었다.

절망이나 비관이 이 정도로

부당한 혐의 속에 유폐되지는 않았다.

현대는 그야말로 ‘절망조차 금지된 세계’이다.

어떤 글들은 닳지도, 늙지도 않는다.

시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전언으로 현재에 거듭 당도한다.

존재의 부조리한 실상을 재차 일깨우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적 현재를 의심하는 질문들은

언제나 현실을 낯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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