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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시민들
백민석 지음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어떤 여행지든 여행자에게 그곳은, 여행자가 다닌 만큼 새롭게 다시 생성된다.
나는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기도 했지만, 도시에 내려서는 걷고 또 걷는 식으로 도시들 또한 횡단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른 누군가가 보여 주고 들려준 러시아가 아니라,
나만의 또 다른 새로운 러시아를 만들어 갖고 싶었다."
백민석 <러시아의 시민들> p296 / 열린책들
묘하게도 2020년 올해는 뭔가 러시아란 나라가 괜히 친숙해진 해였다.
고골의 <뻬쩨르부르크 이야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그리고 소련 체제를 풍자하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었고 세계대전을 다룬 역사서를 보며 러시아의 혁명사를 접했다.
그리고 이 책이 마치 그 정점을 찍는 것 같다.
러시아의 풍경보다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의 사진이 훨씬 많은 독특한 여행서 <러시아의 시민들>
그렇다고 작가가 러시아 역사에 엄청나게 해박해서 러시아 시민들의 혁명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그런 책은 아니다.
러시아에 편견과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모종의 낭만을 품고 있던 작가가 직접 자신의 발로 그 땅을 걸으며 느낀 감상이 이 책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나도 러시아에 대한 편견이 있다. 심지어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한번 다녀와봤는데도 편견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2박 3일이란 시간이 편견을 내려놓기에 너무 짧았기 때문이리라.
모스크바의 2월은 너무 추웠고, 그야말로 황량한, 머릿속 인상 그대로의 살풍경한 도시였다.
사람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나 역시도 낯선 도시가 주는 두려움과 공포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에 그들은 좀체 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 밖에 인상적인 기억은 레스토랑과 카페가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해 들어가기만 하면 졸음이 쏟아졌고, 바실리 성당과 크렘린 궁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는 것. 러시아 정교회 성당 내부가 살풍경한 겨울의 나라답지 않게 너무 컬러풀해서 놀랐다는 것.
백민석 작가가 느낀 찰나의 인상은 나와 비슷했지만 체류기간이 긴 만큼 훨씬 깊게 러시아와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을 깊숙이 이해하고 온 것 같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룬 나라, 20세기 내내 냉전의 한 축이었고 가장 정치적인 나라였던 러시아.
하지만 저자는 러시아 거리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시구로 친숙한 시인 푸시킨의 동상을 가장 많이 접한다.
혁명의 딱딱하고 독재의 경직된 분위기를 상상했던 것과 달리 러시아에는 예술과 서정성이 풍부한, 시가 더 없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저항을 탄압할 것만 같은 소비에트 체제 속에서도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버스커들이 존재했고, 러시아의 교회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신실한 마음을 받아내고 있으며, 미술관에는 우리가 잘 몰랐던, 인물의 감정 표현에 주력한 러시아 회화들이 어마어마하게 걸려있다.
저자는 '러시아인들은 제 일터와 생활 공간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알록달록 예쁘게 꾸미며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것 같다며, 그들의 남다른 디자인 감각에 감탄하기도 한다. 러시아라는 나라를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무채색의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인상이다.
반면 레닌은 여전히 러시아의 영웅으로,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신성한 영역으로 러시아 시민들에게 취급되고 있으며,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간 저자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던 사람들도 두 세번 촬영이 거듭되면 표정이 굳으며 경계하기 시작한다.
이런 모습은 뭔가 구체제가 남긴 씁쓸한 흔적 같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로망과 현실에 대한 저자의 소회도 재밌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여행자들이 아닌 광활한 러시아 영토에서 생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동수단이라는 것.
은하철도 999같은 검정 증기열차를 상상했다면, 그냥 빨간색 ktx같은 열차라는 것.
침대칸이 있는 열차지만 엄청나게 불편하다는 것과 차창 밖으로 설원의 풍경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창문이 너무 지저분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침대에 누워있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다는 것 등등.
하지만 우리는 시베리아에 옛 DNA를 두고 온 사람들처럼 그 풍경을 보고 싶어하며 횡단 열차에 탑승하는 로망을 품는다.
나 역시도 언젠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걸 버킷리스트에 넣어뒀으니까.
저자의 리얼한 경험담에도 이러한 기대는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또 한가지 부러웠던 경험은 볼쇼이 극장에서 관람한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 공연 관람이다.
'1950년대 테발디를 기대했지만 더 나은 무언가를 보고 온 공연'이었다는 저자의 감상에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 오른다.
언젠가 다시 러시아를 방문할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보고 오리라 버킷리스트에 추가할 목록이 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는 물음에 늘 미소로 답했던 이들은 러시아의 시민들이었다.
내가 가본 어느 나라 사람들도 이들보다 더 친절하지 않았다."
백민석 <러시아의 시민들> p184 / 열린책들
돌이켜보면 여행지에서 풍경이나 건축물보다 큰 인상을 남긴 건 그 곳의 사람들이었다.
저자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이 여행책을 시민들 중심으로 서술해나간 건 아닐까.
이따금 저자를 불러 세우고 사진 찍을 만한 곳을 가르쳐 주는 이들, 직접 동행하며 길을 안내해주는 이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낯선 이에게 계속 말을 걸어주는 이들. 이런 장면을 읽을 때마다 혼자 떠난 여행길에서 만났던 친절했던 이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다시 러시아를 여행할 때는 더 이상 굳어 있지 않아야겠다.
내 속의 편견을 내려놓고, 러시아 시민들의 친절한 미소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싶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